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구상에서 3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국제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스라엘이다.전세계 19억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고향인 성지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것은 놀랍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도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더욱 위험한 곳이며 예루살렘에서도 ‘성전산(聖殿山)’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성전산’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곳인가? 성전산이라는 명칭은 예루살렘에서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성전을 세운 데서 연유한다.본래 예루살렘은 해발 750m 지점 유다 산악지역에 위치했던 난공불락의 천연적 요새였다.주전 1000년께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의 제일 높은 지역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聖殿)을 건축했다.이것이 ‘솔로몬 성전’이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그곳은 단순히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며 종교적 성도로서 자리매김되었다.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던 솔로몬 성전은 건축된지 4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란의 와중에 소실되고 말았다.주전 580년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도성 전체가 불에 타는 혼란 가운데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다.이로써 유다왕국은 멸망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포로로 잡혀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굴러 그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결국 몰락했다.귀향의 꿈을 이루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힘을 모아 성전산 위에 새 성전을 다시 세웠다(주전 515년께).이것이 ‘제2성전’이다.이 두번째 성전은 나라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일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제2성전’은 악명 높은 헤롯왕 때 크게 확장되었다.헤롯왕은 폭정으로 멀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2성전을 크게 증축했고 이러한 대역사의 일환으로 성전산 지역에 거대한 축대를 쌓았다.예수님의 발길이 닿았던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헤롯왕이 확장공사를 마친 성전이었다.
서기 60년대말 유대인들은 그들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에 항거해서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로마제국의 군대는 무력으로 유대인 반란을 진압했고 궁지에 몰린 반란군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피해 들어갔다.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군은 끝까지 대항하는 유대인을 소탕하기 위해 성전을 향해 횃불을 던졌고 마침내 성전은 화염에 휩싸여 소멸되고 말았다(서기 70년).이렇게 두번째 성전도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산은 일찍이 ‘솔로몬 성전’과 ‘제2성전’이 서있던 거룩한 곳으로 오늘날에도 전세계 유대인들에게는 심장부와 같은 곳이다.그들에게 예루살렘이 없는 이스라엘 땅은 생각할 수가 없고,성전산이 없는 예루살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늘날 성전산 위에 성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으나 2000년전 헤롯왕 때 쌓았던 성전산 축대 부분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높이 18m,길이 60m에 이르는 이곳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통곡의 벽은 지난 긴 세월동안 나라 없는 유대인들이 눈물로 망국의 한을 달래며 하나님께 기도하던 곳으로 성전산과 함께 유대인들의 성지중 성지이다.
서기 638년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변혁이 일어난 해이다.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신흥종교 이슬람교가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어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이 성지를 정복한 것이다.이때부터 성지 이스라엘 땅의 주인은 서서히 아랍인들로 바뀌게 되었다.아랍인들이 성지의 새로운 주인이 되면서 그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성전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성전산이 이슬람교의 성지로 탐바꿈하게 된 것이다.이슬람교에 따르면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승천하기 전 백마를 타고 밤에 성전산까지 왔다고 한다.그리고 그곳에서 신비한 백마를 타고 승천했다는 것이다.성전산은 마호메트가 승천한 장소로서 이슬람교 최고의 성지가 되었다.아랍인들은 그들의 성지인 성전산 위에 2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건축했다.그중 하나는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마지막 밟았다는 큰 바위를 중심으로 세운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다.중심 돔 부분을 순금으로 씌워 금빛 찬란한 이 사원은 이슬람 건축 예술의 백미로 손꼽힌다.
성전산 위의 두번째 사원은 마호메트가 밤에 백마를 타고 왔다는 지점에 세운 알 아크사 사원 (Al Aqsa Mosque)이다.이 사원은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 이슬람교 사원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사원이다.전세계 이슬람 교도들에게 있어서 이 두 사원이 서있는 성전산은 메카 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가 된다.
이렇게 성전산 지역은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성지이다.바로 이러한 점이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금 전세계인들이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동사태’도 그 발단은 20개월 전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성전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예루살렘의 이른 아침은 깊은 인상을 마음속에 안겨 준다.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눈부신 햇살과 함께 싱그러운 사이프러스나무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다윗왕도 솔로몬왕도 맛보았을 예루살렘의 향취에 가슴은 감격으로 가득 찬다.
지금부터 20개월전,2000년 9월28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예루살렘에 아침이 밝았다.그 날 아침 7시30분 당시 이스라엘 야당 ‘리쿠드’당의 당수 ‘아리엘 샤론’이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전산에 올랐다.그는 그 곳에 약 15분간 머물렀다.이른 아침 잠깐동안 이루어진 그의 성전산 방문이 이스라엘 정치에 태풍을 몰아오고,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래로 최악의 중동사태를 불러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마치 시한폭탄 뇌관에 불을 붙인 듯,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흥분한 그들은 문을 박차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그리고 총을 쏘며 저지하는 이스라엘 경찰과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아랍인들의 대규모 항거운동(인티파다)이 시작된 것이다.이렇게 시작된 ‘인티파다’는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아랍측 쌍방에 약 2000여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고,폭력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동안 사태는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왜 이스라엘 야당 당수의 성전산 방문이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 문제에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에게 성전산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성전산’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던 자리로서,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오늘날도 그 곳 위로는 비행기조차 지나가지 않을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하게 여긴다.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산은 아랍인 이슬람교도들에게도 3대 성지가 된다.이슬람교도들은 마호메트가 지상의 삶을 끝내고,백마를 타고 승천한 장소가 바로 그 곳이라고 믿는다.그들은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밟았던 마지막 발자욱의 흔적까지 그 곳의 바위에 남아있다고 주장한다.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 두 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건축했고,그 곳을 ‘하람 에스 샤리프’라고 불러왔다.‘고귀한 성역(聖域)’이라는 뜻이다.이스라엘 사람들과 아랍인들이 그 곳을 성지로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각각 다르고,부르는 이름조차 같지 않다.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그 지역이 서로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지 중의 성지라는 점이다.
그러면 성전산은 누구의 땅이라고 해야 옳은가? 이것은 3000년의 긴 역사와 뒤엉켜져 있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주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그리고 예루살렘 원주민으로부터 훗날 성전 건축의 대지가 될 땅을 매입했다.다윗왕이 지불한 땅 값이 구약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사무엘하권에는 은 50세겔이라고 되어 있다(삼하 24:24).그런데 역대기에는 그보다 훨씬 큰 금액인 금 600세겔로 기록되어 있어 값의 차이가 엄청나다(대상 21:25).땅값으로 지불한 돈의 정확한 액수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그러나 여하튼 다윗왕은 원주민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매입했고 그 장소 위에 다윗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왕은 성전을 건축했다.그곳이 바로 ‘성전산’이 된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다윗왕이 성전산 지역을 돈을 주고 샀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다윗왕의 후손이 되는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산의 소유권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는 것이다.그러나 구약성경의 기록이 오늘날 소유권 분쟁 해결에 법적인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고,아랍인들은 그런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한다.
서기 7세기 중엽,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그 후로 줄곧,십자군 시대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성전산 지역의 주인이 되어 왔다.
그러던 중,지금부터 35년전인 1967년 소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이스라엘측은 이 전쟁에서 성전산 지역 ‘탈환’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이스라엘 최정예 공수부대가 예루살렘 전투에 투입되었고,치열한 전투 끝에 성전산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이 때,이스라엘 병사들의 얼굴은 땀과 감격의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장장 1300년만에 유대인들이 성전산을 다시 차지한 것이다.이스라엘측은 즉시 성전산 지역을 이스라엘 국토에 합병(合倂)시킨다고 선언했다.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측의 일방적인 선언일 뿐,지금까지도 성전산 지역은 여전히 아랍인들의 관할권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일부 극단적인 과격파들은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그들은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성전산 위에 있는 두 개의 이슬람교 대사원을 폭파시키고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사람들이다.이러한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은 극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22개 아랍동맹국가들은 물론이요,이슬람국가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57개 국가들은 반드시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에 보복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이스라엘측은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고,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될 수가 있다.이것은 단순한 가상의 시나리오만은 아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아랍측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성전산 지역을 이스라엘 야당 당수 ‘샤론’은 경호원과 세계 언론에 둘러싸여 방문한 것이다.그의 ‘전시용’ 행적은 그동안 비교적 잠잠했던 중동 사태에 불을 붙였고 혼란의 극으로 치닫게 했다.그러나 이 일은 ‘샤론’이 이스라엘 수상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성전산 방문은 정치인 ‘샤론’의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행보였던 것이다.
감람산 유대인묘지와 예루살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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