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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중앙일보] 유럽 종교개혁 500년, 그 현장을 가다.



1. 개혁의 밀알 - 체코의 후스
“면죄부 파는 교황은 유다” 후스 외침, 암흑을 깨다.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는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동상이 서 있다. 후스는 부패한 중세 교회에 반기를 들다가 화형을 당했다. 동상 오른편에 후스가 사제로 있었던 틴 성당이 보인다.


독일 정부에서 5년 전에 설문조사를 했다.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인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1위에 오른 인물은 괴테도, 베토벤도, 헤겔도, 히틀러도 아니었다.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중세 때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개신교’가 등장한 지 반(半) 1000년이 된다. 3~10일 500년 전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했다. 그들이 전하는 개혁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했다. 요즘 한국 교회를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3회 시리즈를 싣는다.

3일 체코의 프라하로 갔다. 1968년 민주화 시위 ‘프라하의 봄’으로 유명한 도시다. 종교개혁사에서도 프라하는 빼놓을 수 없다. 600년 전 이곳에서 미완의 종교개혁인 ‘중세의 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실패한 봄이었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밀알이 됐다.

프라하는 꽤 쌀쌀했다. 중세의 봄도 그런 추위 앞에서 고꾸라졌다. 그 자취를 좇아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으로 갔다. 외국 관광객 200여 명이 대형 시계탑 앞에 모여 있었다. 600년 전에 만든 시계다. 정오가 되자 종이 울렸다. 태엽 소리와 함께 ‘28초의 짧은 공연’이 시작됐다. 시계에 설치된 12사도와 해골 등 인형들이 저마다 메시지를 안고서 움직였다.

현지 가이드는 “해골은 죽음을, 해골이 들고 있는 모래시계는 삶의 유한성을 상징한다. 정오를 알리는 나팔소리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다”라고 설명했다. 거기서 중세 유럽이 보였다. 중세는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성직자든, 귀족이든, 농노든 마찬가지였다. “내 죄를 어떻게 풀 것인가?”는 당시 모든 이의 숙제였다. 그런 ‘숙제 의식’을 바탕으로 면죄부가 등장했다.

◆왜 면죄부가 팔렸을까=중세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다. 유럽 인구 중 거의 반이 죽었다. 중세인은 ‘흑사병이 전염병’임을 몰랐다. 죄로 인해 병에 걸리고, 죄로 인해 죽는 줄 알았다. 그 틈을 교회가 파고들었다. 로마 교황은 면죄부를 팔았다. 숱한 사람이 돈을 주고 그걸 샀다. 현대인에겐 ‘상식 밖의 일’이다.

 면죄부의 시초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교황은 “십자군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아울러 네가 지은 다른 죄까지 사해진다”며 면죄부를 발급했다. 면죄부는 전쟁을 위한 용도였다.

 시간이 흐르자 그게 악용됐다. 교황 요한 23세는 “누구나 면죄부를 살 수 있다. 조상을 위해 면죄부를 사도 된다. 그럼 죽은 조상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가게 된다”고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는 예수의 메시지와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그만큼 중세 가톨릭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했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신국일(프랑크푸르트 슈발바흐 성령교회 담임) 목사는 “한국에서 젊은이들이 결혼하면 무엇을 준비하나. 허리 졸라매서 내 집을 먼저 마련한다. 중세에는 젊은이든, 노인이든 돈을 벌어서 가장 먼저 할 일이 ‘면죄부 구입’이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면죄부는 뭘까. 행여 우리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21세기의 면죄부를 팔고 있는 건 아닐까. 금권 선거로 얼룩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교단 총회장 선거,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의 권력투쟁, 이권을 둘러싼 교회 내 분열과 갈등, 자식에게 세습을 했거나 세습을 준비 중인 덩치 큰 교회들 등등, 일부 한국 개신교계의 곪은 풍경이 역설적으로 ‘중세 가톨릭’에서 보였다.

◆얀 후스가 뿌린 씨앗=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을 걷다가 커다란 동상과 마주쳤다. 600년 전 프라하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얀 후스(1369~1415)다. 그는 프라하 대학 총장까지 지냈다. 동상은 광장 뒤편의 틴 성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코인들은 “저 성당에서 종교개혁이 탄생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후스는 교황을 정면 비판했다. 심지어 “면죄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유다는 예수를 유대인의 손에 팔아 넘겨 숨지게 했었다. ‘교황은 절대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설을 철칙으로 여기던 로마 가톨릭에선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발언이었다.

 그 용기의 뿌리는 어디였을까. 종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달을 봐야 한다. 예수를 보고, 그리스도를 봐야 한다. 그러나 손가락은 종종 달을 치운다. 그리고 스스로 주인공이 된다. 중세의 가톨릭도 그랬다. 예수를 치우고 교회가 주인공이 됐다. 후스는 그런 손가락과 싸웠다. 오직 예수, 오직 달을 보려고 했다.

 결국 교황은 후스를 파문했다. 후스의 저술은 불태워졌다. 대신 후스는 일부 귀족의 지지를 받았다. 프라하에서 그의 설교는 계속됐다. 당시 라틴어는 귀족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서민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성당의 미사와 강론은 라틴어로만 진행됐다. 후스는 거기에도 반기를 들었다. 체코어로 설교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후스는 대설교가가 됐다.

 후스의 동상 아래에 섰다. 찬 바람이 불었다. 묻고 싶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종교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목회자의 이름으로 예수를 가리고 있진 않은가. 예수는 늘 내가 무너질 때 사는 법이다. 종교개혁의 뿌리도 바로 그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예수로 돌아가자”는 중세 때의 외침도 그것이다. ‘교회’가 예수를 왜곡하는 굴절렌즈가 돼버렸으니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개신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다시 그 물음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 “행여 우리가 예수를 굴절시키던 중세의 렌즈가 돼있진 않은가” 하는 물음 말이다.

◆100년 안에 백조가 온다=신성로마제국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콘스탄스(독일 남부) 종교재판에 소환했다. 사람들은 “가면 죽일 것”이라고 말렸다. 황제는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 “이 땅에서 이단 정죄(定罪)가 사라지게 만들겠다”며 안전을 약속했다. 결국 종교재판 회의에 간 후스는 체포됐다. 석 달간 감옥에 갇혔다. 낮에는 걸어야 했고, 밤에는 벽에 묶여야 했다. 지독한 치질과 두통도 겪었다. 그리고 이단 정죄와 함께 화형 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16일, 후스는 화형장에 끌려 나왔다. 그는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정당성에 대해 설교했다. 황제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란 뜻이다. 화형대에 불이 붙기 직전 후스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지 않아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자신이 심은 개혁의 불씨가 100년 안에 거대한 불길로 타오를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실제 거의 100년 만에 ‘백조’가 나타났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다. 후스가 화형 당한 게 1415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게 1517년이다. 유럽은 물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루터는 지금도 독일에서 ‘백조(Swan)’로 불린다. 그 ‘백조’를 만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프라하=글·사진 백성호 기자

◆얀 후스=영국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던 체코의 종교개혁자.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교수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면죄부 판매 등에 대해 교황청에 반기를 들다가 파문당했다. 설교를 어려운 라틴어로 하지 않고 체코어로 바꾸는 등 파격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결국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순교 후 후스는 체코에서 민족의 영웅이 됐다.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독일의 루터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개혁의 꽃 - 독일의 루터

혁명가 루터, 벌 주는 하나님 대신 사랑의 하나님 설파하다

독일의 신학자들이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에서 루터의 흔적을 짚어보고 있다. 사진 오른쪽 아래에 루터의 묘가 보인다. 루터는 교회 안내인이 손으로 가리키는 설교대에서 기독교 정신의 근원을 설파했다.

 



 

“땡그러러렁!”

면죄부 헌금함 안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다. 중세 때 교황청은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면죄부를 발행했다. 테첼이라는 수도사가 앞장섰다. 그는 열정적인 웅변가였다.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소리가 나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설교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면죄부 판매는 성황을 이루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사진)는 이에 맞서 싸웠다.

3~10일 유럽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했다. 독일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에는 중세 때 썼던 면죄부 헌금함이 있었다. 유심히 지켜보던 관람객이 동전을 하나 집어넣었다. “땡그랑!”소리가 났다. 그건 어쩌면 ‘경고의 소리’였다. “예수로 돌아가라. 성서로 돌아가라”는 루터의 외침에서 멀어지는 오늘날의 교회, 오늘날의 신앙을 향한 날 선 경고였다.

◆루터의 벼락체험=5일 루터의 생가가 있는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그곳에 기념관이 있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랬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벼락을 체험했다. 주위는 캄캄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는 땅에 엎드려 성 안나(광부들의 수호 성인)에게 약속했다. “살아난다면 수도자가 되겠습니다.” 목숨을 건진 루터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도 수도자가 됐다. 루터를 종교의 길로 들어서게 한 ‘벼락 체험’이다.

 벼락 체험의 핵심은 두려움이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인간을 작아지게 한다. 그런 무너짐을 통해서 우리는 ‘벼락’을 체험한다. 그런 벼락을 사도 바울도 맞았다.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진 바울은 눈이 멀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암흑 속에, 두려움 속에 빠진 것이다. 루터도 그런 두려움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봤을 터다. 그리고 수도자가 됐다. 돈 선거와 세력다툼으로 범벅된 한국의 개신교계에 필요한 것이 바로 ‘루터의 벼락’이었다.

◆벌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6일 아이슬레벤에서 에어푸르트로 갔다. 루터가 생활했던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수도원을 찾았다. 고요했다. 그런 고요를 깨고 루터는 신을 찾았다. 중세 사람이 믿던 하나님(하느님)은 ‘벌 주시는 하나님’이었다. 신학도 ‘벌 주는 신학’이었다. 사제가 된 루터도 ‘벌 주는 하나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루터는 고해성사를 한 뒤 계단을 내려가다가 금세 달려와 “그 사이에 마음으로 죄를 지었다”며 다시 고해성사를 하곤 했다. 그만큼 루터도 ‘죄 문제’로 고민했다.

 


 특유의 지성과 종교성을 인정받은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됐다. ‘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에 눈을 떴다. 그건 ‘벌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루터는 탑이 있는 수도원 건물의 화장실에서 그걸 깨달았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볼일을 보던 중이었다. 그때 루터는 “가장 미워했던 로마서 1장17절(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된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산다’고 기록된 바와 같다)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 됐다. 내게 천국의 문이 됐다”고 고백했다. 일종의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의 노래)’이다. 개신교에선 ‘탑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루터의 모토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는 바울의 오도송과도 통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심약한 성격의 루터가 어떻게 교황청을 상대로 반박하고, 논쟁하고, 싸우며 종교개혁을 이끌었을까. 그 힘의 바탕이 탑의 체험, 그리스도의 체험, 말씀에 대한 체험이었다.

 

◆루터의 대자보, 종교사를 바꾸다=
면죄부 판매와 함께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이 줄었다. 루터도 이 문제와 직면했다. 비텐베르그에서는 면죄부가 판매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웃 도시로 가서 면죄부를 구입했다. 그리고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 루터는 고민에 빠졌다.

 작은 도시인 비텐베르크로 갔다. 당시 루터는 면죄부 등에 의문을 품고 “신학적인 토론이나 해보자”며 ‘95개 논제’를 써 붙였다. 비텐베르크 교회 외벽에는 루터가 내세웠던 ‘95개 논제’가 새겨져 있다. 일종의 대자보다. 루터의 논제는 인쇄술 혁명에 힘입어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각국 언어로 번역됐다. 파장이 커졌다. 논쟁은 1517년부터 5년간 계속됐다. 결국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루터는 파문 칙서를 비텐베르크 참나무 아래서 불태워버렸다. 지금도 그곳에는 ‘루터의 참나무’가 서 있었다.

◆지금도 울리는 루터의 외침=많은 이가 파문된 루터의 목숨을 노렸다. 루터는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城)으로 숨었다. 삭소니 지방의 제후가 그를 도왔다. 그 성을 찾아갔다. 높다란 계단을 올라가니 루터가 머물던 방이 있었다. 기사로 위장한 루터는 이곳에 숨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성직자·귀족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방에는 바짝 마른 루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기사로 가장한 채 수염을 길렀던 루터다.

 


 안내를 맡은 신국일(프랑크푸르트 슈발바흐 성령교회 담임) 목사는 “루터판 성경은 고어체라서 읽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도 독일인은 루터판 성경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예수로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외침 때문이 아닐까. 결국 유럽은 구교와 신교의 전쟁을 거친 뒤 종교개혁의 열매를 맺었다. 그렇게 루터는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

 루터의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금권 선거와 정치 공방, 교회 세습과 정당화, 목회자의 성 추문, 교회 내 이권다툼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일부 교회들은 그 외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로 돌아가자. 말씀으로 돌아가자.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500년 전 루터의 외침을 향해서 말이다.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독일)=글·사진 백성호 기자

◆면죄부=가톨릭에선 ‘면죄부’란 용어 대신 ‘면벌부’ 혹은 ‘대사부(大赦符)’란 표현을 쓴다. 죄를 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벌을 면해준다는 뜻이다. 가톨릭에선 죄를 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고해성사라고 본다. 중세의 설교가들은 교회 사업의 모금을 위해 면벌부를 남발했다. 왼쪽 작은 사진은 면죄부 헌금함.




스위스 제네바의 바스티옹 공원에는 종교개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왼쪽부터 종교개혁가 파렐(칼뱅의 종교개혁 동료), 칼뱅, 베자(칼뱅의 후계자), 녹스(칼뱅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 장 칼뱅(1509~64)은 종교개혁 2세대다. 그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를 계승하면서도, 루터와 달랐다. 칼뱅은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처럼 내 심장을 하나님께 드린다”며 종교개혁을 위해 싸웠다. 그는 신앙에 철저했고, 엄격했고, 냉정했다. 지금도 칼뱅에겐 열정적이란 찬사와 독단적이란 비판이 동시에 쏟아진다. 3~10일 유럽의 종교개혁지를 순례하며 칼뱅의 자취를 만났다.

◆루터파와 칼뱅파의 차이=독일의 개신교 교회를 여럿 들렀다.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어떤 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가 매달려 있었다. 가톨릭 성당처럼 말이다. 또 어떤 교회는 예수상 없이 십자가만 있었다. 안내를 맡은 신국일(프랑크푸르트 슈발바흐 성령교회 담임) 목사는 “루터파 교회에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려 있다. 그러나 칼뱅이나 츠빙글리의 정신을 잇는 개혁파 교회의 예배당에는 십자가 위에 예수의 상(像)이 없다.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는 입장 때문이다. 개혁파는 초기에 십자가 사용조차 금지했다”고 말했다.

 그게 루터파와 개혁파의 차이였다. 루터는 “비성경적이 아니면 성경적이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가톨릭적인 요소를 유연하게 수용했다. 지금도 루터파 교회에 가면 가톨릭 성당의 분위기가 풍긴다. 루터는 온건적 개혁주의자였다. 그러나 칼뱅은 달랐다. 그는 무척 엄격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8일 독일에서 스위스의 제네바로 넘어갔다. 제네바대학 맞은편의 바스티옹 공원으로 갔다. 종교개혁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칼뱅과 파렐, 베제, 녹스 등 종교개혁가의 조각상이었다. 칼뱅은 우상숭배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 제네바시에 자신의 조각상이 세워질 걸 알았다면 노발대발 했을지도 모른다.

 


1517년 루터는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때 칼뱅은 9살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14살 때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갔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날, 어거스틴파의 수도사 장 발리에르가 이단으로 몰려 파리에서 공개 화형을 당했다. 루터의 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읽었다는 이유였다. 그는 혀가 잘린 뒤 화형을 당했다. 칼뱅은 이 참혹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종교개혁기의 참상이 어린 칼뱅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프랑스 국왕이 신교를 박해하자 칼뱅은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리고 파렐의 요청으로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했다. 제네바는 이미 개신교 도시였다. 그러나 칼뱅은 제네바를 더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생활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칼뱅에겐 ‘제2의 종교개혁’이었다. 일명 ‘성시화(聖市化) 운동’이다. 칼뱅이 추진했던 신정정치에 대한 반발과 충돌도 많았다.

 제네바 목사였던 칼뱅은 춤과 도박을 금지했다. 간음죄와 칼뱅 모독죄로 처형된 이도 있고, 삼위일체를 부인해 화형을 당한 이도 있었다. 심지어 칼뱅은 “종교개혁적 신앙고백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누구든지 도시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칼뱅은 종종 ‘논란의 인물’이 되곤 한다.

◆장로교의 기초 닦아=제네바 시내의 성 피에르 교회에 갔다. 칼뱅은 거기서 설교를 했다. 교회 옆에는 칼뱅이 머물렀던 사택도 있었다. 칼뱅의 열정은 뜨거웠다. 그는 예배의 중심을 미사에서 설교로 바꾸었다. 흑사병이 돌 때도 병자들을 찾아갔다. 날마다 심방도 했다. 평소 갖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건강보다 교회를 중시했다.

 칼뱅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뱅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

 칼뱅은 평생 ‘경건한 신앙, 엄격한 신앙’을 좇았다. 그의 잣대는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유익’이었다. 그러나 관용에는 인색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이었다. 병실에서 죽음을 앞둔 칼뱅은 자신의 과격한 성격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를 제네바 공동묘지에 묻되, 어떤 묘비도 만들지 마라.” 마지막까지 그는 신앙에 철저했다.

 종교개혁지 순례를 마치며 의문이 일었다. 과연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그건 칼뱅도 아니고, 루터도 아니었다. 그들이 외쳤던 성서였다. ‘성서로 돌아가라. 근원으로 돌아가라.’ 그건 한국 교회에도 절실한 답이었다.

제네바=글·사진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