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제일 낮은 지구의 표면이라는 사해(死海)를 따라 이스라엘 남북을 잇는 고속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유명한 ‘쿰란’을 지나 사해 해변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50㎞쯤 내려오면 오른쪽 방향에 기이하게 생긴 거대한 언덕이 시야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보면 450m 높이의 언덕이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위압적으로 높이 솟아 있다. 언덕의 경사가 무척 가파르고 더욱이 언덕 중턱부터 정상까지는 깎아지른 절벽과도 같아 감히 정상으로 올라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곳이다. 바로 이 곳이 유대인들에게 비극적인 역사적 현장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마사다’이다.
오늘날은 이곳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너무도 수월하게 마사다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마사다 정상이 엄청나게 넓다는데 우선 놀라게 된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정상은 남북의 길이가 600m나 되고 동서의 폭은 250m다. 대충 계산해도 2만평이 훨씬 넘는 넓이다. 그런데 이 넓은 땅이 잘 닦아놓은 운동장처럼 평평하다. 마치 거대한 톱으로 언덕의 중간 부분을 잘라낸 것처럼 보인다.
마사다는 아래에서 정상으로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천혜적인 요새가 될 수 있다. 이 점을 간파한 인물이 폭군 헤롯 왕이었다. 그는 유사시에 피신할 곳으로 마사다를 택했다. 그래서 마사다 정상에 요새궁전을 건축했다. 우선 마사다 정상을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정상의 북쪽 끝 절벽 부분에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3층 구조의 궁전을 건축했다. 폭군의 광기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물을 얻기 어려운 그곳에 로마식 목욕탕까지 만들었고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막사도 준비했다. 헤롯 왕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마사다를 요새화했으나 한번도 그 곳을 사용한 일은 없었다.
헤롯 왕이 죽은 지 약 70년이 지난 뒤 마사다는 수난으로 점철된 유대인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처절한 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서기 66년 로마제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제1차 유대인 반란’은 결국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성전산 위에 세워졌던 ‘두번째 성전’도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유대인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을 지도자로 하여 약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사다 요새에 진을 치고 저항을 계속한 것이다.
로마제국은 유대인 반란의 마지막 거점을 소탕하기 위해서 실바(Silva) 장군이 이끄는 제10군단을 마사다로 보냈다.
그러나 명장 실바 장군도,무적의 로마군단도 마사다의 특이한 지형 때문에 그곳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실바 장군은 묘안을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마사다 정상까지 흙으로 경사로(ramp)를 쌓는 것이었다. 마사다의 서쪽 방향은 다른 쪽보다 천연적으로 지형이 훨씬 높아 정상까지의 높이는 100m 남짓했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해서 실바 장군은 마사다 서쪽에 200m 길이의 경사로를 쌓았다. 서기 73년 5월 로마군은 완성된 토담 경사로를 타고 마사다 정상에 도달,성문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람이 로마군 쪽으로 불어와 불길 때문에 공격을 계속할 수 없었다. 로마군은 할 수 없이 일단 퇴각했다. 다음날 새벽 마사다 공격을 재개했을 때 놀랍게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성벽을 무너뜨리고 요새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3년간 끈질기게 저항하던 유대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인 전쟁기’에서 마사다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로마군대가 마사다 성벽을 부수기 시작한 날 밤 지도자 엘리아살은 960명의 동지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연설을 했다. ‘비굴한 항복이냐,로마인들의 칼에 죽음이냐’ 엘리아살은 제3의 선택을 제시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데 모아 불살랐다. 먼저 남자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끊었다. 남자들만 남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택했고 이들은 나머지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 남자들은 이미 죽은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열 사람만 남게 되자 그들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마지막 사람은 다른 9명을 죽이고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
너무도 비통하고 비장한 마사다의 최후를 역사가 요세푸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역사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로마군대가 마사다를 함락했을 때 동굴 속에 숨어 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를 발견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이들은 마사다 최후의 증인들이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다.” 마사다에서 죽음의 길을 택한 이들은 지금도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그리고 가슴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죽음으로밖에는 항거할 길이 없었던 그들의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결의를 다짐하게 해준다. 오늘도 마사다에는 유대인들이 외치는 함성이 사방에 메아리 친다. “마사다 로 오드파암!” (마사다의 비극이 다시는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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