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고 파는 교권의 면죄부 맞서 ‘예수뜻 회복’
화형으로도 태우지 못한 ‘성서 진리’ 깊은 뿌리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 500돌(2017년)이 6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교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리려는 한국교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얼굴로 꼽히는 대형교회들로부터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비리와 싸움,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돈선거’ 등으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거세지며 ‘종교개혁 정신’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때마침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츠빙글리 등 개혁가들의 흔적을 찾아나선 경기도 용인 죽전 새에덴교회(담임·소강석 목사)의 ‘종교 개혁지 순례’에 함께했다. 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루터를 시작으로 4회에 걸쳐 개혁가들의 삶을 되살려 본다.
인구는 6천 명이었지만, 재판정엔 1만여 명 모여
가톨릭 사제이자 비텐베르그대 성서학 교수였던 루터가 독일황제의 소환을 받고 보름스에 도착해 제국회의장에 선 것은 1521년 4월 17일이었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성교회에 붙인 비텐베르그에서 보름스까지 700여km. 한 달은 걸어야 할 거리다.
왜 그는 험난한 길을 자처했을까. 비텐베르그성교회를 찾는 연간 20만 명의 순례객들에게 루터의 사상을 전하는 벤 하르트 구룰(75) 가이드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린 것, 그것이 핵심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돈을 주고 산 면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義)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 깨달은 루터는 면죄부를 판 교권에 맞서 ‘성서의 진리’를 전하려 했다. 그곳에 갔다가 체코의 얀 후스(1372~1415)처럼 화형당할지도 모른다며 극구 말리는 동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길을 나섰다.
“얀 휴스는 불태웠을지 몰라도 진리는 불태우지 못했소. 지붕의 기와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있더라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소.”
독일 내 ‘3대 바로크양식건물’이라는 보름스대성당은 ‘죄많은 인간’을 초라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과 권위를 갖췄다. 500년 전 보름스 인구는 6천 명이었지만, ‘루터의 재판정’엔 무려 1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심약하기만 했던 루터가 대성당의 황제와 수많은 군중들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었을까.
성당 입구 계단엔 예닐곱 명의 가톨릭 수도사들이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우연히도 면죄부 판매의 선봉장으로 루터를 격발하게 했던 수도사 요한 테첼이 소속됐던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사들이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대로 테첼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상자에서 돈 소리가 나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난다”며 면죄부를 팔았던 인물이다. 500년 전 가톨릭의 부패상을 상징했던 테첼의 후예들에게선 오히려 그런 악취는 풍기지 않는다. 이국의 순례객을 반갑게 맞아주는 필립 수사의 해맑은 웃음 어디에도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이곳 보름스회의장에서 목숨을 건 루터의 이런 외침이 없었다면 분열의 아픔을 만회할만한 정결함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스피노자보다 100년 앞서 그의 일기장에 적혀 있어
“내 양심이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한 나는 내 발언을 취소할 수도 없으며, 취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이롭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길. 아멘.”
면죄부를 팔아 모은 돈이 흥청망청 대는 로마 교황청과 새로 지은 성베드로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쓰여지는 것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사제로서 삶이 몰수당하는 파문을 당했음에도 루터는 개혁을 향한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끊임없이 나약해지는 자신의 용기와 정의를 북돋워 오늘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의지의 인간이었고, 일평생 자신의 죄를 고백한 회개의 인간이었다.
우리가 스피노자(1632~1677)의 말로 알려진 이 말이 실은 그보다 100년도 전에 마르틴 루터의 청소년기 일기장에 적힌 말이라고 한다. 음악가 바흐(1685~1750)의 고향이자 루터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독일 중부 아이제나흐의 루터하우스 앞엔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네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보름스(독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종교개혁 가능하게 한 외부요인들
프리드리히 제후가 납치한 척 데려와 보호
인쇄술과 인문학적 지성도 개혁에 힘 보태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보였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라는 탁월한 인물 외에도 여려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루터의 고향, 독일의 권력가들이 루터 편이었다는 점이다. 독일 인근의 350개 공국이 모인 독일제국은 로마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의 신성로마제국(962~1806년)으로 불렸지만 로마 교황의 전제에 반항하는 민족주의가 싹터 반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7개의 주요 공국의 제후들이 모여 황제를 선출했는데, 합스부르그왕가(훗날 오스트리아)와 함께 쌍벽을 이룬 작센공국의 프리드리히 제후가 후견인이었다. 독일 황제 카를5세가 로마 교황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보름스로 소환해 해명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루터의 뒤에 프리드리히 제후가 있기 때문이었다. 교황과 황제로부터 이중파문을 당한 루터가 보름스에서 비텐베르그로 돌아가는 길에 프리드리히 제후는 4명의 기사를 보내 ‘납치’를 가장해 데려와 바르트부르그성에 숨겨줄 정도로 적극적인 보호자였다. 루터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까지 규정하며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간과할 수 없는 요인으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인쇄술이 꼽힌다. 루터가 비텐베르그성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놓았을 당시만 해도 거의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던 한 사제를 유럽의 유명인사로 만들어준 것은 인쇄된 그의 책자들이었다. 인쇄소를 하는 친구를 두었던 루터는 인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선전가이기도했다. 에르푸르트대학에서 처음 철학을 공부하며 인문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루터는 훗날 에라스무스와 결별하긴 했지만 인문학적 지성도 그의 개혁에 힘이 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성령교회 신국일 목사는 “구교(가톨릭)의 부패와 개혁 사제의 등장과 함께 이런 정치·사회·산업적 요인이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 숨은 공로자 아내 폰 포라
수녀원 탈출해 루터집 숨어든 10명 중 한 명
한밤 중 소복 소동으로 용기 잃은 남편 채근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살았던 비텐베르그의 루터하우스엔 루터와 나란히 한 여인의 그림이 걸려있다. 루터가 교황과 맞서 싸울 때 루터에 동조한 나머지 수녀원을 탈출해 루터의 집에 숨어든 10명의 수녀들 중 한 명이다. 그가 바로 루터의 부인 캐서린 폰 보라다. 1525년 루터가 42세 때, 그가 26세 때다. 사제 출신과 수녀 출신의 결혼은 종교적인 문제와 개인의 사생활이 분리되고, 독신 수도자 제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극소수의 친구 중 한 명인 루카스가 그린 그의 그림은 경건하면서도 후덕한 인상이다. 루터와 폰 보라는 3남3녀를 낳았다. 그 가운데 둘이 사망했지만 비교적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프랑스와 보헤미아를 주어도 폰보라와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폰보라를 사랑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심약했고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던 루터가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는데 폰 보라의 역할은 지대했다. 폰 보라는 늘 제자들이 들끓으며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남편을 안정적으로 돌봤을 뿐 아니라 루터가 교황의 파문으로 사제로서 살아온 삶을 몰수 당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그를 구원해 종교개혁을 이루게 한 숨은 공로자였다.
결혼 전 폰보라는 어느날 한밤 중 소복을 입은 채 루터의 방에 들어선다. 그러자 깜짝 놀란 루터가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다. 폰 포라는 “하느님이 죽었다”면서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이토록 용기를 잃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힘을 얻어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한 전진을 다시 시작했다.
화형장의 후스, 종교개혁 불씨 되다 | |
“진실만을 찾으라, 지켜라” 부패한 교회 향해 외쳐 “지금 거위는 불타 죽지만 100년뒤 백조 나타날것” 루터 등장 마치 예언하듯
프라하 구시가지광장에 서 있는 얀 후스의 동상이 얀 후스가 설교했던 틴교회당을 바라보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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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① 제코의 후스, 목숨 건 항전
‘블타바(몰다우)강’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일본 강점기 때 눈물을 흘리며 연주했고, ‘프라하의 봄’(1968년) 기념식에서 빠짐없이 연주되는 스메타나(1824~1884·드보르자크의 은사)의 교향곡 <나의 조국>의 제2번 제목이다. 그 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길이 500미터의 카를교에서 밤에 바라보는 ‘높은 성’(교향곡 <나의 조국> 제1번곡 제목)에 우뚝 선 비투스대성당은 프라하의 제1야경으로 꼽힌다. 지난 3일 밤 몰다우강에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높은 성’(고성)과 프라하 주교좌성당인 비투스대성당의 아우라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황홀했다.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눈먼 순례객과 달리 그 이면의 진실을 냉철하게 본 인물이 있었다. 카를교 옆에 있는, 690년 전통의 프라하대학 총장이었던 얀 후스(1372~1415)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보다 100여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을 댕긴 얀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인을 위해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모국어로 설교하면서 성서와 달리 ‘교황을 우상시’하고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한 죄로 화형을 당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29살에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장, 37살에 총장이 되어 얼마든지 기존 교회와 황제와 영주 편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진리를 위한 ‘산제물’로 자신을 바쳤다.
카를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옛 시가지 광장에 ‘얀 후스’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생전에 진정한 신앙과 보헤미아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설교했던 틴교회당이다.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틴교회당은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욕망의 화신들’에 맞서는 인간들과 요정들의 요새 ‘미나스티리스’(감시자의 탑이라는 뜻)의 정수리처럼 빼어나다. 틴교회당의 광장 건너편엔 옛 시가지의 명물 시계탑이 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수많은 구경꾼 머리 위에선 모래시계 주위로 12개의 인형이 도는 짧은 공연이 펼쳐진다. 해골은 죽음을, 모래시계는 ‘유한한 인생’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 시계탑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원히 살 듯이 신과 인간을 동시에 욕보이는 ‘욕망의 전차’는 왜 속도를 더 내는 것일까.
얀 후스의 동상 아래엔 그가 화형당하던 순간 외쳤다는 ‘진실의 7명제’가 쓰여 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사람들은 열매에만 목을 매지만 뿌리와 줄기가 없는 열매는 없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줄기 위에 열린 열매였다. 후스는 체코말로 ‘거위’란 뜻이다. 후스는 화형당하면서 “너희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란 말을 해 루터의 등장과 종교개혁을 예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때마침 국내에선 발레 <백조의 호수>를 영화화한 <블랙스완>(흑조)이 상영중이다. <블랙스완>에서 악(흑조)은 나 이외의 그 누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내털리 포트먼이 분한 발레리나 니나가 자기도 모르게 악을 제거하기 위해 찌른 것이 실은 자신이었다. 백조는 누구이고, 흑조는 누구인가. 결국 ‘욕망의 흑조’와 ‘순수의 백조’는 모두 니나의 내면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얀 후스의 동상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죽음으로 항전했던 가톨릭의 대성당이 아니라 ‘자신의 아성’인 틴교회당이었다.
프라하/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제네바 바스티옹공원 안에 있는 종교개혁가들의 기념비. 칼뱅을 끌어낸 파렐과 장 칼뱅, 베자, 녹스(왼쪽부터) 등의 석상이 나란히 서 있다.
기독교 개혁의 발자취 그 현장을 찾아서 ③ 제네바의 실천가 칼뱅
국제적십자사, 국제노동기구, 세계보건기구, 국제연합 유럽본부 등 200여 기구의 본부들이 있어서 ‘국제기구의 수도’라 할 만한 제네바. ‘가톨릭의 수도 로마’만큼이나 개신교에서 중요한 도시다. 칼뱅이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로 만들기 위해 설교한 생피에르교회 아래쪽 바스티옹공원에 이르니 칼뱅의 석상이 ‘종교 개혁’의 세 동지와 서 있었다. 훤한 이마와 깊게 팬 눈, 흰 수염이 일상적 삶 속에서 경건한 영성을 구현하려 했던 ‘영성가이자 실천가’인 칼뱅의 풍모를 엿보게 한다. 바스티옹공원 옆엔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아카데미(제네바대학)가 있다. 칼뱅의 종교개혁을 유럽에 전파한 사관학교다.
암울한 시대 상황과 어두운 교회 현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아는 칼뱅은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칼뱅은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릴 만큼 병약하고 비사교적이며 과묵했다. 그래서 사회적인 활동가로서보다는 홀로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칼뱅은 그런 책상물림이었지만 시대의 어둠을 외면할 수 없어서 힘겨운 몸을 이끌고 세상 속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양심가였다.
칼뱅은 자신의 건강이나 성향으로 보아 실천적이기보다는 홀로 학문하기를 즐겼지만 그의 아우라를 감지한 지인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있던 파렐은 <기독교강요>라는 탁월한 저서를 쓴 이가 제네바를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찾아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협박’을 하며 칼뱅을 끌어들인다. 훗날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하며 한 과부를 만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생애를 보내면서 조용히 살려던 칼뱅에게 “제네바의 돌들이 소리칠 때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냐?”고 협박해 다시 끌어들인 것도 파렐이었다.
제네바 루소섬에 있는 장자크 루소의 동상
칼뱅의 ‘개혁 요구’대로 제네바는 ‘칼뱅 시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개혁된 것일까. 레만호수 안쪽으로 몽블랑 다리를 건너니 루소섬이다. 제네바가 키워 프랑스 인권 혁명의 뿌리가 된 장자크 루소(1712~78)를 기리는 섬이다. ‘종교의 시대’를 깨운 계몽사상조차 날려버리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던 홉스의 사상도 거부하며 ‘우정과 조화의 인간 회복’을 주창한 루소의 영향일까.
제네바는 다툼과 갈등으로 인해 140여개 교단으로 분열된 한국의 장로교단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개신교인들뿐만 아니라 가톨릭과 불교 등 다른 종교들과 150여개 나라 국민들과 200여개 국제기구 관계자 등 18만여명이 관용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토록 평화로운 스위스 사람들이 몇백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국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해 받은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싸움 선수들’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제네바 시민들을 지배하는 건 500년 전 칼뱅의 ‘경건성’은 아니다. 마치 모든 거리가 유명 패션쇼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제네바인들의 옷차림은 세련미가 넘치면서도 어디서나 평화로운 미소를 마주할 수 있다. 세상도 교회도 때때로 개악되거나 개혁된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제네바 국제연합 유럽본부 마당에서 만국기들이 함께 나부끼고 있었다.
제네바/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칼뱅 (1509~1564)
한국 개신교회와 신자 수의 70%의 이상을 차지하는 장로교의 아버지는 장 칼뱅이다. 우리에겐 ‘칼빈’(영미권 호칭)으로 익숙한 인물이다. 그래서 칼뱅은 한국 교회에서 예수 다음으로 유명하다고 할 정도다.
프랑스 출신으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한 그는 불과 23살에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에 대한 해석을 발표해 인문주의자로서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은 데 이어 25살에 복음주의 개신교의 고전 <기독교강요(綱要)>(Institute Christianae religions)를 썼다. <기독교강요>는 ‘가톨릭으로부터 모략당하고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자들의 무고함을 프랑스 황제에게 탄원하는 서문에 이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등으로 구성돼 있다.
“100년 뒤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 종교개혁 예언
그의 동상이 자신의 아성인 교회당 향한 까닭은…
교회당 건너편 모래시계탑, ‘유한한 인생’ 경고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눈먼 순례객과 달리 그 이면의 진실을 냉철하게 본 인물이 있었다. 카를교 옆에 있는, 690년 전통의 프라하대학 총장이었던 얀 후스(1372년~1415)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보다 100여 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을 댕긴 얀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인을 위해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모국어로 설교하면서 성서와 달리 ‘교황을 우상시’하고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한 죄로 화형을 당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29살에 프라하대학 철학부 학장, 37살에 총장이 되어 얼마든지 기존 교회와 황제와 영주 편에서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진리를 위한 ‘산제물’로 자신을 바쳤다.
카를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옛 시가지 광장에 ‘얀 후스’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생전에 진정한 신앙과 보헤미아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설교했던 틴교회당이다.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틴교회당은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욕망의 화신들’에 맞서는 인간들과 요정들의 요새 ‘미나스티리스’(감시자의 탑이라는 뜻)의 정수리처럼 빼어나다. 틴교회당의 광장 건너편엔 옛 시가지의 명물 시계탑이 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수많은 구경꾼 머리 위에선 모래시계 주위로 12개의 인형이 도는 짧은 공연이 펼쳐진다. 해골은 죽음을, 모래시계는 ‘유한한 인생’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 시계탑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원히 살 듯이 신과 인간을 동시에 욕보이는 ‘욕망의 전차’는 왜 속도를 더 내는 것일까.
백조는 누구이고, 흑조는 누구인가
얀 후스의 동상 아래엔 그가 화형당하던 순간 외쳤다는 ‘진실의 7명제’가 쓰여 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사람들은 열매에만 목을 매지만 뿌리와 줄기가 없는 열매는 없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줄기 위에 열린 열매였다. 후스는 체코말로 ‘거위’란 뜻이다. 후스는 화형당하면서 “너희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란 말을 해 루터의 등장과 종교개혁을 예언했다는 전설이 있다.
때마침 국내에선 발레 <백조의 호수>를 영화화한 <블랙스완>(흑조)이 상영 중이다. <블랙스완>에서 악(흑조)은 나 이외의 그 누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나탈리포트만이 분한 발레리나 니나가 자기도 모르게 악을 제거하기 위해 찌른 것이 실은 자신이었다. 백조는 누구이고, 흑조는 누구인가. 결국 ‘욕망의 흑조’와 ‘순수의 백조’는 모두 니나의 내면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얀 후스의 동상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가 죽음으로 항전했던 가톨릭의 대성당이 아니라 ‘자신의 아성’인 틴교회당이었다.
프라하/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얀 후스는?
보헤미아의 가톨릭 사제이자 신학자이자 명설교가였던 그는 라틴어성경을 영어로 번역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을 꼬집었던 영국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교회의 도덕적 해이와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를 강력히 경고했다. 교회는 결국 그를 파문하고, ‘콘스탄츠(현 독일 남서부의 스위스 접경지역) 종교회의’에 소환했다.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변보호 약속을 받고 갔으나 황제는 약속을 모르쇠했고, 로마교회쪽은 그에게 ‘이단’의 굴레를 씌워 화형에 처했다. ‘보헤미아 지성의 얼굴’이던 그가 죽자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순교자’이자 ‘국민 영웅’으로 승화했다. 그의 죽음은 구교(가톨릭)-(개)신교 간의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훗날 루터가 세속적 영예를 얻기 원하는 부친의 뜻을 거역한 채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가톨릭 사제 훈련을 받은 독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은둔수도회 대성당 제단 아래엔 얀 후스를 콘스탄츠종교회의로 유인해 죽음에 이르게 한 로마가톨릭의 공로자이자 그 수도회의 명사인 요한네스 자칼의 무덤이 ‘성보’인양 딱버티고 서있다. 루터는 그 성당에서 살면서도 자신은 “요한네스 자칼이 아니라 얀 후스의 (정신적) 자손이며, 얀 후스를 계승한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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