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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문화일보] 유럽 종교개혁 성지를 가다.


“진리를 들으라, 수호하라” 목숨 건 외침 들리는 듯
(上) 체코 프라하-얀 후스

프라하 중심가에 있는 종교 개혁가 얀 후스의 동상

2017년은 루터가 1517년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발표하며 종교 개혁의 불을 댕긴 지 500년이 되는 해여서 개신교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개신교계도 교회의 세속화, 물질주의 등으로 비판받고 있는 최근의 상황을 되돌아보며 성찰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교황의 면죄부를 비판하다 화형당한 얀 후스의 정신이 서린 체코 프라하와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의 유적지가 있는 독일 비텐베르크 등 체코, 독일, 스위스의 종교개혁 현장 탐방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종교개혁의 기운, 루터 100년 전에 체코 프라하에 있었다. 

 유럽 개신교계는 최근 대표적 종교 개혁가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오는 2017년의 종교 개혁 50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3일부터 9일까지 유럽의 종교 개혁 유적지를 탐방했다. 경기 용인시 죽전동에 자리하고 있는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순례단과 함께한 종교 개혁지 순례의 첫번째 방문지는 체코 프라하였다.

체코 프라하 비투스 대성당의 화려한 문양은 중세 유럽 가톨릭의 위용을 대변한다.

각종 건축 양식의 박물관이라 불리며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프라하가 종교 개혁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프라하는 루터가 활약했던 독일의 비텐베르크보다 100년 앞서 종교 개혁의 기운이 일었던 도시다. 프라하 중심가인 옛 시청 옆 광장에서 종교 개혁을 설파하다가 화형을 당한 얀 후스(1369~1415)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후스의 동상은 그가 사제로 일하며 과감하게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던 틴(Tyn) 성당의 첨탑을 바라보고 있다.

순례단과 함께 이곳 광장을 처음 찾았던 밤엔 3월 초인데도 한겨울처럼 칼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달려들었다. 순례단 중의 한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외치다가 순교한 후스의 기상이 서린 바람이니 감내하자”고 농반진반의 말을 하자, 일행 모두 공감의 웃음을 터트렸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교회권위 도전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 = 이튿날 낮에 광장을 다시 찾았을 때는 햇살이 쪼속쪼속 내리는 가운데 세계 각국에서 찾아든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관광객들은 옛 시청 건물에 붙어 있는 500여년 전의 천동설 시계를 보러 왔다가 후스의 동상과 틴 성당도 함께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고색창연한 건축물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프라하는 후스로 인해 종교 개혁 성지역할도 하고 있는 셈이다.

14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이 지배한 보헤미아 지역에서 태어난 체크족 출신의 후스는 ‘종교 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4~1384)의 사상을 이어받아 성직 매매에까지 이른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쳤다. 1402년 베들레헴 성당의 신부가 되면서 설교를 통해, 또 프라하대의 교수를 겸하면서 강의와 논문으로 교회의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종교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죄를 면하게 해 준다며 돈을 끌어모으는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중지되고, 교회의 중요한 의식인 성만찬식 때 사제들에게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포도주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후스의 주장들은 당연히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시됐으나 그는 베들레헴 성당에서 계속 설교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종교 개혁 설교를 펼친 베들레헴 성당은 후에 개신교 교회가 됐다. 프라하 옛 시가지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에 가 보니, 후기 고딕 양식 건물의 예스러운 위엄이 600여년 세월을 건너뛰어 후스의 목소리를 전해주기에 충분했다.

◆후스의 종교개혁 정신 한국교회 세속화에 성찰 = 15세기 초엽에 후스는 교황과 대주교로부터 파문장을 받았으나, 체코 왕의 형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지기문트 등의 지지를 업고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기문트는 교황청이 후스를 압박하자 그에 대한 지지를 거뒀고, 결국 후스는 감옥에 갇힌 끝에 사악하고 미친 이단으로 정죄돼 화형을 당했다.

후스는 화형대에서 “지금은 거위(‘후스·Huss’의 이름 뜻)를 불에 태워 죽이지만 100년이 지나지 않아 백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은 16세기에 루터가 나타나 종교 개혁을 강력하게 추동함으로써 실현됐다.

이번 순례단을 안내한 신국일(독일 프랑크푸트르 인근 슈발바흐 교회) 목사는 “교황의 권위가 막강했던 15세기 초에 성경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펼쳤던 후스의 개혁 정신은 오늘날 세속화, 대형화의 문제를 일부 야기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큰 성찰을 줄 것”이라며 “개혁에는 희생이 따르고, 또 그래야만 진정한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 라고 말했다.

후스의 동상 뒤편엔 그가 죽기 직전에 설파했다는 ‘진리에 대한 7가지 제언’이 체코어로 새겨져 있다.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수호하라.’



교회 파문장 불태우고 심은 ‘루터 참나무’가 개혁의 기수처럼…
<下> 독일 비텐베르크-마르틴 루터

비텐베르크에는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의 파문장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심었다는 참나무가 여전히 자라고 있다

종교 개혁의 대표적 인물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유적은 독일 남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루터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가는 길에 옛 동독의 큰도시 라이프치히(Leipzig)에 들렀다. 루터가 평생 사제로 살겠다며 종신서원을 했던 성토마스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곳에서 사제로 복무하며 설교를 통해 종교 개혁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토마스교회를 찾았을 때 마침 성가대가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의 곡을 노래하는 콘서트가 있었다. 바흐는 이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며 음악사에 남는 수많은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교회 앞뜰엔 바흐의 동상이, 예배실 내부에는 그의 묘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 만난 비텐베르크의 성(聖)교회 내부에도 묘지가 있었다. 루터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그의 모습을 새긴 동판이 함께 있다. 이 교회는 1517년 루터가 교황청의 부패를 고민하다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문에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불을 댕긴 곳이다.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순례단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 유럽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교회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안내인 베른하르트 구르(Bernhard Gruhl·75)씨는 “이 교회는 종교 개혁의 정신적 문화재”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독일 아이제나흐 바르텐부르크성에는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숨어 살면서 성경을 번역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비텐베르크는 2만여명이 사는 작은 도시지만, 해마다 2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시는 루터가 수녀인 카트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2)와 결혼해 생활하던 집에 기념관을 지어 이곳이 종교 개혁 성지임을 알리고 있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루터의 참나무’가 있다. 루터가 1520년 12월 교황에게서 받은 파문장을 불태우고 그 자리에 참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비텐베르크에서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건 루터의 동지인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을 비중 있게 기념하고 있는 것이었다.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대학의 헬라어 교수였을 때 동료였던 루터를 만나 신학적으로 감화를 받고 종교 개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헌신했다. 각종 서적을 통해 성경이 담고 있는 복음의 진실을 전파한 그는 ‘독일 전체의 교수’로 불리기도 한다.

비텐베르크 시청 앞 광장에서 루터의 동상 옆에 멜랑히톤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그의 묘지는 성교회 루터 묘지 옆자리에 똑같은 크기로 마련해 놓았다. 그가 살았던 집 역시 기념관으로 만들어져 있다. 멜랑히톤 기념관은 2017년 종교 개혁 500주년에 앞서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16세기의 루터가 그보다 앞선 종교 개혁가들과 달리 자신의 주장을 실천적으로 확산시키며 세계 종교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건 당시 정치적 힘을 가진 제후들의 지지와 더불어 멜랑히톤과 같은 동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교황청의 갖은 압력에 굴하지 않은 루터 자신의 의지가 종교 개혁을 이룬 가장 큰 힘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루터는 그림으로 전해져 오는 다소 험상궂은 인상과 달리 매우 심약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벼락을 만났다가 자신을 살려 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다. 비텐베르크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가면 나오는 아이슬레벤(Eisleben)에는 루터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잠시 살았던 흔적들을 담은 생가 기념관이 있다. 아이슬레벤 인근 에르푸르트(Erfurt)에는 루터가 신실하게 공부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과 신부 서품을 받은 대성당이 있다.

에르푸르트 서쪽에 있는 아이제나흐(Eisenach)는 루터가 공부한 신학교가 있던 도시. 교회 음악의 대가인 바흐가 태어난 도시이기도 하니, 루터와 바흐의 인연이 재미있다. 루터가 하숙을 했던 집 앞엔 그가 일기에 썼다는 말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오늘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1632~1677)의 말과 비슷한 이야기를 루터가 신학생 시절에 했다는 것이 사뭇 흥미로웠다.

아이제나흐의 바르텐부르크성(城)은 루터가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살며 헬라어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곳. 루터는 1521년 보름스(Worms) 대성당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소집돼 자신이 쓴 책의 오류를 인정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거부했다. 보름스 대성당 뜰에 ‘루터가 여기 서 있었다’는 글씨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보름스 제국회의 이후 루터가 목숨을 위협받게 되자, 그를 지지했던 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납치하는 것처럼 꾸며 바르텐부르크성에 숨겨 줬다. 성에는 아직도 루터가 생활했던 방이 보존돼 있다. 궁벽진 곳에서 외롭게 생활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성경을 번역했던 그의 모습을 뚜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 순례단의 한 성직자는 “하나님께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 평생 회개하며 산 루터의 흔적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자는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새삼 되새겼다”고 했다. 비텐베르크·아이슬레벤 =



스위스 제네바·취리히 제 2의 종교 개혁 성지
칼뱅·츠빙글리의 역사가…
국제기구들이 많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Geneva)는 개신교인들에겐 칼뱅(John Calvin·1509~1564)의 도시이기도 하다. 프랑스 출신의 칼뱅은 이곳에서 제 2의 종교 개혁 운동을 강력하게 펼쳤다.

제네바 중심가에는 칼뱅이 설교를 한 후에 개신교의 성소가 된 생피에르교회가 있다. 그 근처 바스티옹 공원에서는 거대한 종교 개혁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종교 개혁가 4명을 기념하고 있는 조상(彫像)은 왼쪽부터 칼뱅, 파렐(Guillaume Farel·1489~1565), 베자(Theodorus Beza·1519~1605), 녹스(John Knox·1514~1572) 순서로 서 있었다. 파렐은 개혁 운동에 몸을 바쳐야 한다고 칼뱅을 독려하고, 제네바 시의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취리히에서는 칼뱅보다 한 세대 앞선 종교 개혁가 츠빙글리(Ulrich Zwingli·1484~1531)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그로스뮌스터의 사제로 일하며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설교를 통해 유명해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 건물인 그로스뮌스터를 실제로 보니 고풍스러운 품격에 감탄이 절로 났다. 인상적인 건 그로스뮌스터의 정문 오른쪽에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1504~1575)의 조상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츠빙글리의 후임으로 취리히교회의 목사로 재직했던 그는 루터, 칼뱅 등과의 이론(異論)을 조정하며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칼뱅에겐 파렐이, 루터에겐 멜랑히톤이 있었던 것처럼 츠빙글리의 개혁주의는 불링거가 있기에 역사적 의미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새삼 알게 된 것이 이번 여정의 작은 성과였다.

제네바·취리히 =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