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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연합뉴스] 유럽 종교개혁지 탐방. 루터의 흔적을 따라서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광장에 세워진 얀 후스의 동상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오직 믿음'으로 되돌아가는것"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보름스<독일>=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

대부분의 관광객은 매시 정각 인형이 움직이는 시청사의 천문시계를 보려고 이곳을 찾지만 이곳 광장에는 개신교도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동상이 있다.

광장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 동상은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다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한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1369~1415)의 순교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것이다.

체코어로 '거위'라는 의미의 후스는 죽을 당시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이지만 100년 후 백조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100년 후 독일에 마르틴 루터(1483~1546)라는 '백조'가 나타남으로써 실현됐다.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전경(왼쪽)과 루터가 95개조 명제를 내걸었던 교회의 정문



종교개혁 500년인 2017년을 앞두고 유럽 종교개혁의 흔적을 더듬어 간 이번 순례는 루터의 생애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독일 작센주(州)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비텐베르크를 찾았다. '루터의 도시'(Lutherstadt)라는 안내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는 온통 루터의 이야기로 가득한 도시다. 인구 2만여명의 소도시지만 한 해 20여만명 이상이 이곳을 찾아 루터의 흔적을 되짚는다고 한다.

시내 중심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비텐베르크 성(城)교회가 있다. 바로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루터가 면죄부 판매 등이 이뤄지는 등 종교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난 로마 가톨릭의 현실을 고민하다 '95개조 명제'를 내걸었던 바로 그 현장이다. 이제는 검은색 문에 새겨진 95개조 명제가 이곳이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말해준다.

1524년부터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변한 작은 교회의 내부에는 곳곳에 루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제단 앞에는 루터가 숨진 아이스레벤에서 옮겨온 루터의 묘가 있고 루터의 모습을 새긴 동판이 자리 잡고 있다. 루터의 묘 옆에는 '루터교 종교개혁의 2인자'로 불리며 루터와 함께 활동했던 또다른 종교개혁가 멜랑히톤도 잠들어있다.

이곳에서 비텐베르크 성교회 안내자로 활동하다 은퇴한 베르나르트 그룰(75)을 만났다. 독일 신학자들에게 교회를 안내하던 그룰은 "비텐베르크 성교회는 신앙과 믿음의 개혁이 이뤄지게 된 시발점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적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교회에서 5분쯤 걸어가면 커다란 참나무가 나타난다. 1520년 12월 루터가 교황에게서 받은 파문장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참나무를 심었던 현장이 지금은 '루터의 참나무'라는 이름으로 관광객을 맞고 있다.

참나무 인근에는 지금은 루터박물관으로 변한 루터의 집이 자리잡고 있다. 루터가 수녀였던 카트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 생활하던 곳으로, 당시 궁정화가였던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초상과 당시 판매됐던 면죄부, 95개조 명제 등 종교개혁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잘 보존돼 있다.

루터가 태어나고 숨을 거뒀던 아이스레벤에 세워진 루터의 동상(왼쪽)루터가 신분을 숨기고 숨어살던 바르텐부르크성에 보존된 루터의 방. 루터는 이곳에서 헬라어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름없는 젊은 독일 사제의 외침은 처음에는 교계에서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루터가 다른 신학자들과 하이델베르크와 라이프치히 등에서 신학논쟁을 벌인 후 루터에 대한 견제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1521년 서부 보름스에서 제국회의가 소집돼 루터가 소환됐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자신이 쓴 책의 오류를 인정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와 선제후(황제를 선출하는 제후)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루터가 이 말을 했던 제국회의장은 이제는 보름스 대성당 뒤의 들판으로 변했고 현장을 증언하는 작은 석판만이 루터의 신념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후스가 그랬던 것처럼 신념을 지킨 대가는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터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종교개혁의 정신을 끝까지 전파했다.

보름스에서 동쪽으로 270여km를 달리면 작은 마을 아이제나흐에 도착한다. 이곳 외곽의 바르텐부르크성은 1521~1522년 루터가 자신의 후원자였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으로 신분을 숨기며 숨어 살던 곳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바르텐부르크성에는 아직도 루터가 생활했던 방이 보존돼 있다. 책상 하나 놓인 이곳에서 그는 헬라어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널리 보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루터는 1522년 다시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설교를 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알리다 고향인 아이스레벤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아이스레벤에는 루터의 생가와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았던 페트리 파울리 교회,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안드레아 교회 등이 지금도 남아있다.

보름스 제국회의가 열렸던 현장을 알리는 석판



면죄부 판매 등으로 타락해가던 현실을 비판하고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을 강조하며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루터의 개혁 정신은 종교개혁 500년을 앞둔 오늘날 '돈선거' 논란 등으로 시끄러운 한국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신국일 목사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정신이었다"라며 "그것이 희생과 피해를 감수했던 종교개혁의 의미"라고 말했다.


스위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 안에 있는 종교개혁가 4인의 부조상. 왼쪽에서 두 번째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장 칼뱅의 부조상이고 맨 오른쪽 상이 장로교의 기틀을 확립한 존 녹스다.



"종교개혁 정신 아직 유효".."한국 교회, 다시 본질로 돌아가야"

(하이델베르크ㆍ제네바ㆍ취리히=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마무리되어가던 16세기. 스위스에서는 또 다른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일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던 비텐베르크였다면 스위스 종교개혁은 장 칼뱅(1509~1564)이 설교했던 제네바에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 8일(현지시각) 제네바 남쪽에 있는 바스티옹 공원. 산책하는 시민들 사이로 거대한 부조상이 눈에 들어왔다. 종교개혁가 4명의 모습을 새긴 이 부조상 중 왼쪽에서 두 번째 있는 인물이 바로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칼뱅이다. 칼뱅은 바스티옹 공원 인근에 있는 상-피에르 교회에서 설교하며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시도했다.

루터보다 20여년 늦게 태어난 칼뱅의 행적은 여러모로 루터와 비교된다. 루터가 교황과 교황청에 맞선 개혁을 시도했다면 칼뱅은 이미 어느 정도 루터의 영향으로 개혁된 제네바에서 또 다른 의미의 개혁을 시도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에 맞서 종교와 세속의 분리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칼뱅의 종교개혁은 제네바를 이른바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칼뱅은 교회의 헌법이 그대로 세속 사회에 적용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종의 교회감독법원을 만들어 일반인들이 신앙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했고 그 결과 당시 제네바에는 사치와 방종이 규제되고 댄스홀이 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는 루터파 교회보다 더욱 엄격한 가치를 추구한다.

장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설파했던 제네바 상-피에르 교회



엄격한 가치를 추구하는 하나의 전형적인 예는 교회의 장식이다. '모든 것이 우상화될 수 있다'라는 이유로 일체의 성상을 금지하는 정신에 따라 개혁파 교회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루터파가 득세했던 독일에서 개혁파 교회의 중심지였던 하이델베르크의 성령교회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중심가에 자리 잡은 유서깊은 이 교회에는 원래 성당으로 만들어졌을 때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장식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전통은 한국 개신교에도 이어져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 대신 십자가만이 예배당에 걸려 있다.

칼뱅은 또 새로운 교회 직제를 만들었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대표되는 이 직제에서 장로들이 목사와 함께 공동체의 질서를 관리하도록 한 것이 오늘날 장로교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칼뱅주의는 이후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바스티옹 공원 부조상 중 한 명인 존 녹스에 의해 오늘날의 '장로교'로 체계화된 뒤 미국 등으로 퍼져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제네바와 함께 스위스 종교개혁의 한 축을 이루는 도시는 취리히다. 루터보다 한 살 아래로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사제였던 훌드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이끌며 칼뱅으로 이어지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반을 닦았다.

루터와 같은 세대였지만 츠빙글리는 전례에 쓰이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루터와 대립했다. 그 결과 세력을 넓혀가던 루터파 교회는 스위스에서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 채 칼뱅파 교회가 확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루터로 시작해 칼뱅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종교개혁은 기독교가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 그리고 다시 신교 내 루터파와 개혁파 교회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결과의 형태와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개혁을 위해 나섰던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은 루터가 95개조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내건 지 50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독일 개혁파 교회의 중심인 하이델베르크의 성령교회



종교개혁지를 둘러본 한 목사는 "종교개혁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믿음에서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순례였다"라며 "한국 교회도 다시금 본질로 돌아가야 진정 국민에게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의 신국일 목사는 "오늘날이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당시와 같은 부패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하다"라며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앞두고 신앙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려는 종교인들 사이에서 종교 개혁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zitron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