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지정보/유럽

종교개혁 알을 낳은 에라스무스




예수님이 바보?… 세상 진짜 바보에 대한 조롱이었다

“예수는 바보다.”

르네상스 시대에 종교권력이 아무리 부패하고 쇠퇴했다 할지라도, 아직도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시대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단칼에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 이런 신성모독적인 주장을 하다니? 이런 주장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하려면, 목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에라스무스(1466 또는 1469∼1536년)였다. 그는 풍자적이고 익살맞은 문체로 ‘우신예찬’을 써서 예수가 바보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했다. 우신예찬에는 인간의 순수한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바보신, 즉 우신(Moria)이 등장한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의 입을 통해 당대 종교지도자와 권력자 그리고 지식인들을 재치 있게 풍자하고 조롱했다.

우신은 예수그리스도가 왜 바보인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아버지 하느님의 지혜를 타고 났음에도 자신에게 내려진 어리석음의 몫을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리석음의 몫을 받아들였다니? 이 말은 예수가 바보가 되었다는 뜻 아닌가? 왜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바보가 되었을까? 우신은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된 것이다. 그는 오로지 십자가의 광기를 통해 무지하고 무례한 사도들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자 했다.”

예수가 바보가 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고린도전서 1장 21절)하고자 했다. 우신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에도 바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양’은 우둔한 짐승을 뜻한다. 그것은 어리석고 머리가 둔한 사람들을 모욕할 때 쓰는 말이었는데,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우신이 말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은 이렇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된 예수 그리스도. 바보가 된 예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똑똑한 자보다 아이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부들과 같이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자들을 선택했다.

더 나아가 우신은 바보 예수가 한 십자가의 말씀은 미친 소리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말씀이 미친 소리라니? 십자가의 말씀은 세속적인 쾌락과 가치를 버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은 삭개오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남들의 모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속임수도 감수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않으며, 쾌락을 두려워하고 단식과 밤샘, 눈물, 노고, 굴욕을 싫도록 맛본다. 이런 고난의 길인 십자가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속세의 눈으로 볼 때는 가장 어리석은 미치광이거나, 아니면 바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길을 걷겠다고 하면서 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자들을 자처하는 교황, 추기경, 주교 등 고위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광인과 바보의 대척점에 서 있지만, 우신은 실제로는 그들이 가장 어리석은 현자들이라고 조롱한다. 그중 교황에 대한 이야기만 옮겨 보자.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교황이 만약 그리스도의 청빈과 노동, 그의 지혜와 수난 그리고 현세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태도를 닮고자 노력한다면, 그리고 ‘아버지’를 의미하는 교황이라는 칭호와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극히 성스러운’ 자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면, 그들은 인간들 가운데 가장 불행하지 않았을까? 오늘날 교황들은 힘든 일은 거의 성 베드로와 사도 바울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즐거운 일만을 담당한다. 교황들은 전쟁을 주된 일로 여긴다. 이 늙어빠진 노인네들 중에는 전쟁을 하느라 청춘의 열정을 바치고, 돈을 쏟아 붓고, 피곤함을 무릅쓰고, 그 무엇 앞에서도 후퇴하지 않았기에 결국에는 법률, 종교, 평화 그리고 전 인류를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에라스무스는 우신의 입을 빌어 교황뿐만 아니라 똑똑한 체 하는 세상의 진짜 바보들에게 신랄한 조롱을 보냈다.

에라스무스는 1506년에서 1509년까지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교회 권력의 엄청난 광기와 우둔한 통치, 고위성직자와 귀족들의 허영과 허상을 가까이서 목격했다. 루터가 로마를 여행하고 나서 분노를 느꼈다면, 에라스무스는 같은 현상을 보고 가가대소하며 조롱했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의 구상을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가는 도중의 말 위에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절친 토머스 모어의 시골집에서 완성했다. 우신을 뜻하는 모리아는 토머스 모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우신 예찬은 당대 현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담았지만 전혀 진지하지 않다. 아마도 이 책을 쓰면서 에라스무스나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토머스 모어도 서로 낄낄대며 웃었을 것이다.

우신예찬을 읽은 사람들은 통쾌하면서도 유쾌해 했다. 루터도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신예찬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퍼져 나갔다. 교회는 우신예찬을 불쾌해 했다. 그러나 풍자와 익살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종교 개혁의 불씨는 제대로 찾아 내지 못했다.

루터가 1517년에 95개조 논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 문에다 붙이고 종교 개혁의 불이 붙자, 구교측은 에라스무스를 이렇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고 루터가 부화시켰다.”





“개혁 필요하지만 교회분열은 안돼!” 루터에 조언

종교개혁의 알을 낳은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태어난 연도가 1466년이라는 설도 있고, 1469년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출생연도를 두고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맞섰다. 취리히 시민이 되어 달라고 두 번이나 초청할 정도로 에라스무스와 인연이 깊은 스위스는 출생연도를 1466년으로 지정해 1966년에 탄생 500주년을 기념했다. 반면에 그의 조국인 네덜란드는 1469년을 출생연도로 결정하여 1969년에 탄생 500주년을 기렸다. 출생연도가 불분명한 것은 에라스무스가 거의 고아로 자랐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16세 때 스페인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와 수도 생활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총명함과 문필적 재능은 그를 한낱 시골 수도원의 수도사로 썩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주교의 비서를 거쳐, 파리 고등교육원에서 신학 과정을 밟았다. 1499년에 처음 방문한 영국은 그에게 지적인 자극과 활기를 주었다. 이때 나이는 어리지만 평생의 절친으로 지내게 되는 토머스 모어와 또 지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준 존 콜릿도 사귀었다.

에라스무스는 1500년 파리에서 ‘격언집’을 처음 출간했다. 그는 1500년부터 1533년까지 30여년 간의 세월 동안 이 ‘격언집’을 끊임없이 개정하고 증보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왜 ‘격언집’에 그토록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가. ‘격언집’은 격언에 담긴 고전의 지혜를 통해 현시대를 통렬하고도 새롭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격언의 특징으로 널리 쓰여야 하며, 통렬하고 신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격언집’은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격언집’은 출판된 후 유럽 전역에 그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에 쓴 ‘우신예찬’은 그의 명성을 더 높여 주었다. ‘우신예찬’이 나오면서 주목받은 책은 그가 1503년에 쓴 ‘엔키리디(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이다. ‘우신예찬’의 기본적 생각이 이 책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책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도교 전사를 위한 작은 교본’ 또는 규칙이다. 여기에 나오는 22가지의 규칙은 당대 지배적 종교와 세속적 물질주의에 대항해 삶 속에서의 영적인 전투를 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지침이다.

이 ‘엔키리디온’를 쓰고 난 후 에라스무스는 오래 전부터 원했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뛰어난 고전 실력과 인문학적 지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과 친분을 쌓았다. 그중에는 추기경들과 교황 레오 10세도 있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신앙의 본질을 잊은 성직자들의 화려하고 의례적인 삶과 세속적인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까이에서 체험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신예찬’은 그러한 현상에 보내는 유쾌한 풍자와 조롱이었다. 그는 ‘우신예찬’을 쓴 후 오랫동안 작업해 왔던 헬라어 신약 성경을 1516년에 처음으로 펴냈다. 뛰어난 고전실력을 바탕으로 헬라어 필사본을 정밀하게 대조해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찬하고, 라틴어로 비평과 주해를 달아 대중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이 대중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학자와 성직자들은 에라스무스를 오히려 비난했다.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서는 그가 편찬한 헬라어 신약성서를 대본으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알을 낳고 있었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이면서 종교 개혁의 불씨는 타올랐다. 루터는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에라스무스의 지원을 기대했다. 구교 측에서는 에라스무스에게 루터를 반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루터를 옹호했고, 1520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된 루터를 구명하기 위해 중재를 시도했다. 그 때문에 그는 구교로부터 평생 엄청난 의혹과 공세에 시달렸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관 역할을 했던 알레안더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보다 더 우리의 신앙에 해로운 글을 써댄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원했지만, 교회 분열은 원하지 않았다. 격정적인 루터에 대해 분열과 분파적 행동을 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조언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루터도 에라스무스도 어쩔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면, 루터에게 대항할 생각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우려한 대로 루터의 격정적 성격은 독일 농민 전쟁에서 수많은 농민이 처형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사람은 어찌 보면 물과 불 같은 사이였다. 에라스무스가 물이라면, 루터는 불이었다. 에라스무스가 차분하고 치밀하다면, 루터는 격정적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에라스무스가 1524년에 ‘자유의지론’을 출간하자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기에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구교가 인간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신앙 이외의 행위를 요구해 온 것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의지의 부자유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행위 없는 믿음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선해지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신앙을 비판했다. 불같은 성격의 루터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자유의지론’를 반박하는 ‘의지노예론’를 썼다. 에라스무스는 2년 뒤에 ‘광신’이라는 책을 써서 이를 반박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아무 것도 개선할 수 없다면, 인간에 대한 교육이나 사회적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반박하면서도 에라스무스가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노예의지론’의 결론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당신만이 요점과 핵심을 찔렀습니다. 당신만이 급소를 보았고 나의 목을 조르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충성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말년에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가톨릭 측에 기우는 모습을 보이자, 그를 “모든 종교의 적”이자 “그리스도의 적대자”라 부르기도 했다. 루터파와 가톨릭 양쪽의 종교 논쟁에 지친 에라스무스는 1529년에 바젤을 떠나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했다. 그 사이에 짤막한 책인 ‘아동교육론’을 써서 출간했다. ‘아동교육론’에서 그는 유년기의 아동교육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교육을 통해 무지와 편견 그리고 오류 등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의미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인문주의적 교육관을 피력했다. 이것은 루터와의 논쟁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종교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지지했지만 끝내 가톨릭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가톨릭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더 나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 나은 교회를 원했다. 그에 따르면 신앙이란 단지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이다. 그는 1536년 7월 11∼12일 사이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바젤 대성당에 묻혔다.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비롯해 여러 사람과 논쟁을 벌였지만, 한번도 원칙을 벗어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새겨져 있다.

“Concede nulli”(나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