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할 때 예배 선교 봉사와 함께 중요하게 손꼽히는 것이 교회교육이다. 오늘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그랬던 것이 아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회교육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마르틴 루터가 이룩한 또 하나의 공헌이었다.
1520년대말 루터는 그가 살던 작센주의 여러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교회 순방을 하는 동안 루터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매우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십계명이나 사도신경을 모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주기도문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모든 크리스천이 성직자들과 동등하다는 ‘만인제사장’을 주장했던 루터로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성도들을 교육시키지 않은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를 순방하면서 시간을 아껴 교회 교육용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루터가 교회 순방을 마침과 거의 동시에 출판된 것이 교회교육 교재의 고전으로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이다. 전자는 주로 어린이와 초신자용이었고 후자는 성인과 성직자의 교육용으로 쓰여졌다. 루터는 이 교재에서 ‘문답식’ 교육방법을 채택했다. ‘소요리문답’의 첫 장이 되는 십계명 부분을 읽어보자.
“첫째 계명,‘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답: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문답식으로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등을 설명하고 있다. 암기하기 쉬운 문답식 교육방법은 루터 이후 오랫동안 교회교육의 모델이 되어왔다.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신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재도 집필했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교재를 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루터 당시 대부분 독일 사람들은 문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당시로서는 놀랄 만한 주장을 폈다. 그것은 모든 독일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에 관계없이 또 남자나 여자나 구별없이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초교육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를 교육시키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은 죄 중의 큰 죄”라고 말할 정도로 교육을 강조했다. 독일내 제후와 영주들에게 공교육제도 마련에 앞장설 것을 적극 독려했다. 루터의 노력으로 공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독일 사회를 변혁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루터의 생애를 일별해볼 때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특별히 언급해야 할 두 사람이 있다. 첫째는 루터의 평생 동역자였던 멜랑흐톤이다.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의 그리스어 주임교수로 부임했던 천재적인 학자였다. 그는 본래 신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대학에 와서 루터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운동에서 충실한 루터의 동지가 되었다.
대석학이었던 멜랑흐톤은 루터가 그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어학 대가였던 멜랑흐톤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터성경’을 오늘날까지 독일 사람들의 사랑 받는 번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터가 이끈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루터 곁에 충성스런 동역자 멜랑흐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비텐베르크시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과 멜랑흐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어 종교개혁이 두 사람이 함께 이룬 대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루터 생애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은 그와 동시대 비텐베르크에 살았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이다. 그는 루터를 마음깊이 존경했고 루터 초상화를 많이 남겨놓았다. 그래서 루터는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크라나흐의 루터 초상화를 보면 루터는 건강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건장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터는 40대 들어서면서부터 여러 병고로 크게 시달렸다. 그는 고질적인 위장병과 담석증으로 고생했다. 편두통과 때로는 어지럼증이 심해서 설교를 중도에 중단했던 일도 있었다. 투병할 때 그는 친지에게 이런 편지를 쓰기도 했다. “지난 한 주간 나는 죽음과 지옥에서 지냈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파서 편한 데가 없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고통 가운데서 루터가 초인적인 저술활동을 했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글을 썼을 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1546년 루터는 63세를 일기로 그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죽자 시신은 곧 비텐베르크로 운구되었고 29년전 그가 95개 조항을 써서 계시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에 안장되었다. 루터는 갔지만 그의 가르침과 개혁정신은 오늘날도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세상과 교회를 밝혀주고 있다.
이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글을 일단 마무리지으려 한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후속편으로 칼뱅의 종교개혁에 관해 쓰고자 한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샬롬!
<연세대 교수·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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