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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신선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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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에 ㄱ허면 「각」허구 「나」자에 ㄴ허면 「난」허구하면서 다리도 못 뻗고 들어앉은 아이들은, 고개를 반짝 들고 칠판을 쳐다보면서, 제비 주둥이 같은 입을 일제히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 그러면 웃 반에서는 「농민독본」을 펴놓고‘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 먼 자 눈을 떠라. 부지런히 일을 하야 살길을 닦아 보세’하며 목청이 찢어져라고 선생의 입내를 낸다. 그 소리를 가까이 들으면 귀가 따갑도록 시끄럽지만, 멀리 축동 밖에서 들을 때, 아아, 너이들이 인제야 눈을 떠가는구나!하며 영신은 어깨춤이 저절로 났다. (심훈의 ‘상록수’의 한 대목)
일제 강점기 시대, 모두가 암울했던 그때, 강습소에서는 농촌 아이들을 향한 영신의 가르침이 한창이다. 밤낮으로 강습소를 돌며 농민들의 가르침에 열을 쏟았던 여주인공 ‘채영신’을 담아낸 소설 ‘상록수’의 이야기다. 최근 이 소설 속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구국 운동에 헌신한 역사적 인물일 뿐 아니라 신앙심 깊은 감리교인으로 많은 귀감이 된 그녀의 발자취를 좇아 안산시 상록구에 위치한 상록수공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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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공원에 자리한 '최용신 기념관'전경. 그 옆의 상록수 한그루가 최용신 선생의 정신을 이어가듯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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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강습소, 2007년 새롭게 태어나다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에서 내려 도보로 3분 거리에 위치한 상록수공원. 이 공원 안에는 70여 년 전 최용신 선생이 강습소를 운영했던 샘골교회(담임 기수철 목사)와 올해 6월 완공식을 마치고 개관한 ‘최용신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12일 찾아간 ‘최용신 기념관’은 푸른빛의 기와가 옅은 황토색 기둥이 멋스럽게 조화를 이룬 채 최 선생의 신앙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별도로 구성된 4개의 전시관은 각각 테마별로 선생의 얼과 업적을 그려내고 있다. 최 선생이 ‘샘골강습소’를 운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던 모습을 디오라마(배경을 그린 막 앞에 소도구나 인형 따위를 배치, 조명으로 입체적 실물감이 나게 하는 장치)로 표현해 놓은 전시 1공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곳은 마치 축소된 강습소의 모습을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공간과 4공간은 각각 선생이 사용하던 기념품 등 생전 ‘흔적’이 전시되어 있다. 공간 한 켠에는 수업 당시 쓰던 교재와 성경책이 정리되어 있고, 발길을 돌리면 선생의 얼을 계승한 작품 ‘상록수‘와 ‘최용신 소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최 선생이 가르쳤던 제자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3공간은 색다른 볼거리 영상을 소개한다. 특히 생존 제자이자 기념관 건립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한 홍석필 선생이 등장해 최용신 선생의 살아 생전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또, 짧은 분량으로 편집된 1961년 작품, 영화 ‘상록수’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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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 전 최용신 선생이 강습소를 운영했던 샘골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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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신 선생의 말씀을 새긴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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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사람 최용신, 새벽묵상으로 하루를 열다
루씨 여자보통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학업과 신앙생활을 이어온 최용신 선생(1909-1935년). 당시 ‘인텔리’였던 그녀는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농민들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을 펼쳐나가기로 다짐한다. 졸업을 1년 앞둔 어느날 최용신 선생은 천곡리라는 촌마을로 내려와 강습소를 설립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야학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기념관’의 한 관계자는 “늘 새벽 묵상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곤 했다”면서 최용신 선생의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에게 출애굽기를 읽어주시며 모세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해요. 이 성경 말씀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빼앗긴 나라에 대한 자각과 희망을 심어주시려 했던 거죠.”
늘 신앙으로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구국교육운동에 힘썼다는 최용신 선생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대목이다. 사명감이 너무 뜨거웠던 것일까. 그녀의 몸은 고된 일정을 버티지 못하고 고베 유학시절 크게 악화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장중적증(창자가 꼬여 창자의 길을 막아버림)을 앓다 26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수많은 ‘손길’이 마침내 기념관으로 열매 맺다
최용신 선생의 삶은 죽음이란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이후,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뜻이 하나 둘 모아졌다.
먼저 심훈의 ‘상록수’와 유달영의 ‘최용신 소전’이 발간돼 최용신 선생의 사명을 이어갔다. 또 루씨동문과 샘골교회에 의해 기념비가 세웠다. 특히 예전 강습소 자리에 위치한 샘골교회(구 천곡감리교회)는 해마다 ‘상록수 성가제’와 ‘최용신 선생 추모예배’를 드리며 헌금을 모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유독 농촌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교육에 열정적이었던 최용신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기념사업인 것이다.
샘골교회 기수철 목사는 이번 기념관 설립을 두고 “매우 뜻있는 일이 이루어져 참 감사하다”며 반가움을 전했다. 교회가 미처 하지 못한 기념사업이 안산시의 후원과 지역유지들의 관심으로 결실을 맺은 데 깊은 감사를 표했다.
최용신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손길들이 모아져, 그 결실로 세워졌다는 ‘최용신 기념관’. 이 공간을 통해 그녀의 얼과 뜻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해질 일만 남았다. <기념관 문의 031-481-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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