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종교개혁 500년 현장 가보니
'오직 믿음' 실천한 루터정신, 獨 비텐베르크 곳곳에 오롯이
교권 다투는 우리교회 '반면교사'
"1524년부터 개신교회로 유지되고 있는 이곳은 종교개혁의 정신적 문화재입니다. 신앙과 믿음의 개혁이 시작된 곳이죠."
독일 동북부 작센안할트주의 소도시 비텐베르크 성곽교회.지난 5일 10여명의 순례자들에게 교회 곳곳을 보여주며 설명하던 베른하르트 그룰(75)은 이렇게 말했다. 2000년까지 이 교회 안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내가 은퇴할 때까지만 해도 매년 2000여명이 이곳을 찾았는데 요즘에는 1년에 20만명 이상 온다"고 덧붙였다.
◆종교개혁의 발원지, 비텐베르크
인구 2만여명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이곳이 오늘날의 개신교회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도시(Lutherstadt)'라는 수식어가 공식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비텐베르크는 중세 유럽의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1483~1546)의 활동 무대였다.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그는 이곳에서 교황 레오10세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며 개혁을 주창했고,교황에 의해 파문당했으며,이곳에 묻혔다.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앞두고 용인 새에덴교회 순례단과 함께 종교개혁의 현장을 찾았다. 교회와 교황의 세속화를 비판했던 14세기 얀 후스의 활동 무대인 체코 프라하를 시작으로 루터의 활동 현장인 독일,츠빙글리와 캘빈이 활동했던 스위스를 차례로 순례했다.
루터가 이곳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것은 34세 때인 1517년 10월31일.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이른바 '95개조의 명제'를 성곽교회 정문에 붙인 것이다.
"우리들의 주(主)요,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신자의 모든 삶이 참회이기를 원하셨다. 참된 참회가 이뤄졌다고 느끼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면죄부가 없어도 그에게 부여되는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는다. "
11세기 말부터 등장한 면죄부는 르네상스 시대에 극에 달했다. 교황 레오10세는 화려한 베드로대성당을 짓기 위해 1506년 일괄 면죄부를 발행하며 세일에 나섰다.
격문의 효과는 엄청났다. 마인츠 교구의 알브레히트 대주교가 루터 때문에 면죄부가 안 팔린다며 교황에게 처분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루터의 책과 언행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고 마침내 루터는 수차례의 신학논쟁을 거쳐 1520년 파문됐다.
교황의 착취에 대한 독일 민족의 반감과 이에 따른 신성로마제국 제후국들의 동조 등으로 개혁교회는 확산됐다. 그 사이 루터는 작센공국 왕 프리드리히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의 성에서 기사복을 입고 숨어 지내며 교황과 사제들이 독점했던 라틴어 성경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다. 한때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 독신사제의 틀에서 벗어났다. 그는 맨스필드 백작들의 법적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거기서 운명했다.
마르틴 루터가 어린 시절 3년 동안 공부하면서 살았던 독일 아이제나흐의 루터하우스를 찾은 순례객들이 집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루터의 95개조 명제가 새겨진 철문루터가 '95개조 명제'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정문은 화재로 소실돼 1857년 작센의 프리드리히왕이 철문으로 새로 세웠다. 철문에는 '95개조 명제'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고,문 위에는 성경을 든 루터와 그의 제자이자 '독일의 선생'으로 존경받았던 멜랑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던 설교대 바로 아래에 그의 무덤이 있고,맞은편에는 제자이자 절대적 조력자였던 멜랑히톤이 묻혀 있다.
비텐베르크는 그야말로 루터의 도시다. 시청 광장에는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 있고,루터가 파문장을 불태우며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선포했던 자리엔 '루터의 참나무'가 우뚝하다. 참나무 옆 길은 '루터의 거리'다. 참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멜랑히톤의 집과 비텐베르크대 건물,루터가 살았던 '루터하우스' 등 가는 곳마다 루터를 만나게 된다.
비텐베르크뿐만 아니다. 아인슬레벤에는 루터의 생가와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성안드레아교회 등이 남아 있다. 마른 빵에 맥주 한 잔으로 아침저녁을 때우며 고행수도했던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도 그의 숨결을 전해준다. 파문 후 숨어지내며 성경을 번역했던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도 루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 개신교의 원류는 루터 개혁정신
루터는 어린 시절부터 죄의 문제로 고민했던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새롭게 해석해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을 발견한 후 그는 당당해졌고 '오직 성경,오직 믿음'을 신조로 공의(公義)를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대를 통찰했고,성경과 믿음을 기준으로 결단하고 실행했다. 이를 위해 철저히 자기를 비웠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루터의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탄생시켰다. 지금 한국의 개신교회도 거슬러 올라가면 루터에서 시작됐다. 교권 다툼과 금권선거,양적 성장만 추구하는 물량주의와 대형화 등 숱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는 과연 루터의 개혁정신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을까. 문제 해결을 원한다면 루터에게 길을 물어볼 일이다.
비텐베르크(독일)=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下) 유럽 종교개혁의 교훈
화형 당한 후스·전사한 츠빙글리…로마 교회 세속화 비판하다 희생
"성경만을 신앙기준 삼자" 주창
체코 수도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과 그 뒤편의 틴성당. 이 성당에서 사제생활을 했던 얀 후스는 화형당하는 순간에도 "오늘 거위를 죽일 수는 있어도 100년 뒤 오는 백조는 죽일 수 없다"며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체코 수도 프라하의 구(舊)시가지 광장.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쌀쌀한 날씨였지만 광장은 붐볐다. 광장 주변에 프라하의 명물인 천문시계탑과 틴성당,성미쿨라셰성당,골즈킨스키궁전 등 문화유산이 즐비한 데다 카페와 레스토랑,상점 등이 몰려 있어서다.
체코의 대표적 명소인 이 광장의 주인은 광장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1369~1415)다. 후스는 34세에 프라하대 총장을 지낸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시류에 편승하면 안락한 삶이 보장된 터였지만 그는 거부했다.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1324~1384)의 영향이 컸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의 얀 후스 동상
◆"100년 후 백조가 온다" 후스 예언
위클리프는 사제들이 독점했던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교황의 권위를 부정했다. 또한 교황의 세속적 권한을 비판하며 '거만하고 세속적인 로마의 사제''적그리스도'라고 선언했다.
후스는 이런 위클리프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사제로 있던 프라하 시내 베들레헴성당에선 라틴어 대신 모국어로 예배를 드렸다. 또한 "면죄부 판매는 사기"라며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교황은 후스가 쓴 책들을 불태우고 그를 출교시켰다. 파문장을 받고도 계속 설교하던 후스는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소환됐다. 후스는 마침내 사악한 이단으로 정죄돼 화형을 선고받았다. 1415년 7월16일 후스는 콘스탄츠의 화형대에 섰다. 장작더미에 불이 타오르자 후스는 이렇게 외쳤다.
"오늘 거위 한 마리는 불태워 죽일 수 있지만 100년 뒤 나타날 백조는 결코 불태우거나 죽이지 못할 것이다. "
'후스'는 보헤미아 말로 '거위'라는 뜻.'백조'는 바로 독일의 마틴 루터다. 루터는 후스가 화형당한 지 102년 만인 1517년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정문에 '95개조 명제'를 붙이면서 종교개혁의 시대를 열었다. 순례단과 동행한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의 신국일 목사는 "루터의 종교개혁 100년 전 보헤미아에는 이미 종교개혁과 개신교가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 하늘을 응시하는 후스의 동상 아래에 그가 마지막까지 강조했던 진리의 외침이 새겨져 있다. "오직 진리를 찾아라.진리를 들어라.진리를 배워라.진리를 사랑하라.진리를 말하라.진리를 지켜라.마지막 순간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사람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보라
후스의 개혁정신은 독일의 루터 외에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1484~1531)에게도 이어졌다. 츠빙글리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당시 로마교회의 권력 남용과 비성경적 요소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취리히 구시가지의 그로스뮌스터교회와 리마트 강 건너 프라우뮌스터교회는 그가 시무하며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현장이다. 교회 내부는 개혁의 현장답게 별다른 장식이 없이 단출하다.
리마트 강에 놓인 뮌스터다리 옆 바서키르케(물교회) 앞에는 칼을 찬 츠빙글리의 동상이 서 있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진영과의 전쟁인 카펠전투에 1500명의 병사들과 함께 나섰다가 전사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개혁은 계속됐고 그의 개혁정신은 사위인 하인리히 불링거를 거쳐 장 칼뱅(1509~1564)으로 이어져 꽃을 피웠다.
◆장로교 초석 놓은 칼뱅
칼뱅을 찾아 제네바로 이동한다. 칼뱅은 프랑스 출신이다.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1533년 교회의 본래적 순결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종교적 사명,즉 카리스마를 경험한 뒤 가톨릭과 결별했다. 이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스위스 바젤로 간 그는 불과 스물일곱 나이에 기념비적 저작인 《기독교 강요》를 쓴 천재였다.
개혁적 종교인인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간 그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네바는 이미 종교개혁이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지만 개혁교회라도 늘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설파했던 것이다.
칼뱅은 시민들에게 엄격한 신앙생활과 실천을 요구하며 오늘날 장로교단의 기초를 쌓았다. 그가 도입한 목사 · 교사(박사) · 장로 · 집사의 4개 직분은 성직자의 독단적 운영에서 벗어나 교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제네바 구시가지의 성 피에르 교회는 칼뱅이 교회개혁을 이끌었던 현장이다. 교회에서 5분쯤 걸어가면 바스티용 공원 벽에 칼뱅과 파렐,칼뱅의 후계자인 베자,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뿌리 내린 낙스 등 4명의 모습을 새긴 거대한 부조상이 있다.
거대한 벽에 새겨진 종교개혁 당시의 슬로건이 칼뱅의 외침을 그대로 전한다. 'Post Tenebras Lux.(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
제네바=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下) 유럽 종교개혁의 교훈
위클리프로부터 루터와 칼뱅에 이르기까지 숱한 희생 끝에 이뤄진 종교개혁의 여진은 컸다. 칼뱅의 종교개혁은 프랑스에서 위그노운동을 일으켜 칼뱅주의 신조를 채택하게 했고, 네덜란드에서도 칼뱅의 신앙고백이 받아들여졌다. 특히 칼뱅의 '39개 신조'를 채택한 영국에서는 16~17세기에 성경중심의 신앙생활과 실천운동인 청교도운동으로 이어져 칼뱅주의에 투철한 개혁을 지향했다. 또한 청교도혁명은 근대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했고,이들이 가진 도덕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의 이상은 아메리카대륙으로 번졌다.
구한말 한반도로 건너온 수많은 선교사들도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교단에 관계 없이 청교도 정신의 바탕 위에 설립됐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최대 교단이 장로교라는 점에서 칼뱅의 신학체계는 우리 개신교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칼뱅주의는 그의 제자이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인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로 다듬어진 뒤 미국 등으로 확산됐고,한반도에 전해졌다.
1054년 동 · 서교회로 분열된 이후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서방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신 · 구교로 나뉘었다. 신교는 루터와 칼뱅주의파로 나뉘었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인 영국국교회(성공회)까지 가세해 이른바 '종파주의 시대'를 열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가 지휘하는 독일 군대가 로마 교황청을 침략해 약탈한 사건은 가톨릭에 대한 경고과 개혁의 요구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가톨릭 개혁을 위한 트리엔트공의회가 1545년 시작돼 프로테스탄트들이 제기한 물음에 답하고,가톨릭의 교리와 법령을 새로 다듬었다. 가톨릭은 또한 19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요구에 적극 응답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주의를 지향하는 개신교는 그동안 성장에만 치중한 채 개혁 노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지금 국내 개신교가 가톨릭에 비해 훨씬 많은 개혁 요구에 봉착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개혁교회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칼뱅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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