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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영국] 웹워쓰 세인트안드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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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랙토리 촬영을 마친 일행은 사무엘이 목회했던 세인트 안드레 처치(St Andrew's  Church)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제관 창문을 통해 보았을 때 꽤 멀어 보였던 교회는 막상 걸어보니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인트 안드레교회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었고,  오르막길은 좌우에 아름드리 가로수와 허리 높이의 가로등, 이름 모를 노란 꽃이 어우러진 호젓한 산책로 같았다.

13세기에 세워진 석조건축물에서는 중후함과 함께 오랜 풍상을 견디어낸 인내의 냄새가 풍겨났다.  예배당을 둘러친 안전망에 붙어있는  팻말과  건물 바로 옆에 즐비하게 늘어선 이끼 낀 묘비들이 풍기는 음산함은 이방인인 나에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3백 명쯤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예배실에는 서너 명의 인부들이 낡은 벽면을 뜯어내고 있었다.  마침 작업시간이 끝났지만 일행은  먼지 풀풀 날리는 공기 속에서 예배당 내부를 살펴봐야 했다.

어린 시절 존 웨슬리를 비롯한 사무엘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았던 팔각형 돌 세례반, 성례전을 위해 사용했다는 수산나의 의자,  벽 쪽에는 웨슬리와 관련된 내용과 웨슬리탄생 3백주년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행사들이 병풍처럼 전시돼 있었다.  웨슬리가 여덟 살이 되어 최초로 성찬을 분급 받았을 때 사용했다는 은으로 된 성배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1696년, 바로 이곳에 사무엘과 수산나 부부는 네 자녀들을 데리고 부임하여 1735년 그의 나이 72세 때까지 무려 39년을 사제로 섬겼다.

반평생을 바친 교회, 웨슬리 가족에게 이 교회와 교구가 그렇게 매혹적이고 행복했었을까?

웹워쓰는 당시 성직자들에게 고약한  곳이었다. 사방이 강으로 둘러 싸여 마치 섬처럼 고립된 황량하고 소외된 시골마을이 웹워쓰였다.  대가족을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박봉, 늘어만 가는 부채는 살림을 맡은 수산나의 애간장을 녹였다.

게다가 명문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학자 사무엘과 웹워쓰 주민들과는 지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사무엘은 국교도를 지지한 반면 마을 사람들은 비국교도 성향을 지니고 있어 갈등이 빈발했다.  이 대립은 단순히 감정싸움 정도로 그치지 않고 무수한 적대행위로 표출되곤 했다.
사무엘은 자주 위협을 받았고, 가족들도 폭언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사무엘은 정치적 입장 차이가 근원에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709년에 발생했던 목사관 대화재사건도 이들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일 정도다.

이만하면 진절머리를 치고 야반도주라도 할 상황이 아닐까. 샬프 대주교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 주민들을 잘 아는 터라,  이들을 치리하기 위해 다른 목회자를 파송할 요량으로 사무엘을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도리어 사무엘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이곳에서 뭔가 선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마치 적군의 화염이 저를 에워쌀 때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겁쟁이와도 같은 일입니다"라고 회신을 보냈다고 하니, 오기에 가까운 그의 헌신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오늘도 오지에서 편안의 유혹을 뿌리치고 몽매한 영혼들과 씨름하며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무명의 목회자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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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면 멀수록 좋은 것으로 처가와 뒷간을 꼽았던가,  뒷간은 집안 깊숙이 들어와 있고,  김치 한포기라도 얻어먹을라치면 처가 역시 가까워야한다니 이 말도 이젠 옛말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까이 하기엔 왠지 꺼려지는 것이 있으니 무덤이 아닐까.  영국여행 중 오래된 예배당 뜰을 밟을 때면 왠지 마음 한 켠에 스며드는 찜찜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아마 예배당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무덤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방인의 눈엔 예배당에 묘를 쓴 건지, 묘지에 기념예배당을 세운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인 곳도 여럿 있었다.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예배당 안에 시신을 안치하는 것은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의 중앙에 좀 더 가까울수록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교회 안에 무덤을 두고 싶어 했고, 권력이나 재력이 없는 사람들은 예배당의 바깥벽이나 정원에라도 자신의 사후를 의탁하려했단다.

이유야 어찌됐든 유럽의 오래된 교회들은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어우러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웹워쓰의 세인트안드레교회 역시 수십 기의 묘가 예배당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예배당 건물 바로 옆, 쇠창살로 보호받고 있는 특별한 무덤 하나. 바로 존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무덤도 그곳에 있었다.

정말 특이한 점은 무덤에 얽힌 사연을 아는 방문객은 아무 거리낌 없이 무덤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아마 아무 거리낌 없이 밟아 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무덤이 아닐까.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런 몰상식이 통할까. 사무엘 웨슬리는 첫 임지인 세인트안드레교회에서 평생토록 사역하고 그곳에 묻혔다. 존 웨슬리는 고향을 깊이 사랑했기에 순회설교여행 중에 자주 이곳을 방문했다.

1742년, 고향을 방문한 존 웨슬리는 당시 세인트안드레교회 교구담당사제인 롬리(Romley)에게 주일오후예배 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활동을 영국국교회의 전통과 규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롬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순순히 포기할 웨슬리가 아니었다. 그는 한 평 남짓의 아버지 무덤 위에 올라가 설교를 하기로 결심한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나오자 존 테일러는 저녁 6시에 교회 묘지에서 존 웨슬리가 설교할 것이라고 외쳤다. 사무엘의 무덤은 웨슬리 가문의 사유지였기에 롬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날 웹워쓰 역사상 가장 많은 청중이 설교를 듣기위해 모여 들었다.

웨슬리는 8일간 아버지의 무덤 위에서 설교했고, 마지막 집회는 3시간이나 계속됐는데, 너무 은혜로워서 마치 천국이 내려 온 것 같았다고 한다. 존 웨슬리는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강단에서 3년을 설교하는 것보다 그 분의 무덤에서 3일 설교하는 것이 링컨 지역교구민들을 위해 훨씬 낫다고 확신한다”고.

한 평 아버지의 무덤을 밟고 외쳤던 그의 설교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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