‘하나님의 숙소’‘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불리는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은 성경의 이야기와 성자들의 삶을 그린 아름답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하다.
6세기말 선교사 어거스틴이 영국 왕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에 대성당을 세워 그곳의 감독으로 활동하였다.2번의 화재로 초기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세에 들어서서 지금의 고딕양식 건물이 완성되었다.영국의 교회사와 수명을 같이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다음 가는 지위를 얻고 있다.
안셀무스는 바로 이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다.그는 신앙과 이성,초자연과 자연을 조화하려 했던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서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소홀함이 발생한다면 도대체 올바른 순서란 무엇이겠는가?”(인간이 되신 하나님 1권 1장)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서북부 아오스타에서 1033년 태어났다.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란 그는 질서,책임,순종과 기쁨,온유,친밀함을 갖췄었다고 한다.23세 되던 1056년에 고향을 떠나 3년동안 세상을 떠돌다 1059년 노르망디에 위치한 베크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곳의 수도원장 랑프랑은 문법과 변증이라는 논리학에 뛰어난 인물이었다.안셀무스는 그의 뒤를 이어 1063년부터 1078년까지 베크 베네딕트수도원 부원장으로,1078년부터 1093년까지 수도원장으로 봉직하며 뛰어난 신학서적들을 펴낸다.그의 저술은 수도승다운 도덕적 훈계와 영적 성숙,독서와 명상의 향기를 담고 있었다.
안셀무스는 1079년 영국을 처음 방문한다.그의 스승 랑프랑이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있었던 것이다.랑프랑이 1089년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2세는 오랜 기간 대주교직을 비워뒀었다.랑프랑의 수제자 안셀무스가 캔터베리의 대주교직에 거론됐다.안셀무스는 마침내 1093년 12월8일 영국의 감독들 앞에서 요크의 대주교 토머스의 집전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다.
그의 신학은 수도원 안에 머무르지 않고 ‘순종’이라는 개념을 통해 실천으로 나아갔다.하나님은 “그보다 더 큰 그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순종이란 그런 하나님을 세상의 주(主)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그가 볼 때 인간은 순종을 거절함으로써 자유와 행복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캔터베리의 대주교직에 오른 안셀무스는 그러나 자신의 순종 때문에 도전을 받았다.중세에는 서임권을 놓고 권력투쟁이 있었다.누가 성직자를 임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교황과 세속 정치가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인 것이다.
세속 권력을 거부한 안셀무스는 영국왕에게 봉토 서약을 거절했다가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유를 따라 기꺼이 인고의 세월을 선택했다.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술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시었는가?’를 완성했다.여러 공의회에 참석해 신학적 입장을 설파하기도 했다.
1107년 8월1일 웨스트민스터 제국의회에서 교황과 왕이 합의(Concordat)를 선언해 서임권 투쟁은 종지부를 찍었다.안셀무스도 2번의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대주교직에 돌아왔다.안셀무스는 다음의 마지막 말을 남기고 1109년 4월21일 캔터베리에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나는 내가 거저 얻은 바를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꺼이 주고 싶다”(…quod gratis accepi,gratis volui petentibus impendere)
안셀무스의 저서 중 ‘독백’(Monologion,부제:신앙의 근거에 관한 명상의 한 범례)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였다.안셀무스는 이전까지의 명상은 성서를 읽고 시편을 연구하는 것이었다.안셀무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성서의 권위가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증명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이 책을 썼다.모든 존재 중에 가장 좋고 위대한 최고의 존재가 있다.모든 존재는 이 존재를 통해서 있고 이 존재로부터 나왔으며 이 존재가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독백’이 많은 논증의 연쇄적인 조합이라면 ‘담화’(Proslogion,원제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는 하나님이 진리이고 선이심을 밝힌 책이다.특히 이 책의 2장은 ‘존재론적 신 존재증명’으로 유명하다.그는 하나님을 더 이상 위대한 것이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최고의 완전한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이성적인 증명이 신앙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은 이런 사유와 신앙의 간극을 없애기 위한 시도였다.이 책에서 안셀무스는 구원론에 관심을 돌려 하나님-인간의 구속사역을 이성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한다.그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은 인간의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만족케 한다고 밝힌다.
안셀무스는 어떤 학교나 학파도 세우지 않았다.스콜라주의 또한 그가 주도하거나 기획하지 않았다.그의 학문적인 태도인 ‘오직 이성’ 역시 제대로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사실 그는 스콜라 신학자라기보다는 수도사였다.존재론적 신 존재증명이나 중세 봉건적 사회제도에 기초하고 있는 구속론에 관한 그의 입장은 후대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그러나 전통적인 권위를 이성으로 검증하고 새롭게 결정지으려 한 스콜라주의적 태도가 안셀무스로부터 나온 것은 틀림없다.
이은재 <감신대 교수>
◆필자 약력
△감리교 신학대학교 및 대학원 졸업 △독일 감리교 신학대학 교환 장학생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현 감리교 신학대학 초빙교수
6세기말 선교사 어거스틴이 영국 왕을 개종시키고 캔터베리에 대성당을 세워 그곳의 감독으로 활동하였다.2번의 화재로 초기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세에 들어서서 지금의 고딕양식 건물이 완성되었다.영국의 교회사와 수명을 같이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 다음 가는 지위를 얻고 있다.
안셀무스는 바로 이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다.그는 신앙과 이성,초자연과 자연을 조화하려 했던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이성으로서 설명하려고 감행하기도 전에 먼저 믿어버리고 나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소홀함이 발생한다면 도대체 올바른 순서란 무엇이겠는가?”(인간이 되신 하나님 1권 1장)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서북부 아오스타에서 1033년 태어났다.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란 그는 질서,책임,순종과 기쁨,온유,친밀함을 갖췄었다고 한다.23세 되던 1056년에 고향을 떠나 3년동안 세상을 떠돌다 1059년 노르망디에 위치한 베크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곳의 수도원장 랑프랑은 문법과 변증이라는 논리학에 뛰어난 인물이었다.안셀무스는 그의 뒤를 이어 1063년부터 1078년까지 베크 베네딕트수도원 부원장으로,1078년부터 1093년까지 수도원장으로 봉직하며 뛰어난 신학서적들을 펴낸다.그의 저술은 수도승다운 도덕적 훈계와 영적 성숙,독서와 명상의 향기를 담고 있었다.
안셀무스는 1079년 영국을 처음 방문한다.그의 스승 랑프랑이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있었던 것이다.랑프랑이 1089년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2세는 오랜 기간 대주교직을 비워뒀었다.랑프랑의 수제자 안셀무스가 캔터베리의 대주교직에 거론됐다.안셀무스는 마침내 1093년 12월8일 영국의 감독들 앞에서 요크의 대주교 토머스의 집전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다.
그의 신학은 수도원 안에 머무르지 않고 ‘순종’이라는 개념을 통해 실천으로 나아갔다.하나님은 “그보다 더 큰 그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순종이란 그런 하나님을 세상의 주(主)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그가 볼 때 인간은 순종을 거절함으로써 자유와 행복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캔터베리의 대주교직에 오른 안셀무스는 그러나 자신의 순종 때문에 도전을 받았다.중세에는 서임권을 놓고 권력투쟁이 있었다.누가 성직자를 임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교황과 세속 정치가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인 것이다.
세속 권력을 거부한 안셀무스는 영국왕에게 봉토 서약을 거절했다가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자유를 따라 기꺼이 인고의 세월을 선택했다.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술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시었는가?’를 완성했다.여러 공의회에 참석해 신학적 입장을 설파하기도 했다.
1107년 8월1일 웨스트민스터 제국의회에서 교황과 왕이 합의(Concordat)를 선언해 서임권 투쟁은 종지부를 찍었다.안셀무스도 2번의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대주교직에 돌아왔다.안셀무스는 다음의 마지막 말을 남기고 1109년 4월21일 캔터베리에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나는 내가 거저 얻은 바를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꺼이 주고 싶다”(…quod gratis accepi,gratis volui petentibus impendere)
안셀무스의 저서 중 ‘독백’(Monologion,부제:신앙의 근거에 관한 명상의 한 범례)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였다.안셀무스는 이전까지의 명상은 성서를 읽고 시편을 연구하는 것이었다.안셀무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성서의 권위가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증명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이 책을 썼다.모든 존재 중에 가장 좋고 위대한 최고의 존재가 있다.모든 존재는 이 존재를 통해서 있고 이 존재로부터 나왔으며 이 존재가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독백’이 많은 논증의 연쇄적인 조합이라면 ‘담화’(Proslogion,원제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는 하나님이 진리이고 선이심을 밝힌 책이다.특히 이 책의 2장은 ‘존재론적 신 존재증명’으로 유명하다.그는 하나님을 더 이상 위대한 것이 없는 그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최고의 완전한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이성적인 증명이 신앙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은 이런 사유와 신앙의 간극을 없애기 위한 시도였다.이 책에서 안셀무스는 구원론에 관심을 돌려 하나님-인간의 구속사역을 이성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한다.그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은 인간의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만족케 한다고 밝힌다.
안셀무스는 어떤 학교나 학파도 세우지 않았다.스콜라주의 또한 그가 주도하거나 기획하지 않았다.그의 학문적인 태도인 ‘오직 이성’ 역시 제대로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사실 그는 스콜라 신학자라기보다는 수도사였다.존재론적 신 존재증명이나 중세 봉건적 사회제도에 기초하고 있는 구속론에 관한 그의 입장은 후대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그러나 전통적인 권위를 이성으로 검증하고 새롭게 결정지으려 한 스콜라주의적 태도가 안셀무스로부터 나온 것은 틀림없다.
이은재 <감신대 교수>
◆필자 약력
△감리교 신학대학교 및 대학원 졸업 △독일 감리교 신학대학 교환 장학생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현 감리교 신학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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