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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한국

강원도 철원군 철원감리교회




 철원제일(구명, 철원읍)교회 역사     (이하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43ch/2NvO)


철원제일교회는 1905년 장로교인 웰번(E.A.Welbon) 선교사에 의해 장로교회로 설립되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외가 선교 구역을 분할할 때 이 교회는 남 감리교회로 분리 이관케 되었으며, 초기에 Rer.C.T.Coller 선교사가 관리하여 강원도 북부지역인 남 감리교회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인 1909년 김철회가 이 교회부지에 사립 배영학교와 교회를 건립하고 주민들에게 신문화교육, 육영사업, 군사훈련, 민족정신 함양에 주력해 왔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 강점이후 보호정치, 통감정치를 거치는 동안 조선 정치의 가장 큰 장애물이 기독교라 공언하고 항일집단이라고 매도하였다. 1914년도 배영학교 자리에 철원감리교회를 재신축하면서 배영학교는 교회시설인 정의학교로 개칭 이관되었고, 또한 영동야간학교도 이 교회에서 운영하였다. 1919년 3.1운동시 서문거리의 전도회와 더불어 시위운동의 저력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교회의 학생, 교사, 전도사들이 시국에 대한 정보 등을 적시에 제공하여 철원읍 만세운동을 추진, 연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 감리교회의 수사와 신도들이었다. 철원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920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해 5월에 철원지방에서는 최초로 붉은 벽돌 건물로 철원읍교회가 낙성되었으며, 7월에 선교사 주재소가 신설되고 의료선교사 앤더슨(E.W. Anderson, 安烈) 부부와 여선교사 어윈(Cordelia Erwin, 魚源)이 상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철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3월 10‧11‧18일에 일어난 철원읍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김상덕과 박연서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했고 임시정부에서 전달된 문서를 반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0년에 23명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해산되고 말았다.  1930년대 들어 철원읍교회는 부흥 일로에 있었다. 철원동구역(장흥교회)에서 사경회를 할 때 서기훈, 문우형 목사 등이 교수했는데 새신자가 36명에 달하였다. 1933년 들어서 철원읍교회에는 새신자가 50명이 늘었고 주일학교는 매주일 300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더욱 신장되고 철원지방에는 지방 중심지에 감리교회를 대표할 이렇다 할 교회가 없어 철원에 예배당 세우는 일이 시급해졌다. 1936년에 드디어 지방회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철원읍교회 예배당 기공식이 있었다. 철원읍교회의 설계는 당시 유명한 설계사인 보리스(W.M. Voris)가 맡았다. 총공사비는 27,200원으로 선교부에서 15,850원을 보조하였고 나머지는 교인들이 헌금하였다. 대지면적은 1,200평, 건평은 198평으로 갤러리가 있는 준 3층 석조건물이었다. 공사기간은 만 1년이 걸려 1937년 9월 30일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철원제일교회의 규모 (사진은 조감도)


철원제일교회의 크기는 가로 24m, 세로 12.2m의 현무암과 화강암을 쌓아 만든 석조건물이었다. 1층은 소예배실(교육관)과 10개의 분반공부방, 2층은 대예배실로 이루어진 웅장한 교회였다. 철원제일교회는 이화여대 캠퍼스를 설계 건축한 보리스에 의해 건립되었다. 1880년 미국에서 태어난 보리스는 대학 졸업 후 해외선교를 위해 1905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는 일본서 영어교사를 거쳐 오미미션을 조직해 일본과 한국에서 왕성한 미션건축 활동을 했다. 보리스가 어떤 경로로 한국내 미션건축에 참여하게 됐는지 명확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단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감신대 석사과정 중인 이정선은 논문 <건축선교사 보리스의 한국내 건축활동>에서 ‘보리스가 주로 방문했던 지역이 서울과 평양, 부산, 개성 등 한국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그의 한국 방문이 미션건축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실제로 보리스는 1905년부터 1964년까지 60년 가까이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한국내 건축사업과 관련 1908년부터 1938년까지 총 17회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보리스의 초기 한국내 건축물은 서울에 건립된 협성여자신학교와 피어슨기념성경학원의 기숙사를 들 수 있다. 협성여자신학교는 1917년 설계돼 1918년 완공됐으며, 이 해에 피어슨기념성경학원의 기숙사도 완공됐다. 이듬해인 1919년 5월과 1920년 1월 한국을 방문한 보리스는 미국감리교 해외선교 1백주년을 기념하는 ‘백주년 기념운동’건축사업 관련해 감리교의 많은 미션건축물을 설계ㆍ건축했다. 감리교 계통의 공주영명학교, 해주남학교, 평양여학교, 송도(개성)학교 등이 이때 건립됐다. 이후 보리스는 1932년부터 1941년에 이르기까지 이화여대 캠퍼스 건립사업에 참여해 본관, 체육관, 음악관 등 총 10여 개의 건물을 설계 및 건축했다. 또한 그는 이 기간 중에 원산중앙교회(1935~37), 철원제일교회(1936~37), 태화사회복지관(1937~1939), 평양요한학교(1939~40) 등을 건립했다. 이 중 이화여대 캠퍼스는 보리스 자신이 각별한 애착을 갖는 작품이었으며, 당시 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손꼽혔던 철원제일교회는 보리스를 대표하는 한국내 건축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철원제일교회 교세 (사진은 당시 주일학교 학생들)


건축당시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기연 목사였고, 교인은 337명, 주일학교 학생은 275명, 직원은 27명이었고, 엡윗청년회가 50명, 여선교회가 66명으로 각각 2개 지회가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5당시 폭격으로 인해 이 신앙의 요람은 잔해만 남게 되었다. 공산 치하에서 철원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반공투쟁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파괴돼 현재 전면 출입구 등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6.25 당시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기도처이던 지하실은 양민학살의 만행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해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장소이다. 한편 이 지역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는 일본 오사카예술대학 박물관에서 철원제일감리교회를 설계한 보리스씨의 설계도면을 찾게 되었고 철원제일교회를 실물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철원 노동당사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철원제일교회는 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원제일교회의 목회자들


교회가 세워질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있던 시기였다. 강원도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강원도에서는 철원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그 중심에 출원제일교회(당시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가 있었고,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고, 이후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또한 강종근 목사는 1939년 철원제일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면서 교인들은 물론 지역주민들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자 일본경찰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았고, 모진 고문으로 1942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1904.9.26-1942.6.3)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1925년 배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윤희성과 결혼하였다. 1933년 4월 중부연회에 허입한 후 첫 목회지로 경성지방의 창동교회에 파송 받아 목회하였고, 1935년에 창동교회가 동부연회로 편입됨에 따라 그의 소속도 동부연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937년에는 철원지방 연천교회를 이듬해인 1938년에는 창도교회를 그리고 1939년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를 담임한 그는 열심히 봉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매 교인은 물론 일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교회 행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방해하며 강종근 목사를 호출하여 방해하곤 하였다. 1940년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구속되어 1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병이 약해지자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아내 윤희성 사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주를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1942년 6월 3일 이었다.

 

철원제일교회 터 입구

 

철원제일교회 터

 

철원제일교회 터                   (출처-  http://cafe.daum.net/kchistory)

 

철원제일교회 터            (출처- http://blog.naver.com/jeongdaiee)

 

철원제일교회 터  (출처-  http://skysunshine.pe.kr)

 

철원제일교회 터 

 

철원제일교회 터에서 기도하는 미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주연회 정희수 감독과 대표들 (2006.5.)

 

미선교부의 지원으로 건축됐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구 철원제일교회(본지 419호 소개) 현장에 미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주연회(정희수 감독)의 대표들이 방문했다. 모두 9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은 서울남연회(김충식 감독)와 자매결연을 맺기 위해 내한했다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이들은 지난 21일 본부 비서실과 철원서지방(방 현 감리사)의 안내로 한국전쟁과 선교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에 대한 전반적 설명을 듣고 기도회를 진행했다. 특히 이 자리에선 3년간의 법정투쟁을 통해 망실된 철원제일교회의 토지를 본부 유지재단에 편입시켰던 이금성 장로(장흥교회)가 전반적 설명을 진행했다. 이 장로는 “초기 미군 폭격이 시작돼 철원지역이 초토화돼도 이곳은 무사했는데, 인민군 병영으로 쓰이는 바람에 파괴되고 말았다”며 교회와 지역의 전반적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또 “미 선교사들에 의해 종교부지로 쓰이다 망실된 재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이를 통해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 신앙의 역사를 회복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북일리노이주연회의 자매결연위원회대표로 이 자리에 참석했던 로버트(Rev. Robert B. Campbell) 목사는 교회를 복원하고자 하는 감리교회의 노력을 전해 듣고, “파괴된 이 곳의 회복은 부활의 상징과 같다”며 “복원을 위해 일정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출처- 기독교타임즈 이준협 기자, 200605) 

 

폭격의 흔적인 외벽을 붙잡고 기도하는 UMC 및 철원제일교회 복원추진 관계자들

  

 2006.3.26 철원제일교회 복원을 준비하기위해 기도하고있다.

 

철원제일교회 복원기공예배 (2008.10.24)


철원제일교회 복원기공예배가 2008.10.24 오후 2시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2번지 철원제일교회 유적지에서 열렸다. 김남철 감독(동부연회)의 사회로 진행된 기공예배에서 신경하 감독회장은 ‘눈물로 다시 세워야 할 교회’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신 감독회장은 “역사적인 꿈은 모든 간절한 기도와 소망 속에서 이루어짐을 감사하며, 이 일을 통해 역사의 회복, 평화의 기원과 초석을 새롭게 놓는 일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철원제일교회 복원건축위원장인 이규학 감독은 복원공사계획을 설명하면서, “철원제일교회의 복원을 통해 북한 선교의 문이 열리고 평화통일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길 바라며, 이 일에 한국 감리교회가 함께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복원시설 규모와 예산확보방법


총규모1322㎡로 예배당 495.8㎡(300석 기준), 역사자료실 및 세미나실 식당 및 부대시설, 목사관을 갖출 예정이다. 총공사비 30억 원을 총회와 각 연회, 문화재 복원에 대한 문화재청, 강원도청, 철원군청 지원 및 기타지원 등으로 재원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철원제일교회 복원의 의의


일제치하의 수난, 공산치하의 고난, 6.25의 아픔을 간직한 철원제일교회를 복원함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철원제일교회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협력의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한 교회이다. 둘째, 독립운동을 통한 애국애족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일제치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강종근 목사의 순교의 피와 신앙전통을 간직한 교회이다. 셋째, 철원제일교회가 강원도 영서지역의 선교중심지였던 것처럼 통일시대에 한국선교와 북한선교의 중심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국내 성지코스의 하나에서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남과 북의 화해의 장으로,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화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8.10.24. 복원기공식




“선교의 땅 철원을 아시나요?”

분단의 아픔과 감리교선교의 역사 간직한 철원

 

   
▲ 철원제일교회 옛 터. 교회의 벽과 바닥 일부만 폐허로 남아 있다. ⓒ김준섭 기자

강원도 철원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건 철책선, 땅굴 등 분단의 아픈 흔적이다. 맞는 이야기다. 철원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러일전쟁과 청일전쟁 때도 말이다. 또한 일제가 철원벌판을 통해 세계대전을 치르는 물자를 수송하는 한편, 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는 지금 사는 곳보다 훨씬 남쪽에 38도선을 그어 북한의 통치가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6.25 이후에는 남한 땅에 편입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분단의 비극이 현존하는 최전방 철원. 하지만 이런 철원이 과거 원산지방에서 일어났던 회개 운동의 영향을 받아 큰 부흥이 일어났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다.
부흥의 증거로 철원제일교회가 생겨났고, 그곳에서 장흥교회로, 또 그곳에서 대한수도원으로 부흥의 불꽃이 번져갔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많은 유산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경터교회(현 지경장로교회)

   
▲ 지경장로교회 모습. 하디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철원지역 최초의 감리교회이다. 현재는 감리교회가 아닌 장로교회가 자리잡고 있다.ⓒ김준섭 기자
현 지경장로교회가 있는 지경터교회는 원산으로 파송받은 남감리회의 하디선교사가 1901년 처음으로 철원지역에 세운 감리교회이다. 기록에 따르면 1903년 지경터지방회가 조직돼 산하에 철원구역, 금화구역, 회양구역, 안변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1908년 춘천지방과 원산동지방, 원산서지방이 생겨 감리회가 부흥했던 곳이다. 또한 1912년에는 지경터지방회가 강원서지방으로 바뀌어 철원지역이 춘천과 함께 강원도의 선교 거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지경터교회는 없어지고 지경장로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1956년 아무 것도 남겨져 있지 않은 이곳에 군 선교차원에서 군목 파송제로 인해 장로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경터교회는 현 지경장로교회 50미터 인근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화읍교회(현 김화교회)

   
▲ 현재 김화교회 모습.ⓒ김준섭 기자
김화읍은 철원읍과 함께 철원지방의 중심지였다. 김화교회는 지경터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하디에 의해서 설립됐다고 한다. 지경터지방 김화교회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한국인 목회자를 파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7년 미국에서 피터스 목사가 파송되면서부터 250여명의 교인이 모일 정도로 부흥의 시기를 맞기도 했던 곳이다.
현 김화교회가 있는 부근이 당시 김화읍교회의 전신인 ‘새술막교회’가 있었던 곳이다.

 

 

철원읍교회(구 철원제일교회)

   
▲ 철원제일교회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있는 옛 노동당사 건물.ⓒ김준섭 기자
철원지역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교회가 철원읍에 위치한 철원제일교회이다. 하지만 6.25 전쟁 당시 북한 병력이 숨어 있다고 해서 미 연합군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지금은 교회의 벽과 바닥 일부만 폐허로 남아 있다.
철원읍교회는 처음에는 장로교회로 설립됐다. 1905년 지경터에서 선교하던 장로교 웰번선교사가 처음 교회를 설립했으며, 1907년 선교 지역을 나눌 때 감리교회가 되었다. 이후 강원도 북부의 선교와 교육·사회 봉사의 중심지가 됐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철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3월 10, 11, 18일에 일어난 철원읍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그 해 8월에는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항일 단체인 ‘철원 애국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했고, 임시정부에서 전달된 문서를 반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0년 23명이 체포됨에 따라 해산됐다고 한다.
1930년대 들어 철원읍교회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933년에 새신자가 50여명이 늘어났고, 주일학교는 매주일 300여명이 모였다.
성도가 늘어남에 따라 철원읍교회는 1936년 예배당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인 1937년 9월 30일에 봉헌식을 가졌다.
당시 설계는 유명한 설계사인 보리스(W.M.Voris)가 맡았고, 총 공사비는 27,200원으로 선교부에서 15,850원을 보조했으며, 나머지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역사를 간직한 철원제일교회를 잃을 뻔 했던 적도 있다. 6.25 전쟁 후 교회의 소유가 전의 마을 유지였던 고 모씨와 국가에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감리교회 유지재단으로 등록된 구 등기부 등본이 있어, 교회관계자들은 읍장을 찾아가 등본을 보여줬고 고 씨의 소유로 되어 있던 재산은 곧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유지로 귀속 되어 있는 땅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국유지의 경우 구 등기 등본과 더불어 인위 보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인위 보증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 관계자들은 교회터를 찾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사람들을 설득 해 결국 3년이라는 수고 끝에 교회터를 유지재단으로 등기할 수 있었다.
당시 교회터를 찾기 위해 수고했던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는 “교회의 망실된 재산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다만 아직도 찾지 못한 많은 재산들이 있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장로에 의하면 철원제이교회(철원제일교회에서 개척한 것으로 추정)의 경우 이미 개인 소유지로 넘어가 논으로 개간된 상태라고 한다. 철원제이교회 터는 10여년 정도만 해도 그곳이 교회 터였다는 사실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소유주가 논으로 개간해 지금은 그곳이 어딘지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고 이 장로는 안타까워 했다. 또한 이 장로는 “철원제이교회 뿐만 아니라 월정역 근처에 있는 월정교회터도 찾아야 한다”며 “월정교회터는 구 등기가 있어서 교회터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고 말했다. 이 장로는 “개인의 힘만으로 교회터를 찾기엔 부족해 7-8년전 관련서류를 감리교본부에 넘겨 교단차원의 해결을 요청했다”며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교단차원의 움직임은 없다”고 설명했다. 철원제이교회터와 월정교회터는 잃어버린 감리회의 재산을 찾는 것 뿐 아니라 우리 감리회의 역사를 찾는 일인만큼 교단차원의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철원제일교회는 지난 2002년 5월 등록문화재 제 23호로 지정됐으며, 지난해 10월 철원제일교회 복원 기공예배가 드려졌다.
철원제일교회 터에서 약 300m 정도 옆에는 북한의 옛 노동당사 건물이 남아있다.
8·15 광복 후 북한이 세운 노동당 철원군 당사는 공산 치하 5년 동안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경기 북부 일대를 관장하며 북한 정부에 항거하는 인사들을 체포해 구금·학살을 감행한 곳이었다. 그 중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와 고난을 당한 기독교인도 있었다고 한다.

 

 

장흥교회

   
▲ 장흥교회 모습. 현재 철원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던 세 교회 중 유일하게 장흥교회만이 남아 있다.ⓒ김준섭 기자
철원제일교회가 모태인 장흥교회는 일제시대 항일운동과 6.25 전쟁 때 꿋꿋하게 마을과 신앙을 지킨 교회이다. 교회 뒷동산으로 올라가면 6.25전쟁 때 순교한 분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서 있다. 당시 탑을 건축한 이들은 전쟁 당시 이 마을에서 공산당원 활동에 앞장섰던 이들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은 사죄하는 뜻에서 탑을 세웠긴 하지만, 공산당의 일에 앞장섰던 자신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이름도 새겨 넣은 것을 제막식에서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 이름이 새겨진 부분만 떼어내고 다시 그 탑의 비문 명단을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 장흥교회 담임인 한찬희 목사는 “장흥교회는 철원제일교회, 지경터교회와 더불어 철원지역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교회”라고 설명하며 “규모는 작았지만 일제치하와 6.25 전쟁 당시 공산치하에서도 저항정신이 대단했던 교회였다”고 말했다. 또 한 목사는 “장흥교회는 철원제일교회로부터 시작을 했지만, 6.25 전쟁 이후에는 장흥교회를 통해 철원지역에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현재 철원지역의 선교를 담당했던 교회 중 유일하게 장흥교회만이 남았다”고 교회의 선교적·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장흥교회는 1920년 철원제일교회 한성옥 목사가 공봉기 자택에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됐다. 이후 신석구, 서기후, 명관조, 박경룡 목사 등 감리교회 큰 목회자들이 시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장흥교회를 소개하면서 서기훈 목사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서기훈 목사는 1925년 목사 안수를 받고, 주로 동부연회 원산 지방과 철원 비장에서 목회자로 사역했다. 서 목사는 장흥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을 맞이하게 됐다. 당시 장흥교회 청년들이 퇴각하는 인민군을 사살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임으로 1950년 12월 31일 인민국 대열 정치 보위에 수감됐다가, 이듬해인 1월 8일 인민군의 총에 의해 향년 70세로 순교했다.

 

 

대한수도원

   
▲ 대한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소성전 모습. 현재는 초교파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김준섭 기자
대한수도원(원장 박명희 전도사)은 남한의 최북단인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한탄강변 순담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대한수도원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10월 당시 장흥교회 박경룡 목사를 주축으로 한 항일 비밀기도모임이 모태가 돼 ‘조선기도원’이란 이름으로 설립됐으며, 6.25 전쟁으로 한때 행정구역이 북한에 편입돼 존폐 위기를 겪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