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도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 중 가장 큰 규모의 유적이 있는 오늘날 터키의 에페수스이다. 에게해안에서 5㎞쯤 들어간 카이스터 강구에 있는 이곳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자동차로는 하루거리이기 때문에 대개 이스탄불에서 이즈미르(성경의 서머나)까지 비행기를 이용하고 이즈미르에서 버스를 이용한다. 이즈미르에서 에베소까지는 남쪽으로 1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갈 수 있다.
에베소는 터키의 유적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커서 하루 일정을 잡아도 충분하지 않다. 고대 에베소 지역 뿐만 아니라 주위의 유적 역시 많이 있는데 그중에 고대 유적이 있는 곳을 방문하려면 높은 곳에 있는 입구에서 아래쪽에 있는 입구로 코스를 잡아야 힘들지 않다.
일반 여행객들에게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독교 초기 바울 사도가 두번째 선교여행시 들린 곳이며(행 18:19) 세번째 선교여행 때에는 성령이 강림해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났으며 그것을 본 마술객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행 19:1∼10).
뿐만 아니라 이곳은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부탁하신 말씀에 따라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를 모시고 와서 말년을 보낸 곳이며 마리아가 죽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사도 요한과 마리아 기념교회,마리아의 집터가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에베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항구이며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로마시대에는 항구에서 아르카디아라는 길을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으나 지금은 항구가 메워져 있다. 유적지는 경사진 산을 따라 형성돼 있었고 입구는 아래쪽과 위쪽 두 곳이 있다. 나는 편한 길을 택해 위쪽에서 입장료를 내고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서자 바로 오른쪽으로 야외음악당이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이어 야외음악당에서부터 돌로 포장된 길을 따라 내려가자 길의 좌우편에 아직도 당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음악당 바로 옆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분수탑 기둥이 2개가 남아 있었다. 이어 아르테미스 여신의 숭배 장소로 알려진 프리타니이온(Prytanion),하드리아누스 황제 신전,두 기둥이 남아 있는 헤라클레스 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 문 왼쪽 테라스에는 4개의 기둥으로 된 헬레니즘 분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니케(Nike) 여신상은 본래 있던 곳보다 조금 더 내려가 길이 약간 굽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니케는 승리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으로 한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면류관을 들고 있다. 오늘날 나이키는 바로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니케상에서부터 약간 굽어진 길을 따라 끝까지 내려가자 2단으로 된 셀수스 도서관이 7층 정도의 웅장한 모습으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에베소의 도서관은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터키의 버가모 도서관과 함께 세계 3대 도서관의 하나로 20만권의 장서를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서관의 규모를 보면 에베소의 학문 수준이 당대 최고의 도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도서관 앞에 길 하나 사이로 매음굴이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 앞길에서 50m쯤 대극장쪽으로 내려가자 대리석 바닥에 발바닥,여자 얼굴,하트 모양,사각형이 새겨져 있는 매음굴 표지판이 새겨져 있었다. 사각형은 외상 장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늘날 신용카드와 같은 것이고 발바닥은 미성년자 출입금지 표시로 새겨진 발바닥보다 발이 작은 자는 출입이 통제되었다.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도시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에베소는 터키의 유적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커서 하루 일정을 잡아도 충분하지 않다. 고대 에베소 지역 뿐만 아니라 주위의 유적 역시 많이 있는데 그중에 고대 유적이 있는 곳을 방문하려면 높은 곳에 있는 입구에서 아래쪽에 있는 입구로 코스를 잡아야 힘들지 않다.
일반 여행객들에게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독교 초기 바울 사도가 두번째 선교여행시 들린 곳이며(행 18:19) 세번째 선교여행 때에는 성령이 강림해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났으며 그것을 본 마술객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행 19:1∼10).
뿐만 아니라 이곳은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부탁하신 말씀에 따라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를 모시고 와서 말년을 보낸 곳이며 마리아가 죽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사도 요한과 마리아 기념교회,마리아의 집터가 남아 있다.
에베소 마리아기념교회
그리고 이 문 왼쪽 테라스에는 4개의 기둥으로 된 헬레니즘 분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니케(Nike) 여신상은 본래 있던 곳보다 조금 더 내려가 길이 약간 굽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니케는 승리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으로 한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면류관을 들고 있다. 오늘날 나이키는 바로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니케상에서부터 약간 굽어진 길을 따라 끝까지 내려가자 2단으로 된 셀수스 도서관이 7층 정도의 웅장한 모습으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에베소의 도서관은 당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터키의 버가모 도서관과 함께 세계 3대 도서관의 하나로 20만권의 장서를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서관의 규모를 보면 에베소의 학문 수준이 당대 최고의 도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도서관 앞에 길 하나 사이로 매음굴이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 앞길에서 50m쯤 대극장쪽으로 내려가자 대리석 바닥에 발바닥,여자 얼굴,하트 모양,사각형이 새겨져 있는 매음굴 표지판이 새겨져 있었다. 사각형은 외상 장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늘날 신용카드와 같은 것이고 발바닥은 미성년자 출입금지 표시로 새겨진 발바닥보다 발이 작은 자는 출입이 통제되었다.
에베소 창녀촌 방향표시와 사이즈
에베소에는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을 비롯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터와 기념교회,고대 시장터인 아고라,분수탑 등 수많은 유적이 있다. 그런 에베소에 다시 그 옛날 바울에 의해 일어났던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바울이 에베소로 들어올 때 이용한 아르카디아 길을 따라 에베소를 떠났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감미로운 한 순례자의 ‘주기도문’찬양이 BC 2세기에 건축된 에베소 원형극장에 울려퍼졌다. 산의 경사를 이용해 30m 높이의 돌계단을 설치한 객석 끝으로 뛰어올라 갔다.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극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차례의 대규모 지진 속에서도 에베소 원형극장은 95%가 보전돼 있었다.
원형극장에는 복음 전파에 온힘을 쏟았던 사도 바울의 심장 소리와 기독인들을 박해했던 바리새인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이 도시에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우상숭배가 얼마나 팽배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에베소 아르테미스 신전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정집과 지하기도실 등에 숨어서 예배를 드렸다. 에베소 교회 지하에서 발견된 2000여개의 등잔을 통해 초대교회 교인들의 예배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교회는 사도 바울 당시에 세워진 게 아니다. 기독교가 공인되자 바울과 함께 일곱교회를 개척하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4세기께 세워진 성요한교회이다. 성요한교회는 소아시아 7개 교회 중에서 가장 넓은 안뜰과 현관, 본당, 예배당, 세례장 등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 세워진 셀수스 도서관의 외관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1만5000권의 도서가 소장돼 있던 이곳에 서니 당시 지식인들이 토론을 벌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AD 49∼52년) 때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 부부와 이곳에서 3개월 동안 동역하며 유대 교회당, 두란노서원에서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이같이 두 해 동안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8∼10)
3차(53∼57년) 선교여행 때 바울은 비로소 에베소의 유대인 공동체를 기반으로 에베소 교회를 설립했다.
영적으로 성장한 교인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70여명이 순교했다. 그러나 배교자도 많이 발생,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딤후 1:15∼18). 바울은 옥에 갇혀서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생활에 힘쓰도록 권면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이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현대의 기독인들을 향한 울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도들에게 영지주의가 만연되면서 에베소 교회는 분열되고 사랑은 식어버렸다.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는 결국 기능을 상실, 계시록의 예언대로 교회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시록 2:1∼7)
분열된 한국 교회 역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촛대를 어디로 옮기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스탄불=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강용수의 터키시간여행] 에페스
2천년이 무색한 신비한 차원의 땅
에페스(Efes). 한국에서 흔히 알려진 이름은 에베소. 옛날 이름은 에페수스(Efesus).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자들(개신교)에 의해서 흔히 에베소라고 부른다.
옛날에 가장 큰 도시라 하면 바로 터키 땅의 안타키아(Antakya)를 가리켰다. 2000년 전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를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라 했다. 그 다음으로 큰 도시라 하면 바로 에페스가 되지 않을까? 당시의 인구가 약 25만 명 정도라고 하니 정말 적지 않은 수였다.
에페스는 당시의 아시아라고 불리던 지역으로 지금의 소아시아의 수도였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수년간 기독교를 전파했던 곳, 사도 요한이 살다가 죽은 곳, 그리고 성모 마리아가 살던 곳이다. 바로 기독교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가 바로 에페스이다.
또,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의 하나인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이 있던 곳으로 아르테미스 여신과 신흥 종교 기독교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장소이기도 했다.
흥미 있는 것은 에페스는 대대로 여신을 섬겼다는 것이다. 아르테미스 여신 이전에는 흔히 대모신이라 불렸던 키벨레(Cybele) 여신을 섬겼고, 키벨레의 조금 발전된 양상인 아르테미스가 그 뒤를 이었고, 유일신 사상에 의해 토속 신앙이 패배하고 나서는 성모 마리아가 신으로서는 아니지만 여성 우월주의를 이끌어갔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에페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 아마존 여인족(아마존 여인족은 아마존 강에 살지 않고, 흑해에 살았음)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전 세계에 있는 고대 도시 중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으면서, 규모가 제일 큰 것은 당연히 에페스일 것이다. 그 이유는 에페스가 당시의 4대 도시 중 하나였으며,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터키인들이 천년 전에 이 땅에 들어 왔을 때 에페스는 이미 버려진 도시였다. 그 이유는 날라 온 토사에 의해 멘데레스(Menderes)강의 항구의 바닥이 메워져 항구는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사람들이 에페스를 떠났기 때문이다.
고대 도시에서의 즐거운 상상
터키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의 대부분이 방문하는 에페스는 그야말로 시간 여행을 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고대 도시를 돌아보는 데만 최소 2시간이 소요된다.
고대 도시를 여행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는 과거로의 여행은 발끝에 느껴지는 대리석의 감촉부터 시작된다.
아주 규모가 큰 목욕탕들, 그 규모로 인해 흔히들 원형극장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실내극장 오데움(Odeum), 로마 트라이안 황제의 분수, 하드리안 황제의 신전, 공공 화장실, 도미티우스 황제의 신전, 세계에서 3번째로 컸던 도서관, 아고라(Agora·시장), 김나지움(Gymnasium·체육관), 스타디움(주로 육상 경기를 위해 사용됨), 24,000명 수용 능력의 원형극장(정확히 반원형 극장), 그리고 종교회의가 열렸던 성모 마리아 교회. 모든 것이 우리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떤 사람은 창녀촌을 광고하는 거리 광고판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목소리가 쩌렁 쩌렁 울려 퍼졌을 원형극장에 앉아서 사도 바울을 상상할 것이고, 터키를 대표하는 건물인 셀수스 도서관의 앞에서는 “아! 바로 이 건물이구나” 하고 감탄사를 연발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두란노 서원’이라고도 부르는 이 건물은 터키 관광 포스터의 간판 스타이다.
그런데 나는 셀수스 도서관을 가르켜서 왜 두란노 서원이라 부르는 지 모르겠다. 왜냐면 이 건물은 AD 110년에 지어졌으니까. 사도 바울이 있을 때는 이 건물이 없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실망시키는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건 사실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옛날의 빌라들이다. 당시의 고급 주택을 볼 수도 있는데(고급 주택을 직접 안에서 보고 싶으면 거금을 투자해야만 한다) 빌라 앞에 있는 인도의 모자이크만 봐도 그 호화로움에 입이 벌어진다.
또 한가지 즐거운(?)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공공 화장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데, 서로 대화를 나누며 볼일 보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유쾌한, 그렇지만 냄새나는 웃음을 짓게 할 것이다.
도미티우스 신전 앞에 놓여 있는 니케 (Nike·승리의 여신) 조각상의, 하도 사람들이 만져서 뭉그러진 젖가슴을 봐도 역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참 나이키는 신발 메이커의 이름이기 이전에 승리의 여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또 원형극장에 항구로 뻗어 있는 길을 아카디아나(Acadiana)라고 부르는 데 여기서 아케이드라는 말이 나왔다고도 한다. 확인 안된 사실이지만…. 이밖에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들은 아주 많다.
고대로의 시간여행…그 여운
고대로의 시간 여행을 즐기고 에페스를 나온 후에 크리스찬들은 사도 요한의 무덤 교회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잊지 않겠지만, 그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에페스의 박물관을 잊지 말고 방문하길 바란다. 고대로의 시간 여행을 하면서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면 바로 역사 속에 등장했던 인물의 얼굴들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일거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많은 조각상은 상상속의 인물을 대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남성의 성기가 유난히 크게 강조된 프리아포스(Priapos)일 것이다. 최근에 열린 검투 장면을 재현한 전시실도 볼만하다.
에페스 옆에 있는 도시 셀축의 유명한 음식은 ‘촙시시’이다. 잘게 썬 고기를 대나무 고챙이에 끼워서 불에 구운 요리인데 하나하나 빼먹는게 아주 재미있다.
흔히들 에페소가 폼베이와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듣는 에페소는 섭섭해 한단다. 에페소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드넓은 영토 중에서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였다. 규모도 상당히 커서 인구만 해도 25만명이었으며, 사도 바울이 2년 반이나 전도여행을 했을 만큼 산업과 종교의 요충지였다. 시리아 왕조의 수도였던 안디옥(안타키아, 인구 50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동부 지중해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운동장만한 유적지를 상상했다면 그야말로 에페소가 섭섭해 할 얘기다.
날은 뜨겁지만 돌무더기, 기둥 하나씩을 차지한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여념이 없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가.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아테네(기원전 1000년경)의 식민도시를 시작으로, 리디아, 페르시아, 베르가몬 왕국의 지배를 거쳐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기까지(기원전 133년), 돌마다 술술 얘기보따리가 풀린다.
근 1000여년에 걸친 건축 양식의 변화와 그리스보다 더 그리스적인 유적들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부족한 건 식견이요, 줄어드는 건 기억력이다. 복원이 진행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데도 도시의 흔적은 넓기만 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공중목욕탕만 해도 3개. 온수를 이용한 대리석 한증막과 냉탕, 온탕, 대기실, 오락실까지 갖춰진 이 목욕탕에서 속주의 시민들은 스트레스를 풀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라트린'이라는 공중 화장실은 중국 화장실처럼 칸막이 없이 구멍만 송송 뚫려 있다. 차이가 있다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향료가 섞인 물로 뒤처리를 했다는 것. 로마식 비데였을까?
모자이크로 장식된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상가나 빌라형태의 가옥들, 현대의 터키를 능가하는 2000년 전의 수도관 시설, 독자적인 폴리스의 시정을 관할했던 시청건물, 조각상의 발만 남은 하드리안 황제의 샘터, 기독교를 박해하고 사도 요한을 유배 보냈던 도미티안(도미티우스) 황제의 신전터, 트라이안 황제의 양자였던 하드리안 황제의 신전터, 승리의 여신 '나이키'와 '멤미우스'의 조각상, 행운의 여신 티케의 동상, 뱀(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의 상징)이 새겨진 석상이 있는 병원터, 아고라(시장터), 2차 에페소 종교회의가 열렸던 마리아의 교회.
바다가 육지로 바뀔 정도의 세월이 흘렀으니 사람이 떠난 도시가 온전하게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에페소의 명물이면서도 현장에서 볼 수 없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동상들은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고, 에페소 박물관은 일부만을 허술하게 보관하고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계 고대 7대 불가사(그냥 7대 불가사의와는 다르다)중 하나로 꼽히지만 현장에는 달랑 기둥하나만 남아있고 아르테미스 여신(풍요의 여신)상은 에페소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민망하게 많이 달린 그녀의 젖가슴. 혹시나 삶이 풍요로워질까 싶어 작은 모조품을 하나 장만했다.
당시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버가몬 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컸던 셀수스 도서관은, 학문의 전당답게 아름답고 웅장하다. 위아래로 서 있는 4쌍의 조각상은 각각 지혜, 지식, 덕망 등을 뜻하지만, 진짜 조각상은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퀴즈 하나. 도서관을 거의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무엇이었을까? 화장실, 매점, 식당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아무도 '창녀촌'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당시에도 '학생은 남자 아니유'하는 삐끼 아줌마들이 있었을까? 에로틱한 조각상들이 많이 발견됐다지만 여기 이곳에는 없다.
유럽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터키의 국보급 유물들을 생각하면, 약소국의 서러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나마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3만명을 수용했던 고대극장의 그 많은 층계(좌석이라고 해야 하나)들이다. 워낙 규모가 큰 까닭에 마치 한폭의 미술작품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지금도 공연장으로 사용돼서 한여름에는 보름에서 한달 정도씩 매일밤 콘서트가 펼쳐진다고 하니, 오늘밤에도 에페소의 페허 위에는 별과 음악이 쏟아지고 있겠다.
고대극장 앞으로 곧게 뻗은 대로는 곧장 항구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에페소는 항구도시였다는 것.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의 에페소는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원래 이 곳을 흐르던 '멘데레스'라는 강은 비가 오면 많은 양의 토사를 물고와 에페소 항구에 뱉아 놓았다. 상전벽해의 세월이 흐르자 항구는 늪이 되어, 무역항의 기능을 잃어버렸고, 사람들은 에페소를 떠났다.
가로수처럼 거리에 늘어선 조각상 중에는 머리부분만 달아난 조각상이 있는데, 늪이 된 항구에 풍토병이 유행하자, 헌신적으로 일했던 알렉산드로스라는 의사의 조각상이다. 누군가 발끝에 붉은 꽃을 꽂았다.
18세기 유럽의 여행자들이 에페소를 방문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흙과 먼지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 지난 150년 동안 외국으로 유출된 유물이 많고, 복원 속도도 매우 더디다. 10여개 유럽의 기업들이 지원을 하고 있지만, 방학에만 시간이 나는 교수들이 주축이 된 발굴단의 작업이라 지금 속도로는 100년으로도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박해의 문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부분을 에베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기던 3-4세기의 로마인 들에게 기독교인들은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의도는 쉽게 짐작이 간다.
사도요한의 교회
4세기경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립 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안 황제 (527-565)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의 교회로 증축하였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다. 1966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공식 성지로 선포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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