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고 역사의 방향도 새롭게 전개될 수 있다.
1520년은 마르틴 루터에게는 위기의 시간이었다. 로마 교황은 그에게 교서를 보내서 60일 이내에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명령했다. 교황청으로서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부이며 수도사였던 루터에게 베푸는 마지막 ‘관용의 기회’였다. 이를 거부할 경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문뿐이었다. 파문은 그를 이단자로 낙인 찍어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중세 가톨릭 교회는 이단자에게는 화형의 형벌도 불사했다.
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루터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운명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의외로 담담했고 담대했다. 그는 진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했고 ‘강한 성(城)’이요 ‘방패와 병기’가 되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실 것을 굳게 믿었다. 루터는 그 위기의 시간을 자신의 신학을 정리하고 재점검하는 기회로 삼았다.
펜을 잡은 그의 손은 밤낮없이 분주히 움직였고 진주와도 같이 빛나는 글들이 속속 집필되었다. 그해 8월에는 ‘독일국가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장’,9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11월에는 ‘크리스천의 자유’가 쓰여졌고 그의 친필원고는 곧장 인쇄소로 옮겨져 출판되었다.
이 3편의 논문은 위기 속에서 피어난 루터 신학의 꽃이었다. 첫번째 논문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12월14일자).
두번째 논문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살펴보자. 논문의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참된 교회’도 당시 가톨릭 교회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과 당시 교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서 종교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일곱 가지 성례전(聖禮典) 가운데 오직 두 가지만이 진정한 성례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세례’와 ‘성만찬’이다. 이 두 가지만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다른 것은 성례전으로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임종 때 성유(聖油)를 발라주는 ‘종부성사’,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결혼예식이 되는 ‘혼배성사’들은 성례전(sacrament)이 될 수 없다고 제거한 것이다. 루터의 주장이 당시 가톨릭 교회에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행해져 내려온 종교의식과 제도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터 신학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은 세번째 논문인 ‘크리스천의 자유’이다. 루터 자신도 이 글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수많은 명구(名句)들을 쏟아냈다. “크리스천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인이다. 동시에 크리스천은 누구에게나 예속되는 완전한 종이다.”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짧은 명구에서 루터는 크리스천 삶의 두 가지 차원을 잘 요약하고 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진리 안에서 세상의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그러나 봉사와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에서 크리스천들의 삶의 전형을 찾았다. 루터가 당시 중세교회의 교황을 공격한 것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교황이 섬기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의 왕들도 그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하는 높고 높은 존재로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루터는 이 논문에서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선행의 공적이 쌓여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요 은총이며 인간이 공적을 쌓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또한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존재이며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크리스천들은 선행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3편의 논문은 당시 가톨릭 교회를 향한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 결별 선언이었다. 그는 그 선언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해 12월 비텐베르크 대학 문앞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그에게 보낸 ‘교황교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라버렸다.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반응은 단호했고 신속했다. 루터가 교황교서를 불태운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1521년 1월3일 교황청이 보낸 파문장이 루터에게 날아들었다. 사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으로 접어든 것이다.
박준서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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