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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서울경제] 유럽 종교개혁 그 성지를 가다.


"면죄부 팔지말라" 외친 교회 해마다 20만명 순례객 발길
"오직 믿음뿐… 성경 본질로" '95개조 명제' 동판문 각인
종교개혁 500주년 앞둔 오늘날 교회·신앙인에 교훈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아이스레벤·
브룸스(독일)=조상인기자 ccsi@sed.co.kr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크 성교회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당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등 문제점을 지적한 '95개조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붙였다. 교황청은 진노했고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사건'은 번져갔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오는 2017년이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이 특별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종교개혁 관련 지역들은 2008년 9월부터 '10년 준비 사업'에 착수했다.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오직 믿음 뿐(fide sola)"을 외친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의 여정을 되짚어봤다.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성지순례단과 함께한 이번 탐방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종교개혁의 전주곡은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체코 출신의 얀 후스(1369~1415)가 먼저 울렸다. 그는 면죄부 판매 중단을 주장하다 콘스탄츠공의회 의결로 1415년 화형당했다. 관광지로 유명한 체코 프라하 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동상이 바로 후스다. 처형 당시 후스는 자신의 이름이 체코어로 '거위'를 뜻하는 것에 빗대 "지금 당신들은 거위 한 마리를 태워 죽이지만 백 년 뒤 백조가 나타나리라"는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100년이 지난 1517년에 '백조'처럼 루터가 나타났다.

독일 작센주(州) 라이프치히에서 차로 1시간 반 달리면 '루터의 도시(Lutherstadt)' 비텐베르크에 닿는다. 인구 2만명의 소도시지만 루터가 '95개조 명제'를 붙였던 시내 중심부 비텐베르크 성교회를 방문하는 순례객은 연간 20만 명 이상이다. 1524년 카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전환됐고 당시 루터의 논제는 동판문에 각인돼 영구히 남아 있다.

문 상부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그림은 보통 그림과 달리 눈을 뜬 채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형상이다. 교회의 각성과 개혁의 바람을 은유한다. 성교회의 안내자로 평생을 바친 베르나르트 그룰(75) 씨는 "비텐베르크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정신적 문화재'"라며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들은 내면적인 변화와 신앙을 향한 개선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교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루터의 참나무'가 있다. 루터가 15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파문장을 불태운 후 참나무를 심었던 현장이다. 근처에 루터가 살던 집은 루터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성직자의 독신 수도를 반대한 루터는 수녀였던 카트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 이곳에 살았다. 박물관에서는 작센 주의 궁정화가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의 초상과 제단화, 당시 판매됐던 면죄부, 종교개혁 확산에 쓰인 판화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파문장을 불태운 루터는 하이델베르그와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신학논쟁을 벌이며 신앙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름없는 젊은 사제의 외침은 처음에 그다지 반향이 없었으나 점차 확산되면서 결국 1521년 독일 서부 보름스에서 제국회의가 열렸다. 보름스대성당에 불려온 루터는 성당 뒤편의 제국회의장에서 황제 카를5세와 선제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루터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Ich stehe hier, helfe mir, Gott!)"라는 말로 신념을 지켰다. 비장했던 당시 상황을 작은 석판이 증언하고 있다.

목숨까지 위태로진 루터는 그를 지지하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으로 구출됐고 루터는 신분을 숨긴 채 보름스에서 270km 떨어진 아이제나흐에서 숨어지냈다. 루터가 이 지역 외곽 바르텐부르크 성에서 헬라어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덕분에 성경은 성직자의 전유물에서 평신도들에게까지 보급됐고 종교개혁의 정신은 빠르게 확산됐다. 그가 집필하던 책상과 작은 방은 지금까지 보존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성경 번역을 끝내고 152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평생 종교개혁 정신을 전파하다 고향인 아이스레벤에서 생을 마쳤다. 루터의 생가와 그가 서거한 집, 마지막 설교를 한 안드레아교회 등은 관광명소가 됐다.

루터로부터 시작돼 '믿음' 그 자체만을 강조한 개혁정신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에게도 반성을 주문한다.



[유럽 종교개혁 그 성지를 가다] <하> 2차 종교개혁 칼뱅의 제네바, 한국 교회의 뿌리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오늘의 교회 되새겨볼때
칼뱅, 교회의 순결성 강조 목사·장로·집사 직제 만들어
교회 운영의 민주화 추구도
"권력·물질화 오명 한국교회 사명 되찾는 거울로 삼아야"

제네바ㆍ취리히(스위스)=조상인기자 ccsi@sed.co.kr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며 성경에 충실한 믿음을 강조한 마르틴 루터는 독일 각지에서 공개 교리논쟁을 벌였고 그의 문제 제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보다 한 살 아래인 스위스의 훌드리히 츠빙글리(1484~1531) 역시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이라 주장하며 교회 개혁에 나섰다. 분당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의 성지순례단을 따라 츠빙글리가 사제였던 취리히 구시가지의 그로스뮌스터대성당 앞에 다다랐다. 츠빙글리가 설교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현장이다.

육중한 로마네스크양식의 건물과 치솟은 고딕의 쌍탑이 위엄을 과시한다. 종교개혁 초기 츠빙글리에게는 구교(舊敎)의 압박도 이와 같았으리라. 리마트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프라우뮌스터교회에도 츠빙글리의 개혁의지가 서려 있다. 이곳에는 사랑과 종교를 화두로 작업했던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의 오색(五色)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일 뿐 장식 없이 소박하다.

츠빙글리는 전례에 쓰이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 해석을 두고 루터와 대립했다. 또 당시 지역경제의 주축이던 '용병 수출'을 반대해 정치적으로도 고립됐다. 결국 그는 종교전쟁인 카펠전쟁에 나가 40대의 한창 나이에 전사했다. 바서키르케(물교회) 앞에는 칼을 찬 츠빙글리의 동상이 시민들을 마주한다.

츠빙글리의 개혁정신은 25년 후 태어난 2세대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가톨릭 교회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간 칼뱅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전개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말을 남긴 그는 엄격하게 교회의 순결성을 강조했다.

종교개혁가 칼뱅은 제네바 성 피에르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교회의 법과 세속의 제도가 일치하는 삶을 강조했다.



제네바 구시가지의 성 피에르 교회. 뾰족한 첨탑으로 도시 어디서든 눈에 띄는 이곳에서 칼뱅은 제네바의 첫 설교를 시작했고 생애 마지막 교리도 설파했다. 교황청에 대항한 루터가 종교와 세속의 분리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칼뱅은 교회의 법이 세속 사회까지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종의 교회감독 법원을 만들어 시민들을 통제하며 엄격한 신앙생활과 실천을 요구했다.

우상화를 우려해 일체의 성상도 금지했다. 이 때문에 칼뱅의 개혁파 교회에는 십자가 외에 장식이 없다. 이런 전통은 한국 개신교도 계승했다. 칼뱅은 또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새로운 교회 직제를 만들었다. 성직자의 독단을 견제하고 교회 운영의 민주화를 추구한 제도다. 칼뱅주의는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1514~1572)에 의해 '장로교'로 체계화됐고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 감리교와 함께 개신교 교단의 주류로 뿌리내렸다.

스위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 안에 조성된 종교개혁 기념비. 왼쪽부터 파렐, 칼뱅, 베자, 녹스 순이며 이들 양쪽으로 각 3명씩 총 10명의 종교개혁가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성 피에르 교회 인근의 바스티옹 공원에는 1917년에 완성된 종교개혁기념비가 있다. 칼뱅ㆍ츠빙글리 등 10명의 종교개혁가들이 돌에 새겨져 오늘의 우리를 바라본다. 권력화ㆍ물질화를 비롯한 대내외 갈등의 오명을 쓴 한국 교회가 신앙적 성숙과 종교 본연의 사명을 되찾는 거울로 삼아야 할 이들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내면의 외침과 시대적 요구를 동시에 부합시켰기에 이들의 개혁이 성공했음을 한국 교회는 새삼 되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