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에 교수 된 천재, 날카로운 글로 루터의 개혁을 돕다
1518년 11월 22일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초조하게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뒤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청 아우구스부르크로 소환되어 와 있었던 것이다. 초조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어린 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나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아 죽는다면, 후회는 없다네. 그러나 그대와의 말 할 수 없이 달콤한 교제가 중단되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렵다네.”
루터가 죽음보다 관계가 끊어질까 더 두려워했던 이 젊은 교수는 누구일까? 그 교수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되는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이었다. 멜랑히톤은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다. 독일의 루터 도시 비텐베르크 광장 앞에 가면 루터 동상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또 하나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동상이 멜랑히톤이다. 종교개혁 하면 흔히 루터와 칼뱅을 연상하고, 그들을 도왔던 조력자들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츠빙글리는 칼뱅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으로, 멜랑히톤은 루터의 그늘에 가린 보조 출연자 정도에 그치고 있다.
루터는 멜랑히톤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칭하곤 했다. 실제로 멜랑히톤은 루터교의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기초한 인물이다.
멜랑히톤의 본명은 독일식 이름 필립 슈바르츠에르트(Philipp Schwartzerdt)다. 슈바르츠에르트는 검은 땅을 뜻한다. 이 이름을 희랍어로 바꾼 것이 멜랑히톤이다. 멜랑히톤은 천재였다. 그는 1509년 12세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해 2년 뒤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바로 2년 뒤 튀빙겐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518년 21세의 나이에 종조부 로이힐린의 도움으로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대학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되었다. 멜랑히톤의 종조부 요하네스 로이힐린은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이자 인문주의자였다. 멜랑히톤은 그에게서 어려서부터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로이힐린은 에라스무스와 친분도 있었다. 그 덕분으로 멜랑히톤은 에라스무스도 알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15년에 어린 천재 멜랑히톤을 극찬하며 영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오기 전 이미 여러 책을 냈다. 1518년에 출간한 ‘그리스어교본’은 여러 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대학교 학문의 개혁’이라는 취임 연설을 했는데, 신학과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인문주의 계획을 과감하게 실행하고 고전과 그리스도교 원전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에는 루터 영향으로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 취임 연설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매우 해박하고 흠잡을 데라곤 없는 연설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였고, 대단히 칭송하였다.”
멜랑히톤은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았던 종조부와 의절할 정도로 루터를 따랐다. 당시 루터는 여러 곳에서 무섭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종조부는 훌륭한 인문주의적 지식을 루터를 위해 사용하며 루터를 추종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비텐베르크 대학을 떠나라고 종용했지만 멜랑히톤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종조부는 의절하고 말았다. 루터와 멜랑히톤 두 사람은 한 목표를 향해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루터 같은 사람에게는 멜랑히톤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에라스무스처럼 뛰어난 고전과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논리적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2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루터에 대해 104가지 조목으로 정죄했다. 루터 측의 반박이 필요했다. 이때 루터를 옹호하면서도 소르본의 신학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멜랑히톤이 썼다. 글의 제목은 도발적이게도 ‘파리의 멍청한 신학자들의 광포한 칙령을 논박함’이다. 도발적인 제목과 달리 글은 매우 치밀하게 조목들을 반박하고 있다. 이렇게 멜랑히톤은 날카롭고도 치밀한 글로 루터를 옹호했다. 이미 루터는 1519년 9월 19일 성서학 학위 획득에서 멜랑히톤의 글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그의 답변은 기적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여러 명의 루터 역할을 할 것이다.”
멜랑히톤은 1521년에 ‘신학강요(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의 초판을 발행했다. 이 책은 그가 해왔던 로마서 강의를 발전시킨 작품으로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작품이다. 그는 성서에 기초하여 학문적으로 종교개혁을 옹호했다. 이 책은 루터교 신학의 최대 걸작이자 루터주의 신학의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졌다. 루터는 ‘노예의지론’에서 이 책으로 인해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완벽하게 반박되었다고 말한다.
“당신(에라스무스)의 논증들은 멜랑히톤의 작품 ‘신학강요’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었다. 반박될 여지가 없는 이 작은 책자는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불멸의 고전이 될 만한 책이다…. 이 책과 비교해 보건대 당신의 책은 천하고 하찮은 것이다.”
이처럼 멜랑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치밀하게 이론화하고 교리화했다. 루터가 종교개혁가로서 전면에 나서서 주장하면, 멜랑히톤은 책과 글로 이를 뒷받침했다. 멜랑히톤은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학자나 대학 행정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교육 헌장을 만들고 교재, 교과목의 새로운 편성 등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체제를 개혁했다. 그의 교육개혁은 독일 전역의 대학에서 받아들여져 학생들은 그를 ‘독일의 스승’이라 불렀다.
인문주의적 성향과 행동보다 책과 글로 개혁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멜랑히톤은 어쩌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와 닮은 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멜랑히톤은 루터 사후에 당연히 누려야 할 루터교의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루터교도들은 멜랑히톤을 배척하기도 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루터파는 영웅 원했지만, 종교화해 협상 나선 그는 우유부단했다
1530년 황제 카알 5세는 종교화해를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말은 종교화해였지만 황제는 보름스 칙령 이래 반종교개혁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 해 전에도 황제는 종교개혁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프로테스탄트라 불렀다. 황제 말을 듣지 않는 항거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루터가 1517년 95개조 논박문을 붙인 이래 13년이 지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제후와 귀족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황제는 1526년 제1차 스파이어 제국 의회를 열어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제후와 귀족들이 루터의 개혁신앙을 고백해 오히려 종교개혁을 인정해야 했다. 황제는 제2차 스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앞서의 결정을 철회하고, 종교개혁을 억제할 것을 결의했다.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진영은 황제의 종교정책에 항의하는 공식적 문서를 보내고, 전선을 가다듬었다. 신교와 구교 측의 ‘올바른 신앙’에 대한 논쟁은 제국의 분열을 위협했다.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종교 화해가 필요했다.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다시 소집해야만 했다. 이때 루터는 모든 법적 권리가 박탈당한 상태라 코부르크 성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대신 멜랑히톤이 협상에 참석했다. 루터는 멜랑히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협상에 관여했다.
황제는 신·구교 양측에 신앙고백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멜랑히톤은 프로테스탄트 측의 신앙고백서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해 몇 번의 수정 끝에 제출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총 28개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28개조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조에서 21조까지는 종교개혁가들의 신앙과 교리를 기술했다. 22조에서 28조에 이르는 둘째 부분의 나머지 7개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비판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에 담긴 루터의 성만찬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측 내부의 분열을 담고 있다. 루터는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고 보았지만, 츠빙글리는 그것을 상징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가 갈리게 된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츠빙글리는 제국의회에 ‘신앙의 원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절충적 입장을 취했던 마르틴 부처도 독일 남부 4개 도시의 신앙고백서인 ‘4개 도시 신앙고백서’를 따로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였다. 사실 멜랑히톤도 루터의 성만찬설과 다른 입장이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서는 루터의 입장에 충실하려 했다. 원래 멜랑히톤은 ‘신학강요’ 때부터 성만찬설에 대해 루터와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1540년에 가서 그는 이 조항을 수정해 영적 의미만을 인정했다. 그리고 노예의지론도 수정해 구원은 성령과 인간의지의 공동작용이라는 신인협동설을 취했다. 그러나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성만찬설을 두고 보면, 멜랑히톤은 충실하게 루터를 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멜랑히톤의 협상 태도에 불평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보여준 대담하고도 용기 있는 신앙태도를 기대했다.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그에 맞는 행동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루터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무가 기독교를 위협하는 분열을 막는 것이라 생각해서 조심스러운 전술과 외교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황제에게 호의적인 어법을 사용했고, 루터의 교리가 보편적인 가톨릭 교리와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우유부단하고, 너무 타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루터가 협상과정에서 너무 양보를 많이 했다고 멜랑히톤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터는 그의 입장을 끝까지 두둔하고 신뢰했다.
“나는 멜랑히톤이 쓴 변론문을 다 읽어 보았다. 그것은 아주 마음에 들었고, 더 고치거나 수정할 것이 없었다.”
멜랑히톤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의 동의와 제후들의 서명을 받아 1530년 6월 25일 의회에서 낭독됐다. 그러나 황제는 생각이 달랐다. 가톨릭 측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반박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반박서에 대항하기 위해 멜랑히톤은 신앙고백서의 7배가 넘는 변론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접수하지 않고 가톨릭의 손을 들어주었다. 종교화해가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다시 전쟁의 위기가 감돌았다. 루터는 황제에 저항하기 위한 폭력적 저항의 정당성을 인정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영주들은 천주교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였다. 황제는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도발과 전쟁을 획책했으나, 국내외 혼란한 상황과 영주들의 완강한 반발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종교 갈등은 계속 심화되어 독일은 내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다시 열린 제국의회에서 종교화해가 이루어졌다. 한 나라에는 하나의 신앙이 존재한다는 원칙 아래 ‘통치자의 종교가 백성의 종교가 되도록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루터는 종교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루터 사후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당연히 멜랑히톤이 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멜랑히톤이 슈말칼덴 동맹 이후 종교회담에서 보여주었던 우유부단한 태도로 루터파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멜랑히톤이 순수 루터파와 관계가 악화된 결정적 계기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잠정안(Leipzig Interim)에 그가 동의하면서부터다. 그는 신앙을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본질적인 것이라 변할 수 없으나, 예배 의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과 관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소위 아디아포라 논쟁에서 순수 루터파를 자처하는 암스돌프와 일리리쿠스는 그의 태도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면서 거세게 비판했다. 이 논쟁을 벌일 때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에서 작센의 선제후를 배반한 모리츠 밑에 있었다. 모리츠는 황제의 유혹에 넘어가 작센의 선제후를 배반하고 전쟁을 일으켜 프로테스탄트 측을 배신한 인물이었다. 작센의 선제후는 1588년 예나대학교를 신설해 멜랑히톤에 반대하는 신학을 세우게 했다. 이로서 순수 루터파와 필립파가 갈리게 되었다. 이렇게 멜랑히톤은 루터파로부터 배척되었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변론서는 루터교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이 되었고, 루터파의 일치서에도 포함되었다. 멜랑히톤의 신앙고백서는 영국 성공회의 39개조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1560년 사망해 평생 존경과 사랑을 보냈던 루터의 묘 곁에 묻혔다.
죽기 직전에 멜랑히톤에게 누군가 물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하늘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그러니 내게 더 이상 묻지 말기를!”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1518년 11월 22일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초조하게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뒤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청 아우구스부르크로 소환되어 와 있었던 것이다. 초조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어린 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나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아 죽는다면, 후회는 없다네. 그러나 그대와의 말 할 수 없이 달콤한 교제가 중단되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렵다네.”
루터가 죽음보다 관계가 끊어질까 더 두려워했던 이 젊은 교수는 누구일까? 그 교수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되는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이었다. 멜랑히톤은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다. 독일의 루터 도시 비텐베르크 광장 앞에 가면 루터 동상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또 하나의 동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동상이 멜랑히톤이다. 종교개혁 하면 흔히 루터와 칼뱅을 연상하고, 그들을 도왔던 조력자들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츠빙글리는 칼뱅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으로, 멜랑히톤은 루터의 그늘에 가린 보조 출연자 정도에 그치고 있다.
루터는 멜랑히톤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칭하곤 했다. 실제로 멜랑히톤은 루터교의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기초한 인물이다.
멜랑히톤의 본명은 독일식 이름 필립 슈바르츠에르트(Philipp Schwartzerdt)다. 슈바르츠에르트는 검은 땅을 뜻한다. 이 이름을 희랍어로 바꾼 것이 멜랑히톤이다. 멜랑히톤은 천재였다. 그는 1509년 12세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해 2년 뒤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바로 2년 뒤 튀빙겐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518년 21세의 나이에 종조부 로이힐린의 도움으로 루터가 있는 비텐베르크대학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되었다. 멜랑히톤의 종조부 요하네스 로이힐린은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이자 인문주의자였다. 멜랑히톤은 그에게서 어려서부터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로이힐린은 에라스무스와 친분도 있었다. 그 덕분으로 멜랑히톤은 에라스무스도 알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15년에 어린 천재 멜랑히톤을 극찬하며 영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오기 전 이미 여러 책을 냈다. 1518년에 출간한 ‘그리스어교본’은 여러 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대학교 학문의 개혁’이라는 취임 연설을 했는데, 신학과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인문주의 계획을 과감하게 실행하고 고전과 그리스도교 원전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에는 루터 영향으로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 취임 연설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매우 해박하고 흠잡을 데라곤 없는 연설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였고, 대단히 칭송하였다.”
멜랑히톤은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았던 종조부와 의절할 정도로 루터를 따랐다. 당시 루터는 여러 곳에서 무섭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종조부는 훌륭한 인문주의적 지식을 루터를 위해 사용하며 루터를 추종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비텐베르크 대학을 떠나라고 종용했지만 멜랑히톤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종조부는 의절하고 말았다. 루터와 멜랑히톤 두 사람은 한 목표를 향해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루터 같은 사람에게는 멜랑히톤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에라스무스처럼 뛰어난 고전과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논리적 치밀함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2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루터에 대해 104가지 조목으로 정죄했다. 루터 측의 반박이 필요했다. 이때 루터를 옹호하면서도 소르본의 신학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멜랑히톤이 썼다. 글의 제목은 도발적이게도 ‘파리의 멍청한 신학자들의 광포한 칙령을 논박함’이다. 도발적인 제목과 달리 글은 매우 치밀하게 조목들을 반박하고 있다. 이렇게 멜랑히톤은 날카롭고도 치밀한 글로 루터를 옹호했다. 이미 루터는 1519년 9월 19일 성서학 학위 획득에서 멜랑히톤의 글을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그의 답변은 기적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여러 명의 루터 역할을 할 것이다.”
멜랑히톤은 1521년에 ‘신학강요(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의 초판을 발행했다. 이 책은 그가 해왔던 로마서 강의를 발전시킨 작품으로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작품이다. 그는 성서에 기초하여 학문적으로 종교개혁을 옹호했다. 이 책은 루터교 신학의 최대 걸작이자 루터주의 신학의 근본원리로 받아들여졌다. 루터는 ‘노예의지론’에서 이 책으로 인해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완벽하게 반박되었다고 말한다.
“당신(에라스무스)의 논증들은 멜랑히톤의 작품 ‘신학강요’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었다. 반박될 여지가 없는 이 작은 책자는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불멸의 고전이 될 만한 책이다…. 이 책과 비교해 보건대 당신의 책은 천하고 하찮은 것이다.”
이처럼 멜랑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치밀하게 이론화하고 교리화했다. 루터가 종교개혁가로서 전면에 나서서 주장하면, 멜랑히톤은 책과 글로 이를 뒷받침했다. 멜랑히톤은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학자나 대학 행정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교육 헌장을 만들고 교재, 교과목의 새로운 편성 등 대학에서부터 초등학교까지 교육체제를 개혁했다. 그의 교육개혁은 독일 전역의 대학에서 받아들여져 학생들은 그를 ‘독일의 스승’이라 불렀다.
인문주의적 성향과 행동보다 책과 글로 개혁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멜랑히톤은 어쩌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와 닮은 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멜랑히톤은 루터 사후에 당연히 누려야 할 루터교의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루터교도들은 멜랑히톤을 배척하기도 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루터파는 영웅 원했지만, 종교화해 협상 나선 그는 우유부단했다
1530년 황제 카알 5세는 종교화해를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말은 종교화해였지만 황제는 보름스 칙령 이래 반종교개혁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 해 전에도 황제는 종교개혁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프로테스탄트라 불렀다. 황제 말을 듣지 않는 항거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루터가 1517년 95개조 논박문을 붙인 이래 13년이 지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제후와 귀족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황제는 1526년 제1차 스파이어 제국 의회를 열어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제후와 귀족들이 루터의 개혁신앙을 고백해 오히려 종교개혁을 인정해야 했다. 황제는 제2차 스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앞서의 결정을 철회하고, 종교개혁을 억제할 것을 결의했다.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진영은 황제의 종교정책에 항의하는 공식적 문서를 보내고, 전선을 가다듬었다. 신교와 구교 측의 ‘올바른 신앙’에 대한 논쟁은 제국의 분열을 위협했다.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종교 화해가 필요했다.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를 다시 소집해야만 했다. 이때 루터는 모든 법적 권리가 박탈당한 상태라 코부르크 성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대신 멜랑히톤이 협상에 참석했다. 루터는 멜랑히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협상에 관여했다.
황제는 신·구교 양측에 신앙고백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멜랑히톤은 프로테스탄트 측의 신앙고백서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해 몇 번의 수정 끝에 제출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총 28개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28개조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조에서 21조까지는 종교개혁가들의 신앙과 교리를 기술했다. 22조에서 28조에 이르는 둘째 부분의 나머지 7개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비판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에 담긴 루터의 성만찬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측 내부의 분열을 담고 있다. 루터는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고 보았지만, 츠빙글리는 그것을 상징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가 갈리게 된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츠빙글리는 제국의회에 ‘신앙의 원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절충적 입장을 취했던 마르틴 부처도 독일 남부 4개 도시의 신앙고백서인 ‘4개 도시 신앙고백서’를 따로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였다. 사실 멜랑히톤도 루터의 성만찬설과 다른 입장이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서는 루터의 입장에 충실하려 했다. 원래 멜랑히톤은 ‘신학강요’ 때부터 성만찬설에 대해 루터와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1540년에 가서 그는 이 조항을 수정해 영적 의미만을 인정했다. 그리고 노예의지론도 수정해 구원은 성령과 인간의지의 공동작용이라는 신인협동설을 취했다. 그러나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성만찬설을 두고 보면, 멜랑히톤은 충실하게 루터를 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멜랑히톤의 협상 태도에 불평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보여준 대담하고도 용기 있는 신앙태도를 기대했다.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그에 맞는 행동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루터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무가 기독교를 위협하는 분열을 막는 것이라 생각해서 조심스러운 전술과 외교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황제에게 호의적인 어법을 사용했고, 루터의 교리가 보편적인 가톨릭 교리와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우유부단하고, 너무 타협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루터가 협상과정에서 너무 양보를 많이 했다고 멜랑히톤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터는 그의 입장을 끝까지 두둔하고 신뢰했다.
“나는 멜랑히톤이 쓴 변론문을 다 읽어 보았다. 그것은 아주 마음에 들었고, 더 고치거나 수정할 것이 없었다.”
멜랑히톤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의 동의와 제후들의 서명을 받아 1530년 6월 25일 의회에서 낭독됐다. 그러나 황제는 생각이 달랐다. 가톨릭 측 학자들을 동원해 이에 대한 반박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반박서에 대항하기 위해 멜랑히톤은 신앙고백서의 7배가 넘는 변론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접수하지 않고 가톨릭의 손을 들어주었다. 종교화해가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다시 전쟁의 위기가 감돌았다. 루터는 황제에 저항하기 위한 폭력적 저항의 정당성을 인정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영주들은 천주교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였다. 황제는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도발과 전쟁을 획책했으나, 국내외 혼란한 상황과 영주들의 완강한 반발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종교 갈등은 계속 심화되어 독일은 내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다시 열린 제국의회에서 종교화해가 이루어졌다. 한 나라에는 하나의 신앙이 존재한다는 원칙 아래 ‘통치자의 종교가 백성의 종교가 되도록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루터는 종교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루터 사후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당연히 멜랑히톤이 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멜랑히톤이 슈말칼덴 동맹 이후 종교회담에서 보여주었던 우유부단한 태도로 루터파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멜랑히톤이 순수 루터파와 관계가 악화된 결정적 계기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잠정안(Leipzig Interim)에 그가 동의하면서부터다. 그는 신앙을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본질적인 것이라 변할 수 없으나, 예배 의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과 관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소위 아디아포라 논쟁에서 순수 루터파를 자처하는 암스돌프와 일리리쿠스는 그의 태도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면서 거세게 비판했다. 이 논쟁을 벌일 때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에서 작센의 선제후를 배반한 모리츠 밑에 있었다. 모리츠는 황제의 유혹에 넘어가 작센의 선제후를 배반하고 전쟁을 일으켜 프로테스탄트 측을 배신한 인물이었다. 작센의 선제후는 1588년 예나대학교를 신설해 멜랑히톤에 반대하는 신학을 세우게 했다. 이로서 순수 루터파와 필립파가 갈리게 되었다. 이렇게 멜랑히톤은 루터파로부터 배척되었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변론서는 루터교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이 되었고, 루터파의 일치서에도 포함되었다. 멜랑히톤의 신앙고백서는 영국 성공회의 39개조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1560년 사망해 평생 존경과 사랑을 보냈던 루터의 묘 곁에 묻혔다.
죽기 직전에 멜랑히톤에게 누군가 물었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하늘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그러니 내게 더 이상 묻지 말기를!”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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