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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스위스] 쯔빙글리 Zwingli(1484-1531)





쯔빙글리 Z
wingli(1484-1531)


<종교개혁사> 오덕교 ,<교회개혁사> 이상규 발췌,요약


1484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트하우스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쯔빙글리의 부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던 쯔빙글리를 삼촌 바돌로뮤가 있던 베센으로 유학을 보내어 교육을 시켰다.

쯔빙글리는 10살까지 삼촌 집에 머물면서 공부하다가 먼 친척 뻘이 되는 뷘쯔리가 있던 바젤의 성 테오도어학교로 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당시의 학제를 따라 3년간 라틴어,변증법,음악을 공부하였다.


쯔빙글리는 1496년 베른대학에 입학하여 하인리히 뵐프린 밑에서 고전과 음악을 공부하던 중 비엔나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그곳에서 스위스의 인문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요아킴 바디안을 만나 인문주의 사상을 배웠고,1502년에는 바젤대학으로 전학하여 토마스 비텐바하로부터 에라스무스의 개혁사상을 소개받아 인문주의가 되었다.

쯔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여 10여년 간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교인을 돌보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는데 바쳤다.특히 1513년부터 헬라어를 비롯한 고전 연구에 전력을 기울여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라틴어로 된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였다.이러한 학문적인 진보로 인하여 동료들로부터 "우리시대의 키케로"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쯔빙글리는 로마천주교회가 과연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을까 회의하기 시작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그의 개종과 함께 시작되었다.


1518년 취리히를 강타한 흑사병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흑사병이 번지면서 쯔빙글리의 형제 안드레아스를 비롯한 취리히 시민 3분의 1이 생명을 잃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서둘러 취리히를 떠났으나,선한 목자 쯔빙글리는 위험을 무릎쓰고 죽어 가는 취리히 시민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결국 1519년 9월 흑사병에 전염되었고,1년 가까이 죽음의 문턱에서 고생하다가 1520년 여름에 이르러야 겨우 건강을 회복하였다.


투병을 통해 쯔빙글리는 그의 전통적인 카톨릭의 신앙, 곧 동정녀 마리아와 로마천주교회에 대한 신앙에 회의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만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이러한 영적인 체험은 취리히 개혁 운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쯔빙글리는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시작하여 사도행전, 바울서신, 공동서신 순으로 설교함으로 개혁운동을 펴 나아갔다.


교회개혁을 위한 쯔빙글리의 첫작품으로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라는 글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음식을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고 설교하고 이를 금지하는 교황의 법령은

복음에 의해 선포된 자유을  억압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쯔빙글리의 교회 비판은 그 범위를 넓혀갔다.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비성경적임을 비판하였고, 1522년에는 쯔빙글리와 동료사제들이
취리히 의회와 콘스탄츠 주교에게 복음에 대한 자유로운 설교를 보장할 것과 성직자의 결혼허용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취리히에서의 공개토론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제 1차 토론에서 쯔빙글리는 교회개혁을 위한 자기 입장을 쉽게 요약 정리한 <67개조>를 논쟁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이 문서에서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칙이요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보자임을 주장하고 카톨릭 교회의 미사제도, 교황제, 금식제도, 연옥설 등은 비성경적임을 지적하였다.

제 3차 토론이 있은 후 5개월이 지난 1524년 시의회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 교회당에서의 모든 성상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