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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





“사순절 기간 육식 문제 없다” 신임 사제 발언 일파만파

1522년 사순절에 취리히 최초의 인쇄업자 크리스토프 프로사우어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소시지를 먹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소시지를 먹은 일이 큰 사건이라니?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라 하겠지만, 당시에는 사순절 금식기간에 소시지를 먹는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 왜 그런가? 사순절은 중세 가톨릭의 중요한 전통이었다.

사순절은 예수의 부활 전 40일간을 뜻한다. 이 기간은 신도들이 참회와 대속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건하게 맞이하기 위한 기간이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원래 사순절에는 기한이 없었다. 초기에는 사순절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기 이전의 40시간으로 계산해 2, 3일만 지키면 되었다. 기한이 정해진 것은 325년 니케아공의회였다. 40일이라는 기간은 모세의 시나이 산 40일 금식과 엘리야의 호렙 산의 40일 금식, 특히 예수의 광야에서의 40일간의 금식 일수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사순절 기간은 교회마다 차이가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재위 590∼604) 때에 와서 사순절의 시작을 재(灰)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하여 40일을 엄격하게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왜 사순절을 알리는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잡았는가? 기독교에서 재를 뿌리는 의식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구약성서를 보면 재를 뿌리는 행위는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 탄식을 상징한다. 그런데 재를 뿌리는 전통은 10세기 말까지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091년 베네벤토의 주교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전체 교회에 권유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사순절 기간에 죄를 참회하는 행위는 재를 뿌리는 행위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기간에는 철저한 단식이 행해졌다. 초창기에는 단식의 준수가 매우 엄격해서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저녁 무렵의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다. 물론 조류, 육류와 생선 심지어 달걀까지 금지되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신도들은 지키기 힘든 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식 규정은 상당히 완화되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시간도 앞당겨졌고, 식사 외에 가벼운 간식도 허용되었다. 그리고 생선에 대한 금지도 해제되었다. 그러나 육식은 여전히 금지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넘어서면 안 될, 다시 말해 교회 전통이 무너질 수 있는 마지노선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통의 마지노선을 취리히의 일개 인쇄업자가 깨버린 것이다. 물론 소시지를 먹었던 프로사우어와 일행에게 종교적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밀려드는 일 때문에 업무가 과중해 육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변명해야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사순절의 금식 규례를 어긴 인쇄업자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그로스 뮌스터 교회의 신임 사제도 함께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참석했지만 소시지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신임 사제는 소시지를 먹은 사람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설교와 ‘음식물의 선택과 자유에 대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것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신임 사제의 주장은 이내 스위스 종교계에 파장을 몰고 왔다. 이미 이 젊은 사제는 그로스 뮌스터 교회에서 행한 참신하고도 뛰어난 설교로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 신임 사제의 이름은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였다. 그는 이미 새로운 설교로 취리히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취리히에서 그의 35번째 생일이 되는 날인 1519년 1월 1일에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설교를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했다. 당시에는 날마다 정해진 본문에 따라 설교를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성서에 기초해서만 설교를 했다. 설교를 통해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강해하고, 베드로 전후서, 히브리서를 선택해 강해를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없는 당시 사람들로서는 대단한 일이었고 충격이었다. 한 목회자의 입을 통해 성서가 어떤 복음을 전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루터의 성서 번역과 뜻을 같이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반발했다.

츠빙글리는 1522년 7월 2일 뜻을 같이하는 다른 10명의 사제들과 콘스탄츠의 주교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복음을 설교할 자유와 사제들의 결혼할 자유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언급을 하겠지만, 이때 츠빙글리는 비밀리에 결혼을 한 상태였다. 물론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취리히 의회는 츠빙글리 방식대로 성서에 기초한 설교를 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성서적 설교를 했던 츠빙글리의 명백한 승리였다. 츠빙글리는 대성당 사제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1523년 1월 29일에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토론회에 참석했다.

주제는 성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토론회는 대중들 앞에서 신앙을 설명하고 옹호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토론회에서는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가 사용되었기에 종교개혁을 전파하는 주요한 매체이기도 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95개 조 논박문에 비견할 만한 67개 결의를 토론회에서 제시했다. 이것은 청중들 앞에서 최초의 공개적인 가톨릭교회에 대한 논박이다. 콘스탄츠 주교의 대리인이자 츠빙글리의 적수였던 요한네스 파베르는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며 설교 문제가 의회가 인가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설교는 성서의 권위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가톨릭교회는 츠빙글리의 설교에 대해 반대한 것일까? 츠빙글리의 주장대로 설교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서에 근거해야 한다면 사순절에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은 그 근거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한 규정은 성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권, 사면권, 면죄부 등도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스위스 의회는 츠빙글리의 설교가 성서적이며, 모든 사람들은 성서에 따라 설교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츠빙글리는 독일어로 된 67개 결의를 그해 7월에 출간했다. 이제 루터처럼, 츠빙글리도 67개 결의를 통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교회 아닌 성서의 권위 주장… 구교와 맞선 전투서 생 마감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울리히 츠빙글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루터보다 7주 늦은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 자치주의 빌드하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락의 촌장으로 비교적 부유한 농부였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 때문에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그를 데려가고자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빈대학과 바젤대학에서 인문고전 공부를 했으며, 바젤대학에서 1506년에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제 실습기간을 거쳐 22세에 글라루스의 사제로 청빙 받아 그곳에서 10년간 활동했다. 이 기간 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어를 익히고 교부철학과 성서를 연구했다. 이 시기 에라스무스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1516년에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의 비판적 판본을 발간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비판적 판본을 통해 성서에 담긴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동안 사로잡혀 있던 스콜라 신학에서 벗어나 성서 연구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성서는 그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자 그가 의지한 최후의 보루였다.

츠빙글리가 태어난 시대는 애국주의와 스위스 용병 제도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는 1512년부터 1515년까지 스위스 용병부대에서 군종 사제로 복무했다. 글라루스 주민들은 교황을 위한 용병 생활로 경제를 지탱해 왔다. 지역의 목회자로서 그도 자연스럽게 글라루스 용병부대의 군종 사제가 되었다. 용병 제도는 과거 스위스의 슬픈 역사다.

스위스는 국토가 척박해 농사 지을 땅이 부족했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교역도 할 수 없어 가난했다. 스위스가 외국에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길은 용병으로 가는 것 외에 마땅한 것이 없었다.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스위스인들은 전투에서 대단한 용맹을 발휘했다. 게다가 우직스럽게 신의를 지켰다. 스위스 용병의 명성은 금세 높아졌다. 용병산업은 스위스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교황을 비롯해 유럽의 군주들은 스위스인들을 용병으로 앞다퉈 고용했다.

그러나 용병은 돈을 받고 전투를 치르는 전쟁 기계들이었다. 츠빙글리는 마리냐노와 카펠 전투에 참가해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한 다음부터 용병 제도를 반대했다. 그는 용병 제도에 대해 “범죄와 살인을 범한 자들이 용감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며 “그리스도가 그러한 것을 가르쳤는가”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목회하던 글라루스는 용병 제도가 주수입원인 곳이었다. 그는 그곳을 떠나 2년 동안 아인시델른에서 사제생활을 했다. 아인시델른에서 작은 스캔들이 있었다. 그가 어느 처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일이었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자리가 나서 그곳으로 옮겨 가고자 했을 때, 당연히 그 일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순결을 지키지 못했음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상대 후보자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당시 사제들이 몰래 결혼하고 자식을 두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콘스탄츠 주교 관구에서만 한 해에 1500명의 아이들이 사제들에게서 태어났다. 이런 실제적 상황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사제의 결혼 허용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1522년 봄에 그 여인과 비밀리에 결혼했고, 나중에 그 사실을 공개했다.

1519년에 취리히의 목회자로 선출된 그는 성서의 각권을 주제로 삼아 설교하기 시작했다. 1520년 설교가 성서에 근거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취리히 의회가 지지하자 그는 중세교회의 수많은 신조와 관습을 성서에 근거해 계속 비판해 나갔다. 그러나 거센 반발과 공격도 받아야 했다. 그는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 루터의 저작들에서 도움을 구했고, 투쟁의 일환으로 루터 저작들을 판매하기도 했다.

츠빙글리가 루터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나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일찍이 성서 연구와 인문주의 공부를 통해 루터와 비슷한 생각을 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루터를 만나기 전부터 종교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성만찬을 두고 루터와 견해를 달리했다. 루터는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해 우리가 빵을 먹을 때 그리스도의 육체를 먹으며 그것이 구원에서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먹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다른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만찬을 순전히 영적 의미로만 해석했다. 그는 언어 연구를 통해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이것이 내 몸이다”는 “이것이 내 몸을 의미한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만찬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가 받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츠빙글리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루터파와 별도로 자신의 입장을 담은 서신을 따로 제출했다. 이로써 루터와 츠빙글리는 갈라서게 되었다.

츠빙글리가 스위스 종교개혁에 나서게 된 결정적 사건은 앞서 언급한 대로 1522년 ‘소시지 사건’이었다. 그는 1523년 1월 23일 600여명이 참석한 제1차 취리히 토론회에서 67개의 결의 조항을 발표했다. 67개 결의를 통해 그는 교회의 권위에 반대해 성서의 권위를 내세웠고, 사람이나 사물을 통한 구원 추구에 반대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추구를 내세웠다. 1523년 10월에 2차 토론회, 1524년 1월에 3차 토론회가 연속으로 열렸다. 급진주의자들이 미사를 폐지하고, 성상을 때려부수자 미사와 성상이 성서에 맞는가 하는 것을 토론하기 위한 자리였다. 제2차 토론회에서 미사와 성상은 비성서적인 것으로 판결이 났다. 제3차 토론회에서는 가톨릭 측과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있었지만, 의회는 교회에서 조각상과 화상들을 철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취리히 토론회에서 보는 것처럼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시의회의 공개 토론회를 통해 확산해 나갔다. 이런 방식은 시민의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혼란을 적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효과 때문에 스위스나 독일 서남부 여러 도시에서 츠빙글리의 개혁 방식이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단점은 토론회에서 합의를 얻는 과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은 개혁이 지체되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의회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교회의 성상들을 파괴하고, 미사 대신 자기들 방식으로 성만찬을 거행했다.

구교 측과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공격을 받았지만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취리히, 베른, 바젤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스위스의 다른 주들은 여전히 가톨릭을 추종했다. 가톨릭 주에서 몇몇 종교개혁자들이 박해를 받자 츠빙글리는 가톨릭 주들에 대한 공격을 촉구했다. 취리히가 이들 주에 대한 식품 선적을 금지하자 다섯 개의 가톨릭 주들이 연합해 공격해 왔다. 1531년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민들을 독려하기 위해 군목으로 깃발을 들고 직접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취리히 근교 카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했고, 전쟁은 패배로 끝났다. 그의 시신은 네 갈래로 찢겨 화장되었다.

츠빙글리의 죽음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가 뿌려 놓은 씨앗은 죽지 않았다. 하인리히 브링거가 바통을 이어받아 종교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몇 년 후 제네바에서 또 한 명의 강력한 종교개혁가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칼뱅이었다. 그렇게 죽은 씨앗에서 꽃은 피고 있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