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라이프찌히(Leipzig)에서는 해마다 많은 세계적 박람회가 열리고 있으며 많은 출판사 등으로 상업적 번영의 재 도약을 창출하고 있다. 라이프찌히 중앙역은 유럽에서 가장 큰 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중심부로 들어가면 오페라 극장, 카알 마르크스 대학, 성 토마스 교회, 구 시청사 등이 한곳에 모두 모여있다. 오페라 극장 옆에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이 카알 마르크스 대학(Karl Marx universität)으로 라이프니쯔, 니체 등의 철학자들을 배출한 대학이다. 문호 괴테가 자주 들렸다는 술집 아우어바흐스 켈러(Auerbachs Keller)는 괴테상 맞은 편에 있다. 이 술집의 입구에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파우스트와 악마 메파토스의 조각이 있어 인상적이다.
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어 지는 거장 바하(Johann Sebastian Bach)가 27년 동안 칸토(Kantor)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던 성 토마스교회 (St. Thomas Kirche)는 아우어바흐스 켈러 뒤편에 있는데 이 교회는 1212년에서 1222년 사이에 지어졌다. 원래는 수도원이었으나 일부가 파괴되어 15세기 후반부터는 현재의 고딕 양식의 교회로 개조되었다. 이 곳에서 분주한 생활을 하면서도 바하는 200곡에 가까운 교회칸타타와 <마태복음> <요한복음>에 바탕을 둔 수난곡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27년 초연된 《마태수난곡》은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현재 성 토마스교회에는 바하의 무덤이 있으며, 후에 바하의 천재성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던 멘델스존 (Mendelssohn-Bartholdy)이 1843년에 기증한 바하의 상이 교회앞에 있고 그 맞은편에는 바하박물관이 있어 바하의 자필악보와 바하집안 가계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바하 이외에도 라이프찌히에서 활동했던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많은데 멘델스존, 그리그, 슈만, 바그너, 말러와 막스 레거 등이 이들이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은 독일의 소크라테스라 불린 계몽주의 철학자 M. 멘델스존의 손자이며, 아버지가 은행가이던 유대인 명문가의 자손으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 미술, 문학에서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고, 교양있는 양친을 비롯해 베를린의 뛰어난 예술가·학자들의 지도를 받아 재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833년 뒤셀도르프에서의 니더라인 (Nieder-Rhein)음악제로 큰 성공을 한 그는 그 곳 음악감독의 지위를 얻고 《메시아》를 비롯한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상연하였고, 그 영향에서 오라토리오 《성바울》과 피아노곡집 《무언가》의 대부분을 작곡하였다.
1835년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2차세계대전 후에 새로 지어짐)관현악단의 제 5 대 지휘자로 취임하여 뒤셀도르프에 한정되었던 음악생활을 독일의 중심적 존재로까지 높였다. 바하를 비롯한 오래된 음악의 소개와 함께 그 시대 사람들의 작품 연주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고, R. 슈만, N. 가제, L.H.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1843년 라이프찌히음악원 설립에 공헌하였고, 스스로 원장직도 맡았는데, 성 토마스교회 합창대장인 M. 하우프트만, 슈만, F. 다피트, C.F. 베커와 같은 당대 일류 음악가를 교수진으로 맞는 데 수완을 발휘하였다.
1847년 5월에 누이의 죽음에 따른 충격 때문에 같은 해 11월 4일에 라이프찌히에서 죽었다. 멘델스존의 기념실은 구시청 -지금의 시 역사 박물관- 2층에 있는데 이 곳을 작업실로 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유명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게반트하우스에서 1845년 3월에 초연)이 그 당시 완성된 곡 중의 하나이다. 이 기념실에는 당시의 모습대로 피아노와 가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독일 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츠비카우 출생으로 라이프찌히대학 문학부에 적을 두고 소설을 쓰며 서점과 출판업을 한 아버지와 외과의사의 딸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슈만은 이러한 문학적/음악적인 집안분위기안에서 성장, 7세 때부터 거의 자기 스타일로 피아노를 치거나 작은 무곡풍의 곡을 써서 음악적 소양이 풍부함을 나타냈다.
12세 때 《시편 제150번》을 작곡하였으며, 스스로 조직한 아마추어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초연까지 하였으나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슈만의 장래를 걱정한 어머니와 후견인들의 설득으로 라이프찌히대학 법과에 진학(대학생활 후반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 법과로 전학)했다. L. 베토벤이나 F.P. 슈베르트의 작품을 가까이 하던 슈만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법과교수 A.J. 티보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음악론 저서까지 펴낸 사람으로, 음악 실천면에서도 학생과 함께 G. 팔레스트리나의 고전대위법을 연구하는 서클의 지도자였다.
슈만은 티보 교수의 권유로 당시 라이프찌히에서 유명했던 피아노교사 F. 비크의 제자가 되었고 1830년 가을부터는 비크의 집에 묵으면서 명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수업에 힘썼으나, 지나친 피아노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친 그는 피아니스트의 길을 단념하고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날카로운 감성과 정확한 통찰력 갖춘 논평가로 명석한 두뇌와 문학적 재능으로 음악평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슈만은 천재적 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듣던 비크의 딸 클라라와 사랑에 빠져 수년 간의 어려움 끝에 1840년 9월 12일 겨우 결혼을 했는데 아내 클라라와의 정열적인 연애는 음악사상 유명하다.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는 라이프찌히에서 출생한 작곡가, 지휘자, 시인(그의 오페라 대본은 모두 자작), 오페라개혁자, 문화철학자, 음악제 주최자로 19세기 독일의 낭만적 오페라를 지양하고 종합예술 작품인 이른바 악극을 창시한 거장이다. 라이프찌히에서 볼만한 것은 바하가 활약하던 토마스교회, 바하의 업적을 기리는 바하박물관, 라이프찌히에서 가장 크며 이국적인 니콜라이교회, 오케스트라의 본거지 신게반트하우스 등과 공예박물관과 악기박물관을 함께 갖춘 라이프찌히 박물관등이 있다.
바그너는 4세 때 무대에 서고, 8세 때 음악에 대해 천재적 재주를 나타내었으며 13세 되는 해에는 비극 《로이바르트》를 쓰기 시작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우선 문학과 연극에 열중하였다. C. 베버의 오페라 《마탄(魔彈)의 사수》를 좋아했던 바그너는, L. 베토벤의 작품을 듣고 음악가가 될 것을 결심하였고, 18세에 라이프찌히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C.T. 바인리히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뷔르츠부르그와 파리, 드레스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1849년에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바그너의 일생 70년의 중간점에 해당하는 1849년은 창작에서나 생애에 있어서 일대 전환의 해이며 바그너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해이다. 전기 오페라에서 후기의 악극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1849년(36세)에서 1864년까지는, 주로 스위스가 생활의 터전이 되었으므로 망명시절이라고 한다. 1864년에, 18세의 젊은 바이에른국왕 루트비히 2세로부터 따뜻한 초빙을 받은 바그너는 열광적인 신봉자였던 루트비히의 거액의 원조와 후원를 받으며, 뮌헨과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셴의 좋은 환경 속에서 자기의 이상을 하나하나 실현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보헤미아 출생으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주하였다. 프라하에서 음악공부를 한 말러는 1875년 빈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와 화성학을 공부하였다.
20세 때 최초의 대작인 독창·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한탄의 노래》를 완성, 1880년부터는 지휘자로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류블랴나·올로모우츠 등의 지방 오페라극장과 카셀, 프라하, 라이프찌히, 부다페스트 등의 오페라극장에서도 활동하여, 바그너와 모짜르트를 레퍼토리로 삼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1891년 함부르크 시립오페라극장의 수석지휘자에 취임, 1897년에는 빈 궁정오페라극장 빈 필하모니의 수석지휘자가 되어, 바그너와 모짜르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참신한 연출과 무대장치로 오페라상연을 하여 대지휘자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07년 반유대주의세력에 협공당하자 빈을 떠나 뉴욕으로 출발, 그곳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과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로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5회에 걸쳐 두 대륙을 오갔던 말러는 과로로 인해 1911년 2월 21일 뉴욕필하모니의 콘서트 후에 쓰러져, 연쇄상구균성 인후폐렴을 치료할 겸 요양을 위하여 파리를 경유, 빈으로 되돌아갔으나 결국 그곳에서 그해 5월 18일 51세로 죽었다.
말러는 20세기 작곡기법의 선구자로서, 빈고전파(古典派)의 전통에 의거함과 동시에 그 전통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평가하여 참신한 음악적 세계를 개척, A. 쇤베르크 등의 신(新)빈악파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뮌헨에서 창작과 피아노 등의 연주활동을 하던 막스 레거(Max Reger, 1873-1916)는 1907년 라이프찌히대학의 작곡교수 및 음악감독에 취임하였다. 작곡가로서 국내는 물론 여러 차례에 걸친 연주여행을 통하여 해외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1911년 마이닝겐의 궁정악장에 취임, 1915년 예나로 옮겼으나, 이듬해 여행중 라이프찌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30년 남짓한 창작생활 가운데서 나온 수많은 작품은 오페라 이외의 모든 장르에 미치고 있으며, 특히 절대음악적인 경향이 강하다. J.S. 바하, L. 베토벤, J. 브람스의 흐름을 이어받은 그의 음악은 뛰어난 대위법(對位法)의 기술과 반음계적 영향이 강한 화성(和聲)을 바로크 혹은 고전파적인 엄격한 구성원리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바하의 4음을 모티프로 한 《바하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푸가(1900)》를 비롯한 오르간곡은 바하 이후의 독일 오르간음악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라이프찌히는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활동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517년 마틴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 놓은지 2년만인 1519년 7월 4일부터 7월 14일까지 라이프찌히의 플라이스부르그성(Pleissburg/현 신시청자리에 1895년까지 있었음)에서 마틴루터와 루터파의 입장을 따르는 칼슈타트(Kalstadt)라고 불리는 안드레아스 보덴슈테인(Andreas Bodenstein)과 로마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하러 나온 박사이자 교수인 요한 에크(Johann Eck) 사이에 그 유명한 '라이프찌히논쟁'이 벌어졌다.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에 대하여 에크는 "오벨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또다시 루터는 "아리테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렇게 시작되었던 대결이 결국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에크는 처음부터 루터에 반대하여 이미 100여년 전 이단으로 처형당한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와 루터를 연관지으며 공격했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에크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 것을 기회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마틴루터는 라이프찌히에서 세번 설교를 했는데 1539년 5월 24일에 슐로스교회(Schlosskapelle)에서, 다음날인 5월 25일에는 토마스교회(Thomaskirche)에서 설교하고 1544년 8월 12일 바울교회(Paulinerkirche)에서 설교하였다. 마틴루터는 라이프찌히에 머물때 대체로 인쇄업자인 롯터(Lotter)의 집에 머물렀는데 지금의 Hainstr.16/18번지이다.
라이프찌히는 종교개혁 기념비를 1883년에 세웠으나 그 동안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도시내 세 군데 거리의 이름을 Lutherstrasse., Martin-Luther-Ring, Martinstrasse로 명명해 마틴루터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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