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의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슈테판성당(Stephansdom)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의 교회인데 첨탑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137m로 사원의 탑으로는 세계 3번째 높이이다. 이 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완성되었는데 길이 65m, 넓이 35m의 십자가형의 성당 지붕은 선명한 청색과 금색 타일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지하에는 오스트리아 황제들의 내장을 넣어 둔 항아리와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카타콤브가 있다. 이 성당에서 모짜르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합스부르그 왕가가 거처했던 호프부르그궁전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지어진 구 왕궁과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건조된 신 왕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 왕궁에는 레오폴드 1세가 카를로네에게 명해서 건조한 레오폴드 궁전과 요제프 1세의 왕후 아말리아의 성이었던 부르크가 있으며, 또 요세프 1세의 거실과 서재가 위층에 있다. 구 왕궁의 일부는 현재도 연방정부의 외무부에서 사용하고 있어 26개의 방만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데, 왕실의 갖가지 비품, 고블란 직물로 된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궁전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궁전의 한 모퉁이에 있는 승마학교는 가장 고도의 테크닉이라 불리는 스페인식 마술을 보여준다.
또한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아름다운 성가가 울리는 궁전교회도 있다. 빈의 명물 비엔나소년합창단(Wien Knabechor)은 1498년 왕궁 예배당의 합창단으로 설립되었다. 죠셉 하이든과 프란츠 슈베르트도 이 합창단에서 노래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미사 합창은 7, 8월을 제외한 매주 일요일 종교 기념일에 왕궁의 부르크카펠(Burgkapelle)에서 들을 수 있다.
빈의 가장 아름다운 거리인 콜 마르크트 거리에서는 푸른 돔의 왕궁이 보이며 부르크 문을 따라 걸어가면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 나오고 마리아 테레지아 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술사,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환상대로인 링(반지) 순환대로를 따라 국회의사당, 부르크 극장, 오페라 하우스 등이 있으며 오페라 하우스에서 왼쪽으로 슈베르트 링 공원거리를 따라 올라가면 시립공원이 나온다. 이 곳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다운 동상이 서 있다.
시 중심부에서 서역을 지나 서남쪽으로 약 5km 지점에 있는 쇤부른 궁전(Schloss Schönbrunn)은 1696년 레오폴드 1세가 바로크 건축의 거장 피셔폰 에를라하에게 명령하여 원대한 별궁 조경계획을 세우게 했고, 다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인 1744년에서 1750년까지 진행되어 피카시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모두 1441개의 방이 있는 합스부르크 황제 가문의 별궁이며 프랑스의 베르사이 궁전을 본 따서 지은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궁전이다. 원래 왕족의 사냥터 별궁이였으나 터어키군의 침공이 있은 후 현재와 같은 궁전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여름별궁으로 사용되다가 마리아테레사 여왕이 증축, 주로 이 성에서 생활하면서 16남매를 낳아 키웠다. 프랑스 루이16세의 왕비로 프랑스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 마리앙트와네트도 이 궁전에서 자랐고 이 궁전에는 모짜르트가 6세 때 어전연주를 한 방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몰락 후 영토처리 문제로 비인회의가 열렸던 방, “회의는 춤춘다”라는 말이 생겼던 크고 아름다운 무도회장이 있다. 현관 건물의 오른쪽 건물은 극장과 마차 박물관(Wagenburg)인데36개의 황실 마차가 전시되어 있으며 중앙 건물은 황제의 생활관으로 이곳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프란츠 요셉, 마지막 황제인 카알 1세의 유물등을 볼 수 있다. 궁전 정원 언덕에는 용사 기념비가 있는 글로리에테(Gloriette) 유적지가 있고 동물원과 분수, 1883년에 세워진, 유럽에서는 가장 큰 글라스하우스 열대식물원도 있다.
음악의 도시 빈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도나우 운하 연안에 있는 한적한 공원, 시립공원(Stadt Park)있다. 빈 시에서 운영하는 큰 공원으로 이곳 시민들의 휴양소이다. 여름철 밤이면 7시부터 11시까지 요한 슈트라우스 관현악단이 요한 슈트라우스 동상 앞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비엔나왈츠를 연주하며 그 음악에 맞추어 일반 시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나와서 비엔나 왈츠를 추는데 밤9시가 되면 약 30분 동안 빈 시의 지정 댄스들이 정장을 하고 나와 시범 왈츠를 춘다. 이는 가히 빈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범 왈츠는 빈 시민의 왈츠에 대한 지도와 유지, 보급을 위해 끊임없이 매일 계속되는 것으로 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다. 이 공원의 남동쪽 숲에 바이올린을 켜는 왈츠왕 요한 슈트라우스의 동상이 있으며 남쪽에 펼쳐진 공원에는 베토벤상이 서 있고, 그 밖에도 많은 음악가의 동상이 있다. 부근에 콘체르트 하우스가 있다.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Staatsoper)는 2차 세계대전 때 국회의사당, 빈 시청사와 더불어 폭격을 당했다가 국회의사당이 첫번째로 수리되려 하자 빈 시민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국민투표에 부쳐졌는데 80%이상이 오페라 하우스를 먼저 수리해야 된다고 했다. 이유는 국회의결이란 나무 그늘에서라도 할 수 있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시민들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장려한 외관에 어울리게 내부도 고블란의 태피스트리와 모짜르트의 마적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화려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중앙묘지(Zentralfriedhof)에는 슈트라우스 부자와 브람스, 슈베르트, 프란츠 본 수페, 베토벤, 쉰베르크, 모짜르트 등 음악가들의 묘비가 있다. 빈에서 태어나거나 활동했던 많은 유명 음악가들을 기념하는 동상과 기념관 등이 빈 곳곳에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모짜르트 기념관(Mozart Memorial)이다. 잘쯔부르크에서 태어나 1781년에 빈으로 이사온 모짜르트는 거처를 11번이나 옮겼는데 그 중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 이 곳 '피가로 하우스'이다. 이 집에서 모짜르트가 빈에서 가장 마음이 편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시절 그의 아내, 아들과 함께 3년동안 살았는데 이곳에서 '피가로의 결혼'이 작곡되었다. 이 집 2층 전체는 전시실로 모짜르트가 사용하던 피아노, 여러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피가로 하우스에는 하이든, 베토벤, 브람스의 초상도 걸려있는데 모짜르트는 이 곳에서 하이든, 베토벤 등과도 교류했다. 모짜르트가 마지막 살던 곳은 현재 슈테플백화점 건물의 6층, 한쪽에 있는데 살림이 어려워지자 추운 겨울에 장작 살 돈이 없어서 추위를 이기려고 아내를 붙잡고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빈 제 4구에는 모짜르트 광장이 있고 조그만 광장에 있는 분수가 마적의 분수이며 성 마르크스 묘지에는 모짜르트의 묘비가 있으나 잘 알려진 대로 가 무덤이다.
18세기 후반 비엔나고전파를 대표하며 많은 명작을 남긴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은 당시 최고의 인기있는 작곡가였는데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동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아주 조그만 마을, 로라우(하이든의 생가와 기념비가 있음)에서 태어나 헝가리에 국경을 접하는 아이젠슈타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빈으로 왔다. 하이든의 집은 하이든이 1793년부터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하이든이 죽은 후에 경매에 붙여져 한 음악 거래상의 집이 되었었으나 1904년 빈 시의회가 이 집을 사서 정식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이 곳에서 하이든은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고 하이든이 쓰던 지휘봉과 <천지창조>의 초판 악보, 피아노 등의 유품과 그의 데드 마스크가 있고, 브람스의 방도 있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빈을 침입하자 하이든은 이 방에서 자신이 작곡한 오스트리아 국가를 피아노로 세번 연주하더니 그 며칠 뒤에 숨졌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마리아 힐프 교회 앞에는 1887년에 세워진 하이든의 화강암 석상이 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생을 마감했으므로 생가와 숨을 거둔 곳이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슈베르트의 생가는 빈 제 9구에 있는데 2층 기념관에 슈베르트의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초상화(원화는 빈 역사 박물관), 슈베르트가 사용하던 악보와 악기, 안경등이 있으며 끝쪽에는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를 상징하는 숭어를 안고 있는 하얀 나신의 소녀상이 있다. 슈베르트가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죽은 곳은 케텐브뤼켄가쎄 6번지3층이다. 슈베르트는 숨을 거둔 후, 유언대로 베토벤의 곁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뵈링 묘지에 함께 묻혔다가 현재 빈 묘지 특별 구역으로 이장되서 베토벤 옆에 자리잡고 있다.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16세 때인 1787년 모짜르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잠시 빈에 들렀던 이후 1792년 본의 궁정 기사 발트슈타인의 권고로 다시 빈으로 와서 하이든의 제자가 되었다. 베토벤은 빈에서만 27번 이사를 했기 때문에 베토벤 하우스는 빈에 여러 개가 있지만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하일리겐의 베토벤 하우스가 가장 유명하며 3번 교향곡을 작곡한 에로이카 하우스와 5번 교향곡을 쓴 파스콸라티 하우스까지 현재 빈 박물관에서 관리되는 베토벤 하우스는 총 3곳이다. 가장 유명한 곳인 하일리겐 슈타트는 빈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는데 베토벤이 그의 귓병치료차 온 곳이다. 청력의 회복이 기대했던 것처럼 되지 않자 절망한 끝에 그해10월 동생들 앞으로 유서(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다가 마침내 절망을 극복하고 제 2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이 유서의 집 근처 프퐈르 광장 모퉁이에 두 3각 지붕의 집도 베토벤이 살던 곳이며 광장에서 나와 위쪽으로 올라가면 베토벤이 즐겨 다니던 숲길이 있는데 전원 교향곡인 6번 교향곡을 이 곳을 산책하면서 착상했다고 한다. 베토벤이 늘 산책을 했던 하일리겐 슈타트 공원도 유서의 집 근처에 있는데, 공원한쪽에서 뒷짐을 지고 호주머니에 오선지를 쑤셔 넣은 베토벤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베토벤하우스는 운명 교향곡이 씌여졌던 파스콸라티 하우스-Pasqualati house로 빈 대학 바로 맞은편의 높다란 5층짜리 건물이다. 맨 꼭대기 층에 2칸이 전시실로 되어 있는데 여러가지 베토벤의 머리카락, 피아노 등 소장품이 있다. 이후 베토벤은 빈을 떠나서 온천으로 유명한 바엔이라는 도시에 9번 교향곡을 작곡하였고 다시 1823년 웅가르가세 5번지의 집에서 전곡을 완성했으며 슈바르츠슈파니어슈트라세 15번지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베토벤의 관은 슈베르트에 의해 호송되고 당시에 2만명을 넘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요한 슈트라우스도 슈베르트처럼 빈 태생인데, <왈츠의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요한 1세)의 맏아들로 <왈츠의 왕>이라고 불린다. 그는 6세 때 36마디로 된 왈츠를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안톤 콜만에게서 바이올린을, 성슈테판대성당 합창대장이었던 요제프 드레히슬러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웠다. 1844년 18세 때 공개연주 공인허가증을 취득, 24명으로 구성된 악단을 조직하여 빈의 서부 히팅에 있는 카지노 돔마이어에서 데뷔하였다. 그후 성공하여 아버지 악단의 라이벌로 성장했으나, 49년에 아버지가 죽자 두 악단을 통합하여 빈의 왈츠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새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즉위하자 63년에는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의 지위를 얻어 빈 무도회 기간에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1899년 6월 3일 빈에서 숨을 거둘 때 까지《박쥐(1874년 초연)》 《집시 남작(男爵, 1885년 초연)》 등 16곡의 오페레타와《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비엔나 숲속의 이야기》 《봄의 소리》 《황제왈츠》 등 왈츠 약 170곡 등을 작곡하였으며 그의 음악은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조의 수도 빈의 영화를 상징하고 있다. 슈트라우스 생가는 빈 제 7구의 레르헨펠더 슈트라세 16번지이나 기념관은 프라테스트라세 5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오르간과 피아노, 왈츠복, 소품 등이 잘 전시되어 있으며 그 당시에 왈츠가 얼마나 유행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소품들이 곳곳에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슈트라우스의 장례식에는 10만명이나 모여 슬퍼했으며 그의 무덤도 다른 음악가들의 무덤과 함께 빈 중앙 묘지의 특별 명예 구역에 있다.
베토벤 이후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 불리는 브람스 역시 빈에서 활동을 하다 빈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는데 그의 빈 시절 살던 집은(현 칼스플라츠) 1907년에 허물어 졌으므로 브람스를 위한 기념관으로 따로 정해진 곳은 없고 그가 생전에 존경하던 하이든의 기념관 안에 방 하나가 브람스 기념실로 되어있으며 브람스의 무덤과 고민하는 듯한 모습의 기념상이 빈 중앙 묘지에 있다. 브람스의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진 곳은 그가 죽은 집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카를스 교회로, 교회앞에 분수와 넓은 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 한쪽 끝에는 브람스의 호화로운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브람스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의 원숙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고전주의적 조형감을 중시한 독일음악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기도 하다.
빈 태생의 작곡가 쇤베르그의 기념관은 뫼들링에 있는데 이 곳에서 그가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살았다. 이 건물은 개축하여 1999에 오픈하였는데 이 곳에는 쇤베르그 작품세계와 생활이 잘 전시되어 있다. 쇤베르그는 제자 A. 베르크 및 A. 베베른과 함께 <신 비엔나악파> 또는 <제 2 차비엔나악파>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12음 음악>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음악을 창조하여 20세기 예술음악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치정권 시, 히틀러에 쫓겨 1933년 미국으로 건너가 41년에 미국시민권을 얻었으며 1936년 이후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나폴레옹에 바친 오드(1942)》 《바르샤바의 생존자(1947)》 등 반나치즘 작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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