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김희곤 교수님께서 작성하신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의 실태와 보존 방안’에 대한 발제 원고를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 유적이나 유물도 근대 문화재로 지정해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고, 독립기념관 안에 국내외 유적을 묶어서 조사하고 관리하는 팀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하신 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또한, “독립운동 유적지 기념 사업을 함에 앞서 무엇보다도 정확한 현장 조사가 선행돼야 하고, 이미 조사된 곳이라 하더라도 미흡하거나 수정되어야 할 경우에는 추가 조사 작업을 해야 한다.”고 언급하신 점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이 문제, 잘못 지정됐거나 조사가 미흡한 독립운동 유적지들은 실제 유적지가 훼손되거나 영원히 사라지기 전에, 정부 차원에서 신속히 재조사를 벌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에서, 몇 가지 사례와 함께 그에 대한 제 의견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만, 지난 삼일절을 전후해서 국내 한 일간지는, 중국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 유적지들 중에 잘못 지정된 곳이 적지 않다는 취지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그러한 정부 사업에 책임 연구원으로 참여하신 적이 있는 김희곤 교수님께서는 발제문 속에서 그 신문을 염두에 두신 듯 이런 지적을 하셨습니다. “간혹 언론이 나서서 조사 결과가 형편없이 잘못되었다고 자극적으로 보도하거나 침소봉대하는 일도 있고,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언론의 속성상 가끔 언론들이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과장된 보도를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런 점을 저도 일부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비전공자들이 전문가 집단이 수행한 업적에 대해 시비를 걸 때는 자신의 상식에 비춰 적어도 그만한 가치와 단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문제가 된 그 기사는 당연히 신문사 기자들이 취재하고 글로 쓴 것입니다. 다만 일정 지역에는 현지 사정을 좀 아는 제가 안내를 했고, 또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기사 속에서 언급된 몇 군데 유적지에 대해서는 보충 설명을 드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뜻이, 그 동안 유적지 조사와 연구에 헌신하신 사학자님들의 노고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란 점을 미리 밝힙니다.
저는 이 방면의 전공자가 아닙니다. 방송작가이고 다큐멘터리 제작가일 뿐입니다. 제가 중국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로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한 직후였습니다. (TV 드라마 한중 합작 촬영에 집필 작가로 참여, 1992년 9월 24일부터 32일 간) 그때 저는 일제가 우리 땅을 강점하던 시기에 대한의 망명정부가 중국 땅에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고, 그것이 계기가 돼,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7년 역사와 중국 안에서 임시정부가 이동한 경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정이 험난한 현지를 여러 차례 답사하게 됐습니다.
아래는 ‘임시정부 유적지 답사 목적으로만 떠났던’ 저의 중국 여행 기록입니다.
[1차 답사] 1994. 4. 5 - 4. 27. (23일 간)
북경→서안→중경→귀양→유주→광주→장사→남경→소주→항주→가흥→상해
[2차 답사] 1998. 10. 7. - 10. 17. (11일 간, 노광복군들과 함께)
북경→서주→고진→숙주→부양→임천→서안→중경→상해
[3차 답사] 1999. 3. 4. - 4. 15. (45일 간)
북경→서안→상해→가흥→해염→항주→남경→진강→구강→무한→장사→광주→오주→유주→귀양→준의→기강→중경→북경→대련
[4차 답사] 2007. 1. 17. - 1. 24. (8일 간)
장사→중경→기강→상해→부양→무한→북경
이렇게 여러 차례 중국 땅을 헤짚고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도 임시정부와 관련한 유적지를 반세기 만에 처음 찾는 한국인이 되기도 했고,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생존 지사님들의 증언과 현장 확인 조사를 통해 다행스럽게도 몇 군데 중요한 유적지를 제가 처음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하나씩 둘씩 사라지는 우리의 중요한 유적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중국 역시 도시마다 재개발 바람이 무섭게 불고 있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관련 건물들은 세월의 무게가 너무 커서 현재 남아 있는 것들도 언제 자취를 감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 나름으로 지난 십여 년 동안 중국 안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조사하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또 전문 학자들의 유적지 연구 내용에 동의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미 조사한 내용에도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확인이 될 때는 인정하고 곧바로 고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내용들을 다큐멘터리와 소설에 담았습니다. 역사 다큐멘터리 3부작 “임시정부 27년 대륙 3만리”는 1999년 광복절에 맞춰 KBS-TV에서 방송했고, 2권 짜리 장편소설 “국새”는 지난 해 (2006년) 여름에 ‘시대의창’에서 출간했습니다. <* 소설 ‘국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7년 노정과 유적지들을 배경으로 쓴, 가상 미스테리 역사소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가 이런 내용을 담아 사회에 발표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부의 관련 기관은 물론 관련 사학계에서도 냉담했습니다. 제가 전공자도 교수도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서, 십여 년을 매달렸고, 모두 87일 동안 중국 내 26개 도시와 이동 경로를 따라 여행했으며, 임시정부와 함께 했던 생존 인사 35분을 만나 증언을 청취하고 녹화했습니다.
<제 작품으로 처음 소개한, 중국 내 임시정부 주요 유적지들>
1. 항쩌우(杭州), 임시정부 판공실이 있던 건물 (淸泰第2旅社)
[현주소] 仁和路 22호 群英飯店
* 항주 임정의 첫 임시판공처 (1932. 5.-10.)
* 1910년 新泰반점으로 설립, 손문 숙박. 1933년 ‘청태제2여사’로 개명.
1967년 ‘군영반점’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름.
■ 1994. 3. 발견 (당시 건물명이 적힌 시설물들이 남아 있음.)
2. 난징(南京), 1933년 5월 김구와 장졔스가 회담한 방으로 추정되는 곳
(난징 총통부 소접견실)
[현주소] 南京煦園 內 孫中山臨時大總統辦公室
* 1927.-1937. 장졔스 총사령관 기거.
■ 1999. 3. 발견 (현지 역사가의 증언과 안내)
3. 우한(武漢), 조선의용대 창설지로 추정되는 곳
私立武昌大公中學 (옛주소, 黃土坡上街 / 현주소, 紫陽路 省總工會處 자리)
* 1932.-1950. 존속함. (1938년 혁명활동지)
*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창설 (1938. 10. 10.)
* 대공중학이 ‘무창31중학’으로 바뀌었다는 자료도 있음.
■ 1999. 3. 발견
(현지 교육청에서 관련 자료 확인, 김승곤 전 광복회장 증언)
4. 창사(長沙), 임시정부 청사, 西園北里 8호 건물
[현주소] 서원북리 2호 아파트
(北區 通泰街 西園北里 2號 湖南省交通規劃勘察設計院 西園居住小區)
* 1937. 11.-1938. 7.
■ 1994. 3. 발견 (애국지사 신순호 님의 증언과 일치)
5.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 병영 자리
[현주소] 長安縣 杜曲鎭 杜曲糧站
■ 1994. 3. 발견
(현지 주민들의 증언, 나중에 당시 현지에 있던 노광복군들이 확인)
6. 시안(西安), 김구 주석이 해방 소식을 처음 들은 곳, ‘黃樓’
[현주소] 산시성(陜西省) 성정부 구내
* 당시 산시성 주석 쭈싸오쩌우(祝紹周)의 관저
■ 1999. 4. 발견
7. 노광복군(일본군대 탈출 학병)들의 탈출 경로와 현장
- 서주, 고진, 숙주, 부양, 임천, 서안, 중경
■ 1998. 10. 노광복군들과 함께 답사
8. 기강(綦江), 임시정부 청사 터
- (현주소) 重慶市 綦江縣 古南鎭 沱灣 8호 (옛주소: 臨江街 43호로 추정)
* 당시 입주 때 지명은 沱灣이었고, 머무는 동안에 임강가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다시 타만으로 바뀌었음.
■ 2005. 9. 확인
(박영준, 신순호 지사와 유족 김자동 증언)
<독립기념관 현지 실태 조사 보고서 내용과 다른 점>
한국근현대사학회는 문화관광부와 독립기념관의 지원으로 2001년 12월 31일 독립기념관과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 조사’ 학술 용역을 체결하고, 조사 대상 지역을 중국 남부, 중국 서북부, 중국 동북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일본, 미주, 유럽 등 7개 지역으로 나눠, 2002년 1월부터 8월까지 주로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각 20일 안팎의 기간 동안, 현지를 조사하였습니다. 조사 팀은 국외 유적지 답사에 경험이 많은 대학교수와 강사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는데, 책임연구원 1명과 연구원 2명, 독립기념관 연구원 1명, 사진기사 1명 등 5명이 1조를 이뤘습니다.
보고서는 2권으로 나눠, 2002년 11월 30일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란 제목으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3년 8월 7일과 8일, 백범기념관에서는 관련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현황과 보존 문제’란 제목으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고, 자료집이 발간됐습니다.
저는 독립기념관이 만든 이들 보고서 속에서 지금까지 제가 조사한 것과는 다른 내용들이 있어서 아래와 같은 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조사한 중국 현지 유적지들은 보고서에 나오는 유적지들 가운데 극히 일부이고, 비교는 그것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유적지 |
독립기념관 발간 ‘실태조사 보고서’ |
이봉원 제작 다큐 |
[상하이(上海)] ㅇ 홍구공원 내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 |
노신 동상 주변으로 추정 (300쪽) |
노신 동상 앞 잔디밭의 호수 쪽 길가 (네 번째 가로수 자리에 단상이 있었다.) * 독립운동가 진춘호 증언 |
[푸양(阜陽)] ㅇ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 |
미확인 (351쪽) |
현주소: 삼탑진 조붕마을 (푸양 시내서 阜南쪽으로 20km 위치) * 당시 현지에 주둔했던 3지대 광복군들과 함께 1998년에 답사, 확인 |
[우한(武漢)] ㅇ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 |
옛, 한구중화기독교청년회 건물. 현주소: 중산대도 1090호 (364쪽) |
옛, 우창(武昌)시 대공(大公)중학교. (옛주소, 黃土坡上街 / 현주소, 紫陽路 省總工會處 자리) |
[창사(長沙)] ㅇ 임시정부 청사 터 |
옛주소: 서원북리 6호 현주소: 서구 통태가 서원북리 1, 2호 (368쪽) |
옛주소: 서원북리 8호 (* 5호-8호, 2층 연립주택 1동, 당시 건물 사진 촬영) 현주소: 북구 통태가 서원북리 (北區 通泰街 西園北里) 2호 자리 |
[창사(長沙)] ㅇ 남목청 |
남목청 9호에서 4호로 주소가 바뀌었는데, 2002년 현재, 유적지는 없고 대신 아파트가 들어섰음. (370쪽) |
현존하는 일부 건물의 주소가 남목청 9호에서 2호로 다시 6호로 바뀜. 2007. 1. 현재 일부 건물 존재함 |
[창사(長沙)] ㅇ 상아의원 |
해방 뒤에 지은 별관을 사진으로 소개 (373쪽) |
당시 건물인 본관이 따로 현존함 |
[치쟝(綦江)] ㅇ 임시정부 청사 터 |
현주소: 기강현 고남진 상승가 27호 (주택가) (424쪽) |
현주소: 重慶市 綦江縣 古南鎭 沱灣 8호 (기강 강변) |
[충칭, 토교(重慶 土桥] ㅇ 임시정부 대가족이 살았던 한인촌 |
옛주소: 유가만 남천집중영 현주소: 구룡파구 화계향 화 계촌 (410쪽) |
옛주소: 한인촌 현주소: 파남구 리가타토교(巴南區 李家沱土桥) 중경강철집단 강관책임유한공사 (重慶鋼鐵集團 鋼管責任有限公司) 자리 |
[시안(西安)] ㅇ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본부 와 지대장 관사 터 |
현주소: 장안현 두곡진 도계보(長安縣 杜曲鎭 桃溪堡)의 가옥 (64호, 65호) 터 (236쪽) |
당시 이범석 부관이었던 김준엽 지사는 현재 두곡소학교 (杜曲小學校) 자리라고, 현지 답사 후 확인 |
[시안(西安)] ㅇ 성주석 공관 (김구 주석이 일제 항복 소식을 처음 들은 곳) |
조사하지 않음 |
[현주소] 산시성(陜西省) 성정부 구내 ‘黃樓’ |
이밖에도 오자로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ㅇ (406쪽)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주소 : 쪼우룽로(鄒容路) 39호 [현 味苑 餐廳] → ‘37호’ (ㅇ) * 그런데 이 잘못된 주소는, 이후에 발간된 관련 학 술대회 자료집(2003. 8.)에서나 저서(2004. 8.)에서도 고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실려 있다.
ㅇ (373쪽) 창사, 김구가 총상 치료를 받은 상아의원(湘雅醫院, 현 湖南醫科大學 附屬病院 내) 주소 : ‘북청로’ → ‘북참로(北站路)’ (ㅇ),
* 상아의원 건물 사진 잘못 수록
ㅇ (412쪽) 동암 차리석 지사의 생몰년대 : (1881-1954) → (1881-1945) (ㅇ)
[맺음말]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제가 주장하거나 추정하고 있는 유적지가 사실과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좀더 확인이 필요한 곳도 있습니다. 또 독립기념관이 2002년에 조사해 발표한 중국 내 관련 유적지들을 제가 모두 검토한 결과도 아닙니다.
하지만 수많은 국외 유적지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라 해도 잘못 지정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그 밖의 다른 유적지들까지 포함해 총체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조사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조사 때는 기록 문서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생존 지사나 생존 유족의 증언을 청취해서 참고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비전공자의 도움도 구해야 합니다. 현지에서 묵묵히 이러한 데 관심을 갖고 나름으로 조사 연구를 하고 있는 기업체 현지 주재원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도 적극 참고해야 합니다. 또 유적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주요 지역에는 현지에 장기 체류하는 한국인 한 사람을 골라 유적지 지킴이란 명예 칭호를 주어, 정부가 정기적으로 실태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도 있습니다. 진작 이런 제도가 있었다면, 지난해 겨울(2006년 12월)에 철거된 기강현 상승가 107호 (조선혁명당 본부, 요인들 가족 거주) 건물의 일부라도 미리 확보할 수가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국가 사업인데, 2002년 독립기념관 조사에선, 현지에서 지도 한 장 구입해 대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들까지도 놓치셨습니다.
독립기념관이 잘못된 자료를 검증도 제대로 않고 사실인 양 발표하는 일은 그 뒤로도 있습니다. 2005년에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한국독립운동사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것을 봤습니다. 연구원이 직접 출연하고 감수를 한 학습용 영상물에 잘못된 자료를 넣는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게 됩니다. 차라리 안 넣는 것만 못한 일이지요.
2002년 정부의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 조사 보고서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 1차 보고서가 족보가 되어 관련 분야에서 확대 재생산이 되지 않게끔 한시라도 빨리 2차 보고서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역사가 계속 세상 속으로 퍼져나가 굳어질 것이고, 후손들도 잘못 배우고 잘못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천상에 계신 독립운동 선열님들께 우리는 큰 죄를 짓는 게 될 것이며, 영령들께선 매우 슬퍼하실 것입니다. <끝>
* 위 원고는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와 보존 방안”이란 제목으로
국회의원 이원영 의원실과 세계평화청년연합이 공동으로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토론회 개요>
ㅇ 주제 :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와 보존 방안
ㅇ 일시 : 2007년5월2일(수) 15:00~18:00
ㅇ 장소 : 국회도서관 강당
- 사회 : 국회의원 이원영
- 발제 : 김희곤 교수(안동대 사학과)
- 토론자 :
장규식 교수(중앙대 사학과)
이봉원 운영위원장(민족문제연구소)
장세윤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
하유성 보훈처 현충시설과장
http://www.kopogo.com/main.php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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