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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영국] 옥스포드 크라이스트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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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옥스퍼드(made in Oxford)', 지난 2백여 년간 배출한 영국 수상만 열여섯 명에 이른다. 낮은 분지에 세워졌지만 ‘옥스퍼드로 올라갔다’는 표현이 자연스레 통용되는 전통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곳, 옥스퍼드에 들어섰다.

사진에서나 보았던 높고 낮은 첨탑의 위용을 자랑하는 고딕양식 건물 사이 골목길, 관광객들의 여유로운 걸음과는 대조적으로 잰걸음으로 강의실로 이동하는 범상치 않아 뵈는 학생들, 대로를 가득 메운 차량과 자전거, 오랜 세월동안 하나하나 들어선 예술품 같은 건물들의 무계획(?)한 배치는 과거와 현대가 모호한 경계선을 그리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옥스퍼드는 40개의 칼리지(단과대학)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13~16세기에 설립됐다. 우리가 옥스퍼드를 찾은 이유는 존 웨슬리가 1720년 바로 이곳에 입학해 1724년에 졸업, 문학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수로 젊은 시절을 보낸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직자로서의 그의 결단과 삶이 시작되었다는 점은 우리를 흥분시킨다.
웨슬리가 수학한 ‘크라이스트 처치’는 열세명의 총리를 배출할 정도로 실력과 역사, 규모면에서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다.

교회에나 어울릴 것 같은 명칭인 ‘크라이스트 처치’가 칼리지의 이름이 된 이유는 원래 그 자리가 중세시대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원인 세인트 프라이즈 와이드가 있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교육은 수도사의 정신과 규율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다.

크라이스트 처치를 구성한 건물들은 철옹성 성벽처럼 정방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들만의 비밀을 보호하려는 듯 완고한 느낌이 든다.

매일 저녁 9시 5분이 되면 칼리지 설립위원의 수인 101번의 종소리를 울린다는 톰 타워 아래에 있는 톰 게이트(Tom Gate)엔 중산모자에 롱코트, 단장(短杖)...온통 검정색으로 치장한 부리부리한 눈과 팔자 콧수염의 수위가 이 대학의 마스코트인양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드디어 우리를 웨슬리에게로 안내할 안내인이 약속시간을 조금 넘겨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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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제임스 로리라는 이 대학의 관리담당자를 따라 일초라도 아끼기 위해 서둘러 크라이스트 처치로 입성했다.

톰 게이트로 들어선 우리는 마치 동굴 막바지에 나타난 신천지이라도 본 양 감탄의 소리를 연발했다. 시야가 확 트이는 정사각형의 넓고 푸른 잔디밭, 그 한복판에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분수대, 빙 둘러 선 건물 옆을 옥스퍼드의 수재들이 옆구리에 책을 끼고 삼삼오오 짝지어 걷고 있었다.

우측 건물을 따라가다 들어선 곳은 만찬홀, 쉽게 말해 식당이었다. 크라이스트 처치의 대학생들이 지금도 라틴어로 감사기도를 드린 후 식사하는 곳이다.

한눈에도 오래돼 뵈는 갈색 긴 탁자와 등받이 없는 5인용 의자가 길게 정렬해 있고, 테이블 위에 놓인 램프들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어두워진 실내를 오랜지 빛으로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정면에는 바닥보다 약간 단을 높여 식탁을 따로 배치해 놓았는데 이곳은 교수들만의 자리라고 한다.

처음 방문한 이곳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했더니, 바로 여기가 그 유명한 영화 ‘해리포터’의 촬영 장소였다는 것이다. 호크와트 마법학교의 학생들이 식당에 모여 앉자 어디선가 부엉이들이 날아 들어와 학생들에게 선물을 하나하나 전해 주던 그 장면을 담아낸 곳 바로 이 홀이다. 그래서인지 촬영동안에도 방문객들로 연신 북적였다.

우리의 관심사는 홀의 사방 벽에는 걸려있는 다양한 크기의 초상화에 있었다. 50여개(?)쯤 되어 보이는 초상화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이 대학을 빛낸 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초상화들 속에서 존 웨슬리, 숨은 얼굴 찾기가 시작됐다. 굳이 명패를 확인하지 않아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그림 한 점이 들어오는 문 바로 오른편에 걸려 있었다. 수많은 크라이스트 처치의 쟁쟁한 인물 가운데 존 웨슬리는 그렇게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학적부를 들춰 보지 않았지만, 명패에 쓰여 있는 ‘존 웨슬리, 감리교운동의 창시자, 대학을 졸업했고 1727년 이곳에서 목사안수 받다’라는 짧은 문구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이런 흥분과는 달리 안내인은 초상화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원래 우리를 안내할 전문가가 따로 있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 대신 나왔다는 것이다. 시설관리와 수금차원(크라이스트 처치는 타 대학과는 달리 일반인들에게도 입장료 받을 정도로 명성이 있다)에서. 그래서 장소안내는 그의 몫이었지만, 존 웨슬리와 관련된 설명은 주로 박용호 목사(내동교회)와 조선석 선교사에게 돌아갔다.

‘1727년 이곳에서 목사안수 받다’, 존 웨슬리는 어떻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을까. 목사의 길을 걷겠다는 결단을 하기까지 근 10여 년 동안 고민했던 전력이 있던 필자로서는 그 과정이 여간 궁금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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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은 식당에서 한 모퉁이 돌아선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채플은 학생들에겐 예배의 자리를, 조금 전 식당에서 보았던 초상화의 주인공들에겐 육신의 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빛깔의 유리조각은 형형색색 특별한 이야기들로 모여, 대성당의 역사와 전통만큼 높은 명성을 뽐내고 있었다.

성당 설교단 뒤편 바닥에는 존 웨슬리가 이곳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기록을 새겨 넣은 정사각형의 석판이 웨슬리의 흔적을 알렸다.

옥스퍼드의 우등생 존 웨슬리는 많은 길 가운데 왜 목사의 길을 선택했을까. 물론 그에게 기본적으로 소명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 그 역시 여느 목회자와 마찬가지로 숫한 고민을 했을까.
추측컨대 무엇보다 ‘가난’이라는 올무가 그의 발목을 끌어 당겼을 것이다. 가난한 성직자인 부모가 빵을 구하기 위해 눈물지으며 힘겨워했던 날들을 존 웨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너무 빠듯한 장학금만으로 학창시절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사회적 신분과 명예의 상징인 가발이나 모자를 사는 것은 엄두조차 못 냈던 그는 머리 깎을 돈을 절약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길러 말아 올렸다고 한다. 웨슬리가 비록 좋은 부모 밑에서 신실하게 신앙교육을 받았었다지만, 다재다능한 그가 한 번쯤은 경제적인 이유로도 심각하게 다양한 가능성을 저울질해보지 않았을까.

이런 상황을 잘 아는 터에 웨슬리가 한 짐꾼과 나눈 대화 가운데 물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흥미롭다.

어느 날 존 웨슬리는 저녁까지 일하고 퇴근하려는 그 대학의 짐꾼에게 “코트가 더러우니 갈아입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 짐꾼은 “나의 코트는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코트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웨슬리의 저녁식사에 대한 말에 대해서도 “마실 물밖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마실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한다. 게다가 그는 지금 변변히 잠 잘 곳조차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한다. “나는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섬기는 열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그 짐꾼의 진심어린 마지막 고백은 웨슬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깨달음으로 남는다.

이 짧은 대화가 웨슬리를 평생 자신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하나님과 이웃에게 나누는 삶을 살게 만들었다하니 직업 이상의 그 무엇인 성직으로 나아가는 결심을 하는데 일조했으리라.

연말로 접어드니 임지를 옮길 때 사역보다는 생활조건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심할 때는 돈을 요구하는 민망한 말도 종종 들린다. 하지만 지금도 기본적인 삶의 조건인 의,식,주 어느 것 하나 족하지 않은 처지에서, 소명 때문에 가난을 벗 삼아 의연히 살아가는 많은 웨슬리의 후예가 있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