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터와 비텐베르크城 교회
마르틴루터
5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옛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에서 차량으로 1시간 남짓 떨어진 이곳은 종교개혁의 대명사 마르틴 루터(1483∼1546)로 기억되는 도시다. 쌀쌀한 날씨 속에 교회 앞에 있던 서너 명이 검은색 동판을 가리키며 다소 들뜬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기독교를, 나아가 세계사를 바꾼 것으로 평가받는 루터의 95개항 논제를 새긴 동판이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면죄부 판매 등으로 극심한 타락에 빠진 로마 교황청을 향해 “참된 참회가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면죄부가 없어도 그에게 부여되는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는다”고 외쳤다. 본인은 물론이고 연옥에 빠진 부모를 천국으로 이주시킬 수 있다는 ‘초강력 면죄부’마저 나돌던 때였다. 루터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의 자취를 따라 종교개혁의 이면을 취재했다.
○ “루터도 예상하지 못했다”
종교사적 중요성에 비하면 오히려 단출해 보이는 교회 바닥에는 루터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서 만난 루터교회 신자 하이디 투블러 씨(24·남아프리카공화국)는 “루터는 인류에 종교의 자유를 안겨준 용기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은퇴 목사로 이곳을 안내하고 있는 벤하르트 구울 씨(75)는 “매년 20만 명 이상이 이곳을 찾는다. 이 교회야말로 루터로 상징되는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라고 말했다.
법학을 공부하다 신학으로 길을 바꾼 34세의 시골 신부는 세상을 지배하던 교황청을 상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루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논제들을 교회에 붙인 것이 전면적인 투쟁의 신호는 아니었다. 취재를 동행한 프랑크푸르트 근교 슈발바흐 성령교회 신국일 목사(56)는 “논제를 교회에 붙이는 것은 ‘한번 토론해 보자’는 당시 관행”이라며 “어쩌면 루터 스스로도 95개 논제가 거대한 종교개혁의 불씨가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그의 주장을, 당시로서는 너무나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전파했다. 신앙의 개혁을 주장하는 이 종이들은 교회 중심의 세계를 흔드는 폭탄이 됐고, 어쩔 수 없이 그는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다.
○ 번개 속의 서원(誓願)과 탑의 깨달음
루터가 95개항 논제를 내걸었던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지금도 매년 20만 명 이상이 이곳을 찾아 인류에 종교의 자유를 안겨준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비텐베르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왼쪽), 비텐베르크 성 교회 바닥의 마르틴 루터 무덤.(오른쪽)
루터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교회와의 싸움을 이끈 인물답지 않게 심약했다. 신부가 된 계기도 그랬다.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난 그는 번개가 바로 옆을 때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려준다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6일 찾은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틴 수도원. 수도사 루터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수도사들에게는 자기 소유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금욕적 생활을 위해 하루에 두 번 맥주와 빵 한 조각만 주어졌다. 번개, 즉 죽음에 대한 체험적 공포로 인해 인생을 바꾼 그는 이 시기에 하나님이 행하는 ‘의(義)’, 즉 심판하는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513∼1515년 수도원 탑의 한 방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한번은 내가 이 탑 속에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의’에 대해 깊이 묵상했을 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다.”
그는 1532년 ‘탁상담화’를 통해 무섭게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납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가 종교개혁의 십자가를 지게 된 신앙적 이유다.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라는 명제를 따랐다. 자신의 신학적 믿음을 회개와 반성으로 다지는 삶의 연속이었다. 교회의 물질화와 권력화로 세상의 염려를 받고 있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계가 돌아봐야 할 개신교 신앙의 원형이다.
○ 주여, 나를 도우소서!
루터에 앞서 보헤미아에는 종교개혁을 주장하다 화형당한 얀 후스(1369∼1415)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마지막 순간 “거위는 죽지만 100년 뒤에는 백조가 난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후스라는 이름의 어원이 거위이고, 100여 년 뒤 95개 논제를 주장한 루터는 백조라는 해석이 나온다. 아이슬레벤의 루터 생가에도 이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물이 전시돼 있다.
1520년 6월 파문 칙서를 받은 루터는 이듬해 4월 신성로마제국의 보름스 제국회의에 출석한다. 여기서도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종교적 죽음에 이어 법률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는 세속적인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후스와 달리 교황권에 맞서던 제후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도움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제후가 모여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터이지만 현재의 보름스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작은 표지석만 남아 있었다.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뒤 남긴 그의 말은 500년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요즘에도 유효하다.
“저는 어떠한 것도 취소할 수 없으며 할 의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 행동하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며 구원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아이슬레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 칼뱅-츠빙글리와 스위스
루터와 츠빙글리의 한 세대 뒤인 칼뱅의 길을 따르는 교회는 이후 칼뱅주의적 개혁교회로 불렸고 그의 사상은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장로교의 신학적 기초가 됐다. 물량 위주의 세속화와 분열, 배타적인 신앙관에 따른 이웃 종교와의 갈등과 기복신앙의 늪에 빠져 있는 2011년 일부 개신교계의 현 주소를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칼뱅의 종교개혁에 대한 신념은 “교회는 늘 개혁돼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27세에 개신교계의 명저로 꼽히는 ‘기독교 강요’ 초판을 완성한 칼뱅은 1536년 기욤 파렐의 요청을 받아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주도한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 기념비를 찾았다. 파렐, 칼뱅, 테오도뤼스 베자, 존 녹스의 순으로 이 도시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거대한 부조가 있다. 칼뱅은 날카로워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신앙에서도 타협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예정론은 구원뿐 아니라 멸망까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서 출발한다. 면죄부 판매 등으로 극심한 타락상을 보인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철저한 개혁 대상이었다.
칼뱅은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가 세속 정치에서도 지켜지는 일종의 신정(神政) 세계를 꿈꿨고 1537년 제네바 교리문답을 발표해 시민들의 경건한 생활을 유도했다. 또 교회직제를 목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해 평신자의 공동체 참여를 유도하는 장로교 전통의 원형을 만들었다.
취재를 동행한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 신국일 목사는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뱅에 의해 체계화되고 실천됐다”며 “종교개혁의 의미는 시대를 막론하고 되새겨야 할 가치인데 칼뱅의 정신을 잇고 있다는 한국 교회가 500년 뒤 세속적인 성공 외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신앙의 기준은 오직 성경”
취리히 시의 리마트 강가에 있는 츠빙글리의 동상을 이튿날 찾았다. 루터보다 1년 늦게 태어난 그는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종군목사로 참전했다. 그래서 그의 동상은 성경 대신 큰 칼을 쥐고 있다. 스위스는 지금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 달러가 넘는 부국이지만 츠빙글리 당시에는 가난에 찌든 지역이었다. 가장 확실한 돈벌이는 용병이었다.
1518년 취리히 시의 목회자로 선출된 츠빙글리는 타락한 종교로부터 억압받는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으로 교회 갱신과 사회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개혁의 시초는 용병 금지였다. 그 대신 십일조 헌금과 세율을 인하해 서민의 부담을 줄였다. 교회의 성화와 성상을 철폐했고 예배도 의식 대신 설교 중심으로 바꿨다. 루터와는 성만찬 논쟁 때문에 1529년 갈라선다. 1531년 가톨릭 도시들의 반발로 전쟁이 벌어지자 군목으로 참전한 그는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터에서 칼뱅까지 종교개혁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가톨릭은 이후 뼈를 깎는 개혁을 시작했다. 예수회는 적극적인 선교와 청빈의 삶으로 가톨릭의 새로운 수호자가 됐고, 가톨릭의 개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58∼1963년)를 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뱅의 말처럼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하며, 이를 멈추면 낡은 수레바퀴에 깔린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심지어 종교가 세속까지 통치해야 한다는 신앙관을 반복한 칼뱅도 예외가 아니었다. 권위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낮춘 세상과의 소통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계에 절실한 이 시대의 소금이다.
6일 찾은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틴 수도원. 수도사 루터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수도사들에게는 자기 소유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금욕적 생활을 위해 하루에 두 번 맥주와 빵 한 조각만 주어졌다. 번개, 즉 죽음에 대한 체험적 공포로 인해 인생을 바꾼 그는 이 시기에 하나님이 행하는 ‘의(義)’, 즉 심판하는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1513∼1515년 수도원 탑의 한 방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한번은 내가 이 탑 속에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의’에 대해 깊이 묵상했을 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다.”
그는 1532년 ‘탁상담화’를 통해 무섭게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납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가 종교개혁의 십자가를 지게 된 신앙적 이유다.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라는 명제를 따랐다. 자신의 신학적 믿음을 회개와 반성으로 다지는 삶의 연속이었다. 교회의 물질화와 권력화로 세상의 염려를 받고 있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계가 돌아봐야 할 개신교 신앙의 원형이다.
○ 주여, 나를 도우소서!
루터에 앞서 보헤미아에는 종교개혁을 주장하다 화형당한 얀 후스(1369∼1415)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마지막 순간 “거위는 죽지만 100년 뒤에는 백조가 난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후스라는 이름의 어원이 거위이고, 100여 년 뒤 95개 논제를 주장한 루터는 백조라는 해석이 나온다. 아이슬레벤의 루터 생가에도 이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물이 전시돼 있다.
1520년 6월 파문 칙서를 받은 루터는 이듬해 4월 신성로마제국의 보름스 제국회의에 출석한다. 여기서도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기다리는 것은 종교적 죽음에 이어 법률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는 세속적인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후스와 달리 교황권에 맞서던 제후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도움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제후가 모여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터이지만 현재의 보름스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작은 표지석만 남아 있었다.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뒤 남긴 그의 말은 500년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요즘에도 유효하다.
“저는 어떠한 것도 취소할 수 없으며 할 의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 행동하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며 구원을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아이슬레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 칼뱅-츠빙글리와 스위스
27세 칼뱅 “자기개혁 멈춘 교회는 타락”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로 상징되는 종교개혁의 또 다른 무대는 지금의 스위스다. 제네바를 중심으로 활동한 장 칼뱅(1509∼1564)과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가 그 주인공이다.》기욤 파렐, 장 칼뱅, 테오도뤼스 베자, 존 녹스(왼쪽부터)의 순으로 서 있는 스위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 기념비. 이들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으며 특히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종교개혁을 전파하는 사관학교가 됐다.
○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칼뱅의 종교개혁에 대한 신념은 “교회는 늘 개혁돼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27세에 개신교계의 명저로 꼽히는 ‘기독교 강요’ 초판을 완성한 칼뱅은 1536년 기욤 파렐의 요청을 받아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주도한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 기념비를 찾았다. 파렐, 칼뱅, 테오도뤼스 베자, 존 녹스의 순으로 이 도시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거대한 부조가 있다. 칼뱅은 날카로워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신앙에서도 타협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예정론은 구원뿐 아니라 멸망까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서 출발한다. 면죄부 판매 등으로 극심한 타락상을 보인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철저한 개혁 대상이었다.
스위스 취리히 시 리마트 강가에 있는 울리히 츠빙글리의 동상. 군목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 참전했던 그의 동상에는 성경 대신 긴 칼이 들려 있다.
취재를 동행한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 신국일 목사는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뱅에 의해 체계화되고 실천됐다”며 “종교개혁의 의미는 시대를 막론하고 되새겨야 할 가치인데 칼뱅의 정신을 잇고 있다는 한국 교회가 500년 뒤 세속적인 성공 외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신앙의 기준은 오직 성경”
취리히 시의 리마트 강가에 있는 츠빙글리의 동상을 이튿날 찾았다. 루터보다 1년 늦게 태어난 그는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종군목사로 참전했다. 그래서 그의 동상은 성경 대신 큰 칼을 쥐고 있다. 스위스는 지금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 달러가 넘는 부국이지만 츠빙글리 당시에는 가난에 찌든 지역이었다. 가장 확실한 돈벌이는 용병이었다.
1518년 취리히 시의 목회자로 선출된 츠빙글리는 타락한 종교로부터 억압받는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으로 교회 갱신과 사회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개혁의 시초는 용병 금지였다. 그 대신 십일조 헌금과 세율을 인하해 서민의 부담을 줄였다. 교회의 성화와 성상을 철폐했고 예배도 의식 대신 설교 중심으로 바꿨다. 루터와는 성만찬 논쟁 때문에 1529년 갈라선다. 1531년 가톨릭 도시들의 반발로 전쟁이 벌어지자 군목으로 참전한 그는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터에서 칼뱅까지 종교개혁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가톨릭은 이후 뼈를 깎는 개혁을 시작했다. 예수회는 적극적인 선교와 청빈의 삶으로 가톨릭의 새로운 수호자가 됐고, 가톨릭의 개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58∼1963년)를 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뱅의 말처럼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하며, 이를 멈추면 낡은 수레바퀴에 깔린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심지어 종교가 세속까지 통치해야 한다는 신앙관을 반복한 칼뱅도 예외가 아니었다. 권위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낮춘 세상과의 소통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계에 절실한 이 시대의 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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