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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그리스

[그리스] 고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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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 지협은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가느다란 땅이다. 길이는 약 15킬로미터이고,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이 6킬로미터 가량이고, 가장 높은 곳이 해발 90미터를 넘지 않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지금 이 지협은 코린토스 운하에 의해 끊겨 있다. 이제 펠로폰네소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도가 아니고 섬인 셈이다.

코린토스 운하는 수에즈 운하를 팠던 프랑스의 토목 기술자 레셉스가 1882년에서 1893년까지 12년간의 대역사를 벌여 완성한 운하이다. 길이는 6.4킬로미터 정도에 너비는 25미터, 깊이는 8미터 정도이다. 운하에는 32미터 길이의 다리가 두 개 걸쳐져 있다. 이 다리의 높이는 약 60미터 정도이다. 운하를 지나는 배는 1노트에서 3노트의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견인선이 배를 끌고 간다. 조그만 견인선이 덩치 큰 화물선을 끌고 가는 모습은 얼핏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 운하를 이용하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뱃길을 320킬로미터 정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이런 이점을 알고 있었던 고대 코린토스인은 배를 지협 한편에서 건너편으로 넘겨주고 돈을 받았다. 코린토스가 일찍부터 그리스 세계의 상업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동시에 두 만의 바다를 이어주는 지협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배라도 한쪽 바다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일은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부터 이 지협에 운하를 파려는 수많은 계획과 시도가 있었다.

이미 기원전 6세기 초에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는 이곳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 역시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코린토스로 이주시켜 운하를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골 족의 로마 침입으로 중단되었지만 유대인들은 계속 코린토스에 남아 살게 되었다. 이 유대인들이 나중에 사도 바울을 맞아 코린토스에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운하의 양쪽 끝에는 조그만 포구가 있고 운하의 양쪽을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수면에서 겨우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배가 지나갈 때는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다리가 가라앉고 그 위를 배가 지나는 광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리고 고대 이스트미아 운동 경기가 열렸던 곳 가까운 곳에 위치한 조그만 식당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경험은 오랫동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오늘날, 코린토스의 폐허에 서면, 인간사의 덧없음을 절로 느끼게 된다. 한때 가장 화려하고 세계 최고의 사치와 환락 도시였던 이 곳에 이제는 무심한 돌덩이들만 쓸쓸하게 뒹굴고 있다. 북쪽 언덕에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는 아폴론 신전과 잘 정돈된 아고라 광장의 바닥 돌들만이 옛날의 화려함을 희미하게 암시해 줄 뿐이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다. 뮈케나이 시대에 이곳은 아르고스의 변방이었다. 그러나 도리아 족의 침입이 있었던 기원전 1100년쯤부터 이곳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여 기원전 8세기에는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드리아해의 섬들과 이탈리아 남부 해안, 그리고 시실리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시실리의 가장 큰 도시 시라쿠사도 코린토스인이 세운 도시다. 이런 식민 도시들을 발판으로 코린토스는 지중해 전 지역은 물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도자기와 청동 그릇 등을 비롯한 상품을 수출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베네치아인들의 전성기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 동안 지중해를 누비던 삼단의 노를 가진 배, 갤리선을 처음으로 만든 것도 코린토스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7세기 초에 코린토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부터 코린토스의 이런 경제적 번영은 새로운 해운 강국인 아테네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 전쟁 동안 코린토스는 그리스 연합 사령 본부로 쓰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의 패권을 쥔 아테네의 발전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코린토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까닭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코린토스는 스파르타 편에 서서 싸웠다.

기원후 4세기에 들면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새로운 강국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만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한 뒤, 그 다음해 코린토스에서 필립포스 2세의 지배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코린토스의 긴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은 로마시대에 일어났다. 로마의 그리스 침입에 가장 격렬하게 반항한 것은 아카이아 동맹이었다. 코린토스는 바로 이 동맹의 맹주였다.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동맹군은 로마군에게 대패했다. 코린토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로마의 무미우스 장군은 승리한 뒤, 코린토스를 약탈하고 돌 하나도 제대로 있지 못하게 될 정도로 여지없이 파괴했다. 유서 깊은 고도인 코린토스의 운명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코린토스는 그렇게 버려져 있기에는 너무도 좋은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케사르는 자신을 위해 평생 목숨을 바쳐 싸운 병사들에게 새로운 땅과 거주지를 제공해 주려는 배려에서 코린토스에 새로운 도시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도시의 건설은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완성되었지만 명당 자리에 선 도시는 곧바로 옛날의 영광에 못지않은 부귀와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로마의 황제들은 서로 앞다퉈 코린토스의 발전을 위해 투자와 건설을 아끼지 않았다. 사도 바울로가 이 도시에 왔을 때, 코린토스는 로마의 그리스 속주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였다. 지금 우리가 코린토스 폐허에서 보는 것은 모두 이 시대의 유물들이다. 그리스 시대의 건물은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에 의해 너무도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북쪽 언덕에 외로이 서 있는 아폴론 신전만이 그 파괴와 약탈을 피해 오늘날까지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코린토스의 부유함은 곧 외적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떠올랐다. 기원후 267년과 395년 야만족의 침입에 코린토스는 심하게 약탈을 당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의 멸망에 가장 결정적인 일격을 가한 것은 자연의 재해였다. 기원후 522년과 551년, 두 번에 걸친 지진은 도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11세기 들어 코린토스는 어느 정도 번영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1147년 노르만족의 침입이 있은 뒤, 이 도시는 프랑크 족과 베네치아인들, 그리고 끝으로 오스만 터키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었다. 지금 코린토스 뒤쪽 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투박한 성채는 바로 베네치아 시대의 유물이다.

1820년대에 있었던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터키군은 바다를 통해 후퇴했다. 그 후, 이곳 바닷가에 새로운 코린토스가 세워졌다. 지금 이 새 코린토스에는 2만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다. 평화롭고 조용한 어촌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한 현대인들은 이 곳이 마음에 들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

코린토스에 얽힌 이야기로 유명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일 것이다. 그리스 동맹군을 이긴 정복자 알렉산드로스가 코린토스를 방문했을 때, 이 도시에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 나선다. 디오게네스는 당대에 이미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조그만 술통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지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모든 가치관을 삐딱하게 보는 견유학파 철학자로서 그런 방법으로 천박한 물질주의를 비웃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철학자는 그가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조금 비켜서라고 말했다. 순간 모욕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한칼에 베어 버릴 생각도 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고 “내가 대왕이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코린토스 양식에 얽힌 이야기>

그리스 건축의 기둥은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그리고 코린토스식으로 구분된다. 로마 시대의 건축가 비투루비우스에 따르면 도리아식 기둥은 남자 몸의 비율을 본 딴 것으로, 기둥의 높이와 지름의 비율이 6:1이다. 이는 남자의 키가 보통 그 사람의 발 길이 6배에 해당한다는 데에서 착안한 양식이다. 반면 이오니아식은 8:1의 비율을 갖는데 이는 여자 몸의 비율을 따른 것이다. 그러기에 도리아식 기둥을 보면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의 우람하고 강건한 몸매를 연상하게 되고 이오니아식 기둥을 보면 우아하고 날씬한 여인의 몸매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린토스식 기둥의 비율은 이오니아식 기둥보다도 더 가냘프다. 비투루비우스는 그리스의 건축가 칼리마코스가 어느 소녀의 무덤에 아칸토스 풀잎이 옆으로 번져 있는 것을 모고 영감을 얻어 코린토스 양식을 고안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은 딸을 애도하던 소녀의 어머니가 평소 딸이 아끼던 물건들을 바구니에 넣어 무덤 위에 놓고 기와로 덮었는데 마침 그 밑에서 싹 트던 아칸토스 풀잎이 자라나다 이 방해물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뻗어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코린토스식 기둥 위에는 아칸토스 잎이 장식되어 있고 그 기둥은 어딘가 가냘프고 여린 소녀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코린토스는 지금 한적한 폐허로 변했지만 그 도시가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주변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머물러 있다.

 

코린트(Corinth)라고도 한다.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호메로스의 시()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으며,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고린도).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현재의 새 코린토스시는 구()코린토스시의 북동쪽 약 5 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토스현()의 주도()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자원은 거의 없으며, 카란토(코린토스의 건포도라는 뜻) ·올리브유 ·견직물 ·펠로폰네소스의 북동부에서 생산되는 곡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코린토스의 역사>

△ 아칸토스 풀잎이 옆으로 뻗어나간 모양을 본떠 윗부분을 장식한 코린토스식 기둥



오늘날, 코린토스의 폐허에 서면, 인간사의 덧없음을 절로 느끼게 된다. 한때 가장 화려하고 세계 최고의 사치와 환락 도시였던 이 곳에 이제는 무심한 돌덩이들만 쓸쓸하게 뒹굴고 있다.

북쪽 언덕에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는 아폴론 신전과 잘 정돈된 아고라 광장의 바닥 돌들만이 옛날의 화려함을 희미하게 암시해 줄 뿐이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다. 뮈케나이 시대에 이곳은 아르고스의 변방이었다. 그러나 도리아 족의 침입이 있었던 기원전 1100년쯤부터 이곳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여 기원전 8세기에는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드리아해의 섬들과 이탈리아 남부 해안, 그리고 시실리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시실리의 가장 큰 도시 시라쿠사도 코린토스인이 세운 도시다. 이런 식민 도시들을 발판으로 코린토스는 지중해 전 지역은 물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도자기와 청동 그릇 등을 비롯한 상품을 수출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베네치아인들의 전성기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 동안 지중해를 누비던 삼단의 노를 가진 배, 갤리선을 처음으로 만든 것도 코린토스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7세기 초에 코린토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부터 코린토스의 이런 경제적 번영은 새로운 해운 강국인 아테네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 전쟁 동안 코린토스는 그리스 연합 사령 본부로 쓰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의 패권을 쥔 아테네의 발전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코린토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까닭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코린토스는 스파르타 편에 서서 싸웠다.

기원후 4세기에 들면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새로운 강국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만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한 뒤, 그 다음해 코린토스에서 필립포스 2세의 지배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코린토스의 긴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은 로마시대에 일어났다. 로마의 그리스 침입에 가장 격렬하게 반항한 것은 아카이아 동맹이었다. 코린토스는 바로 이 동맹의 맹주였다.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동맹군은 로마군에게 대패했다. 코린토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로마의 무미우스 장군은 승리한 뒤, 코린토스를 약탈하고 돌 하나도 제대로 있지 못하게 될 정도로 여지없이 파괴했다. 유서 깊은 고도인 코린토스의 운명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코린토스는 그렇게 버려져 있기에는 너무도 좋은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케사르는 자신을 위해 평생 목숨을 바쳐 싸운 병사들에게 새로운 땅과 거주지를 제공해 주려는 배려에서 코린토스에 새로운 도시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도시의 건설은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완성되었지만 명당 자리에 선 도시는 곧바로 옛날의 영광에 못지않은 부귀와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로마의 황제들은 서로 앞다퉈 코린토스의 발전을 위해 투자와 건설을 아끼지 않았다.

사도 바울로가 이 도시에 왔을 때, 코린토스는 로마의 그리스 속주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였다. 지금 우리가 코린토스 폐허에서 보는 것은 모두 이 시대의 유물들이다. 그리스 시대의 건물은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에 의해 너무도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북쪽 언덕에 외로이 서 있는 아폴론 신전만이 그 파괴와 약탈을 피해 오늘날까지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코린토스의 부유함은 곧 외적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떠올랐다. 기원후 267년과 395년 야만족의 침입에 코린토스는 심하게 약탈을 당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의 멸망에 가장 결정적인 일격을 가한 것은 자연의 재해였다. 기원후 522년과 551년, 두 번에 걸친 지진은 도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11세기 들어 코린토스는 어느 정도 번영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1147년 노르만족의 침입이 있은 뒤, 이 도시는 프랑크 족과 베네치아인들, 그리고 끝으로 오스만 터키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었다. 지금 코린토스 뒤쪽 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투박한 성채는 바로 베네치아 시대의 유물이다.

1820년대에 있었던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터키군은 바다를 통해 후퇴했다. 그 후, 이곳 바닷가에 새로운 코린토스가 세워졌다. 지금 이 새 코린토스에는 2만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다. 평화롭고 조용한 어촌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한 현대인들은 이 곳이 마음에 들 것이다. 

△ 파괴와 약탈을 피해 오늘날까지 위엄있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코린토스의 아폴론 신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

코린토스에 얽힌 이야기로 유명한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일 것이다. 그리스 동맹군을 이긴 정복자 알렉산드로스가 코린토스를 방문했을 때, 이 도시에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 나선다. 디오게네스는 당대에 이미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조그만 술통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지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모든 가치관을 삐딱하게 보는 견유학파 철학자로서 그런 방법으로 천박한 물질주의를 비웃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철학자는 그가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조금 비켜서라고 말했다. 순간 모욕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한칼에 베어 버릴 생각도 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 먹고 “내가 대왕이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코린토스 양식에 얽힌 이야기>

그리스 건축의 기둥은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그리고 코린토스식으로 구분된다. 로마 시대의 건축가 비투루비우스에 따르면 도리아식 기둥은 남자 몸의 비율을 본 딴 것으로, 기둥의 높이와 지름의 비율이 6:1이다. 이는 남자의 키가 보통 그 사람의 발 길이 6배에 해당한다는 데에서 착안한 양식이다. 반면 이오니아식은 8:1의 비율을 갖는데 이는 여자 몸의 비율을 따른 것이다. 그러기에 도리아식 기둥을 보면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의 우람하고 강건한 몸매를 연상하게 되고 이오니아식 기둥을 보면 우아하고 날씬한 여인의 몸매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린토스식 기둥의 비율은 이오니아식 기둥보다도 더 가냘프다. 비투루비우스는 그리스의 건축가 칼리마코스가 어느 소녀의 무덤에 아칸토스 풀잎이 옆으로 번져 있는 것을 모고 영감을 얻어 코린토스 양식을 고안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은 딸을 애도하던 소녀의 어머니가 평소 딸이 아끼던 물건들을 바구니에 넣어 무덤 위에 놓고 기와로 덮었는데 마침 그 밑에서 싹 트던 아칸토스 풀잎이 자라나다 이 방해물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뻗어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코린토스식 기둥 위에는 아칸토스 잎이 장식되어 있고 그 기둥은 어딘가 가냘프고 여린 소녀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코린토스는 지금 한적한 폐허로 변했지만 그 도시가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주변에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머물러 있다. 

△ 한때 코린토스와 아시아를 오가는 배들로 영화를 누렸던 켕크레에스 항을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

● 코린토스의 외항, 켕크레에스

코린토스 운하에서 사로니카 만을 따라 남쪽으로 12킬로미터를 가면 케흐레스라는 조그만 해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의 옛 이름은 켕크레에스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시네스란 악당이 이곳에서 두 소나무를 휘어 그 사이에 지나는 나그네의 발을 하나씩 묶고는 나무를 튕겨 찢어 죽이는 잔인한 행패를 부리다가 끝내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손에 똑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도 이 아름다운 해변에는 소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어 옛 신화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켕크레에스는 지금은 운하 때문에 조그만 포구로 전락하여 여름 휴양지로서 명목을 이어가고 있지만 한때는 아시아에서 코린토스로 들어오는 배들로 북적거리던 규모가 꽤 큰 항구였다. 아직도 포구 양끝에는 당시의 방파제와 그 위에 세워졌던 창고를 비롯한 건물들의 잔해가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방파제 잔해 일부는 바다 아래까지 이어져 있어 이곳 해안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침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속에 잠긴 말없는 돌들이 인간사의 허망함과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로마시대에는 소아시아에서 로마로 향하던 여행객이나 화물들은 거의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갔다.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52년에 사도 바울로(바울)가 아테네에서 코린토스로 왔을 때 상륙한 곳도 바로 이 항구였다. 그 당시 코린토스에는 네로 황제가 운하를 파기 위해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이곳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6000여 명의 유대인들의 후예들과 그 후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추방당한 유대인들로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사도 바울로가 켕크레에스와 코린토스에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우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아직도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페이레네 샘에는 제우스와 시쉬포스의 신화가 얽혀 있다

● 사도 바울로의 코린토스 전도

사도 바울로는 코린토스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그리스도교를 전도했다. 그때, 코린토스는 타락이 절정에 이른 환락의 도시로 이름 높았다. 선사 시대부터 사랑과 환락의 신 아프로디테를 숭배하던 코린토스에는 수천 명의 창녀들이 들끓었었다. 그래서 ‘모든 배가 코린토스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고대 그리스 경구가 생길 정도였다. 이 말은 모두가 다 행운을 만날 수는 없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당시의 모든 뱃사람들은 그들이 탄 배가 환락으로 유명한 코린토스로 가는 것을 은근히 바랐다. 그러나 모든 배가 다 코린토스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인간 모두가 행운을 누릴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스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유난히 타락을 경계하고 도덕적 순수함을 강조한 까닭이 바로 그 도시에는 환락이 극에 달해 곳곳에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린토스의 전도에서 바울로를 괴롭힌 것은 주민들의 방탕한 생활 풍습만이 아니었다. 그 시기는 로마 제국의 초기로서 제국 안의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여 살던 때였기에 제국의 각 지방에서 들어온 온갖 종교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런 이교신앙들과 힘겨운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사도 바울로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이런 퇴폐나 종교적 혼란이 아니었다. 그의 설교와 그리스도교 전도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던 코린토스 지역의 유대인들이 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바울로의 설교와 전도 행위가 모세의 율법을 해친다며 코린토스의 총독 갈리오에게 사도 바울로를 고발했다.

그러나 갈리오는 바울로에 대한 고발이 범법이나 악행에 대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니 유대인들끼리 알아서 처리할 문제라고 대답하며 바울로를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당시 총독 갈리오가 바울로를 고발하기 위해 몰려온 유대인들에게 연설한 장소인 베마라는 구조물은 아직도 코린토스의 아고라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뒷날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베마 위에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 교회 흔적마저 사라지고 폐허만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 레카이온 길과 페이레네 샘

코린토스 유적지에는 두 개의 입구가 있다. 그 가운데 동쪽에 있는 입구가 정문이라 할 만하다. 매표소를 지나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 아래로 대리석으로 잘 포장된 고대의 길이 보인다. 코린토스 중심에서 코린토스의 또 다른 외항이었던 레카이온으로 뚫렸던 레카이온 길의 일부이다. 사로니카 만 쪽의 켕크레에스 항구가 아시아로 가는 출발점이라면 코린토스만에 위치한 레카이온은 로마로 가는 서쪽 항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기원전 5세기 때에는 코린토스 도심에서 이 항구의 부두까지 성벽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다. 예전에는 이 길 양옆에 웅장하고 화려한 공공건물들과 상점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길에서 우리를 제일 처음 맞아 주는 것은 로마시대의 수세식 공중변소이다. 조금 더 지나면 나지막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따라 길의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아담한 정원이 나온다. 이곳이 고대 시대부터 아름답기로 유명한 페이레네 샘이다. 이 샘은 아직도 물이 풍부하다.

이 샘에 얽힌 재미있는 신화가 있다. 코린토스는 물이 귀한 곳이다. 꾀 많은 영웅 시쉬포스가 이곳에 도시를 세우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염려했던 문제가 바로 물이었다. 그때 마침 제우스는 코린토스 이웃에 있는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아이간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소포스는 자신의 딸을 납치한 제우스의 행방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납치범이 주신 제우스인지라 아무도 감히 제우스의 행방을 알려 주지 않았다. 이때 시쉬포스는 아소포스에게 코린토스에 샘을 하나 만들어 주면 범인의 행방을 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이렇게 해서 솟아나게 된 샘이 바로 페이레네 샘이다.

시쉬포스는 이렇게 하여 샘을 얻었지만 제우스에게 괘씸죄를 범해 죽은 뒤에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언덕을 향해 바위를 굴리는 벌이다. 힘들게 언덕 정상에 올려놓은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마련이고, 그러면 시쉬포스는 또다시 아래부터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쉬포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굴리는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주민들을 위해 얻은 페이레네 샘에서는 아직도 지하에서부터 시원한 물이 끝없이 솟아난다. 폐허에 서서 그 물소리를 듣는 나그네는 시쉬포스 보살의 희생을 떠올리고 숙연해지게 마련이다.

● 못 다 핀 소녀의 슬픔을 담은 글라우케 샘

고린토스에 얽힌 신화 가운데 가장 슬픈 이야기는 글라우케의 이야기이다. 아르고스 원정대의 대장 이아손은 적국의 공주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의 양털을 얻어 메데이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에서 메데이아가 벌인 잔혹한 복수 행위로 고향에서 쫓겨나 코린토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아손의 인물에 반한 코린토스의 왕은 자신의 딸 글라우케를 이아손과 결혼시키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아손만을 쫓아 그리스까지 온 메데이아에게 이아손의 이런 행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배신이었다. 더 이상 이아손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을 안 메데이아는 글라우케에게 독이 묻은 옷을 결혼 선물이라고 보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글라우케는 기쁜 마음으로 이 옷을 입어본다.

그러나 그 순간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불쌍한 소녀는 하늘의 신들을 향해 차라리 자신을 샘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고통 받는 소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신들은 그녀를 푸른 물이 솟는 샘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샘이 바로 글라우케 샘이다. ‘글라우케’는 그리스 말로 푸른 물빛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이 샘의 물빛이 유난히 푸르러 붙여진 이름이리라. 이 글라우케 샘은 슬픈 사연을 전하려는 듯, 지금도 코린토스 한구석에 외롭게 서 있다. 이 샘의 외곽을 이루고 있는 누런 바위 빛깔이 새파란 지중해 하늘 아래 유난히 더 처절한 기분을 자아낸다. 

 

고린도전서
국내도서>종교/역학
저자 : 프리셉트성경연구원
출판 : 프리셉트 2009.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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