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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영국] 옥스포드 링컨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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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에서 존 웨슬리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이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라면, 링컨칼리지는 그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더 깊은 학문적 연구와 성숙한 신앙으로 몰입해 들어갔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톰타워(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 정문) 우측 첫 사거리에서 하이스트리트로 한 블록 올라가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나타나는 링컨칼리지.

언뜻 보기에 크라이스트처치의 1/5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박한 규모의 대학이지만 작다고 무시할 수 없는, 감리교인인 우리에게는 의미 깊은 곳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장차 감리교라는 거목으로 세워질 메도디스트 운동의 씨앗을 품었던 ‘홀리클럽=신성회’(Holy Club)가 모였었기 때문이다.

링컨칼리지 사무실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존 웨슬리의 연구실로 안내할 사람을 찾았지만, 열쇠맡은 이가 이미 퇴근했다는 통보를 전해 들어야만 했다. 그저 한 번만 훑어볼 수 있게 해달라고 선처를 구했지만 내일 오라는 매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쪽사람들 원래 정해 놓은 시간 칼 같이 지킨다더니..., 욕심껏 빡빡하게 잡았던 촬영스케줄로 약속시간을 넘겨 나타난 우리가 물러서는 수밖에.

작은 사각형 모양의 잔디밭을 중심으로 사방 빙 둘러선 오래된 석조건물은 마른 혈관 같은 담쟁이덩굴로 덮여 있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날이 풀려 잎이 나면 포근한 빛으로 바뀌겠거니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담쟁이가 침범하지 않은 한쪽 벽면 2층 창 사이에 있는 낯익은 검정색 흉상이 눈에 들어왔다.

웨슬리 흉상은 사방에 철사로 만든 뾰족한 가시로 둘러싸여 비둘기의 오물 폭격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었다. 이 흉상 옆 창문 너머에 있는 방이 바로 웨슬리연구실이다. 이 연구실은 1926년 미국감리교회에서 존 웨슬리를 기념하기 위해 꾸몄다고 하는데, 실제로 존 웨슬리가 사용했던 방은 기념실 맞은편 방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구실로 향해 나무계단을 올라가 ‘웨슬리 룸’(The Wesely Room)이라는 문패와 문이 굳게 잠겨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돌아서려니 아쉬움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존 웨슬리는 1726년 이곳 링컨칼리지에 ‘펠로우’(Fellow)라는 교수직에 임명된다. 펠로우는 일종의 연구교수직으로 정교수를 지망하는 우수학생들 중 최고의 학생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자리다. 그는 1727년부터 링컨칼리지 학장의 복귀요청이 있었던 1729년까지 2년 동안 고향인 엡워쓰에서 아버지인 사무엘의 목회를 돕는다.

대학으로 복귀하던 1729년 11월, 그를 기다리는 한 무리가 있었으니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이었던 동생 찰스 웨슬리가 그해 1월에 꾸렸던 ‘홀리클럽’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삼백년 전 이 모임에선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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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칼리지 건물 한 쪽 벽에는 “홀리클럽, 감리교운동의 선구자 여기에 모였다.(The Holy Club, Precursor of the Methodist Movement, Met Hear.)라는 문구가 새겨진 명판이 붙어 있어 링컨칼리지와 홀리클럽(Holy Club)의 특별한 관계성을 내비치고 있었다.

홀리클럽은 당시 나태해진 신앙생활, 무력해진 영적상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찰스 웨슬리의 결의와 이에 뜻을 같이한 윌리엄 몰간, 로버트 커크함에 의해 시작됐다.

이 3인방은 모여 신약성경을 원전과 신앙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여기에 존 웨슬리가 합류하며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됐고, 홀리클럽은 다양한 모습으로 규모를 갖추며 발전해 나간다. 성경, 고전, 경건서적읽기, 자기성찰을 위한 경건훈련, 기도와 예배... 이후 몰간의 제안으로 죄수방문, 빈민구제활동, 병자방문, 무산자 아동을 위한 교육사업 등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살피는 일도 홀리클럽의 중요한 사역이었다.

홀리클럽은 여러 가지 규칙을 정해놓고 철저히 지켰는데,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한 그들에게 규칙과 훈련은 성화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규칙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홀리클럽의 맴버들은 새벽형(?) 인간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규칙 첫 번째 항목을 보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매일 아침 5시부터 6시까지, 저녁에는 9시부터 10시까지 개인기도시간과 자기성찰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쳤다고 한다. 존 웨슬리는 일평생 매일 새벽 5시에 설교를 했다는데, 이것이 그의 건강유지의 비결 중 하나였다고 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자랑해 왔던 새벽기도의 원조가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홀리클럽 맴버들이 규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켰던지, 사람들은 ‘Methodist’, 즉 ‘규칙주의자’니 ‘규칙쟁이’라는 식의 놀림 섞인 말로 그들은 불렀다. 바로 이 ‘Methodist'라는 말은 이후 ‘감리교도’라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으니 홀리클럽을 감리교회의 씨앗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웨슬리가 미국 조지아주 선교사로 떠나는 1735년까지, 만 6년 동안 함께한 40명의 회원들은 이후 영국을 이끄는 역량 있는 인물들로 활약한다. 홀리클럽, 보잘 것 없는 작은 씨앗, 하지만 그 속에 진실과 성실, 열정이 있었기에 결국 감리교회라는 큰 나무가 되어 오늘도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