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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냉혹한 열정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





박해받는 신교도 위해 ‘기독교 강요’ 저술… 유럽 역사를 새로 쓰다

“쾅, 쾅, 쾅.” 누군가 문을 부술 모양으로 두들겼다. “빨리 문을 열라.” 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방문은 아직 잠겨 있다. 그렇지만 곧 열릴 것이다.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창문 아래 정원 쪽이었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정원은 한참 아래에 있었다. 이미 문이 덜컹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청년은 커튼을 꼬아 정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정원 쪽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가까스로 정원으로 내려와 도주에 성공했다. 커튼을 타고 내려와 도주에 성공한 이 청년은 얼마 전 파리 대학 학장이 행한 연설의 실제 작성자로 의심받고 있었다. 이 청년의 친구인 파리대학 학장 니콜라 콥은 1533년 11월 1일 만성절에 관례대로 새 학기를 여는 연설에서 마태복음 5장 3∼8절의 팔복에 관해 설교를 했다. 설교 내용은 인문주의적이고, 종교개혁적이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영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소르본 신학교는 이 연설을 이단적이라고 비난했다. 프랑스 남부에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 즉각 체포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파리대학 학장 콥의 연설문의 배후로 드러난 이 청년도 몸을 숨겨야 했다. 실제로 파리대학 학장의 연설문을 작성했을 것이라 의심받은 이 청년은 존 칼뱅이었다. 그때 나이 24세였다.

칼뱅은 체포령을 피해 새로운 사상이 불어오고 있는 앙굴렘으로 갔다. 앙굴렘은 프랑수아 1세의 여동생이자 나바르 여왕인 마르게리트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마르게르트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읽을 수 있었고,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여성이었다. 그녀 주변으로 인문주의적 지식을 갖춘 종교개혁적 성향의 진보적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칼뱅은 앙굴렘에 사는 친구 루이 뒤 틸레의 집을 은신처로 삼았다. 앙굴렘에는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기에 그곳을 이용해 계속 학문을 할 수 있었다. 1534년 5월 그는 고향 누아용을 방문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받는 성직록을 포기했다. 이로써 그는 구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성직록을 포기한 까닭은 그의 종교개혁을 향한 회심 때문이었다. 그의 회심은 파리대학 학장 콥의 연설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557년에 쓴 ‘시편 주석’의 서두에서 회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이 교황청의 미신에 매우 집요하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깊은 나락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깨우침과 수용력으로 인도한 직접적인 변화(subita conversione ad docilitatem)를 통하여’ 나이가 들어 이미 제법 완고해진 마음을 변화시키셔서 개종하도록 인도하셨다. 참된 개혁주의 신앙의 확실한 맛을 보고나자마자 그 신앙 안으로 더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나에게 불타올랐다.”

회심에 대한 칼뱅의 진술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라틴어 ‘subita’라는 말이다. subita는 갑작스러운 뜻도 있지만, 매개가 없는 직접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subita라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인 변화가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칼뱅은 회심 이전에도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회심은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일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회심 이전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통렬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하느님의 대적이었다. 나는 하느님께 절대 순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만과 악이 가득 차 있었다. 또한 하느님께 대적하여 영원한 죽음으로 뛰어드는 악독하고 완고함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하느님이 긍휼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고 무궁한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나는 분명 멸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칼뱅의 회심은 진정한 신앙을 위한 ‘터닝 포인트’였다. 그는 회심 이후 종교개혁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시가 널려 있는 고달픈 길이었다.

칼뱅이 숨어 지내며, 그래도 한편으로 자유를 누렸던 앙굴렘에서의 짧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칼뱅이 고국 프랑스를 떠나 평생 외국을 떠돌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종교개혁 성향의 독일 선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략적 차원에서 종교개혁에 대해 제한적이지만 관용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그러한 관용정책을 접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1543년 10월 17일 밤, 프랑수아 1세의 침실 밖에 팸플릿이 붙었다. 그것은 미사를 용서할 수 없는 영적 남용으로 비난하는 글이었다. 팸플릿은 왕의 침실에만 붙은 게 아니었다. 성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팸플릿이 붙여진 다음날, 왕은 자신이 자는 곳까지 누군가 몰래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프랑수아 1세는 이런 상황을 영적인 전투상황이자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독일 선제후들과의 전략적 제휴는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되었다. 그는 미사와 교회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행위를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종교개혁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끔찍한 탄압을 당했다. 프랑스에 남아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칼뱅도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스트라스부르로 갔다가 1535년에 스위스의 바젤로 건너갔다. 바젤은 1529년 종교개혁에 이미 동참했고,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지 않는 도시였다. 인문주의 성향의 대학이 있었고, 새로운 사상을 접하고 또한 전파하기 좋은 출판의 중심지였다.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프랑스의 소식을 계속 들을 수 있었다. 칼뱅은 이미 프랑스에서 도망쳐 온 친구 콥을 이곳에서 만나 언어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칼뱅이 존경했던 에라스무스도 그해에 바젤에 정착했다. 그가 에라스무스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바젤은 칼뱅이 종교개혁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젤에서도 칼뱅은 불안했다. 마르티누스 루시아누스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박해받는 신교도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박해받는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옹호하기 위해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1536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의 이름은 ‘기독교 강요’였다. 칼뱅은 대담하게 ‘기독교 강요’를 프랑수아 1세에 헌정하며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옹호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한 중세교회의 잘못된 모든 과정을 밝히고, 종교개혁은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책으로 칼뱅은 유명세를 얻었다. 이 책은 앞으로 유럽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고, 유럽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 책은 종교개혁가로서 칼뱅이 걸어가야 할 운명도 함께 결정지었다. 그러나 칼뱅은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을 만나기 전까지 그러한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칼뱅 “종교개혁적 신앙고백하라” 강요… 시민 불만 폭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1489∼1565)은 어떠한 사람일까? 파렐은 칼뱅이 1536년 여름 제네바로 오기 전에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제네바는 1536년 5월 21일 전체 시민회의를 통해 “오직 복음서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는 서약을 했다. 가톨릭 주교의 도시에서 개신교를 유일한 신앙으로 받드는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제네바가 개신교 도시로 된 것은 파렐의 열정적이고, 선동적인 설교 덕택이었다. 그의 설교는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지만 과격했다. 에라스무스는 파렐을 “일생 동안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뻔뻔하고 과격한” 사람으로 평했다. 파렐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데리고 막무가내로 가톨릭교회로 쳐들어가 미사를 방해하고,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하여 교회에서 그림들을 내다 버리게 했고, 미사를 폐지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제네바에서 가톨릭 세력을 쫓아내고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성공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과격한 행동가였지, 창조적 혁명가는 아니었다. 행동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 칼뱅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당시 제네바의 상태에 대해 칼뱅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처음 이 교회에 왔을 때,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설교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관련된 그림들을 불태웠지만, 진정한 종교개혁은 없었다. 그곳에서는 혼잡한 무질서 외에 어떠한 것도 없었다.”

칼뱅은 원래 제네바에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 유산 정리 문제로 파리로 갔다가 동생들을 데리고 스트라스부르로 여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의 수호자인 카를 5세의 영향권을 벗어나 안전하게 제네바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도중에 파렐을 만난 것이다. 파렐은 1534년 칼뱅과 비슷한 목적으로 ‘간결하고 간명한 해설’이라는 책을 출판했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강요’를 읽은 다음 칼뱅의 탁월함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그는 칼뱅을 붙잡고자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칼뱅은 1557년 ‘시편 주석’의 헌정사에서 파렐에 대해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개인적 공부에 헌신하기 원한다고 말하며 아무리 요청해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저주의 말을 하였다. ‘만일 당신이 이 위기 가운데서 나를 돕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평안함에 나의 저주를 보내실 것이다.’ 나는 파렐의 말로 인하여 놀라게 되었고, 계획한 여행을 포기하였다.”

과격한 행동가였지만 파렐은 사람을 알아보는 뛰어 난 안목이 있었다. 그는 칼뱅을 만나고 나서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그를 평생 지도자이자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칼뱅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칼뱅에게 협박과 저주를 퍼붓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종교개혁의 길로 내몰았다.

파렐로 인해 칼뱅은 제네바에서 ‘성경 교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미미했다. 제네바 시의 서기는 그의 이름조차 몰라 월급 명부에 ‘그 프랑스인’이라고 적을 정도였다. 그러나 칼뱅은 타고난 치밀한 기획자이자 이론가였다. 그는 무질서한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질서한 제네바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교회행정에 관한 규칙과 시민교육용 신앙고백서를 만들 생각을 했다. 그는 1537년 1월 ‘교회행정에 관한 조례’를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조례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시편 찬송을 부를 것, 성찬을 매월 시행할 것, 어린이를 위한 교육을 실시할 것, 결혼법을 개혁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칼뱅은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문답을 출판했는데, 나중에 여기에 21개 조항으로 된 간단한 ‘신앙고백서’를 추가 발간했다. 그는 모든 시민들이 이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고, 맹세할 것을 시의회에 요구하였다. 시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제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 바로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칼뱅은 야심차게 제네바에서 모범적인 신앙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네바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10명씩 관원 앞으로 나와 오른손을 들고 그가 만든 신앙고백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시도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불평을 샀다. 공개적인 신앙고백 방식은 루터가 주장한 ‘기독교인의 자유’와 ‘개인의 양심’과 충돌하는 것이 된다. 신앙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이나 부도덕한 행위를 한 사람은 성만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성만찬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었다. 그에게 물건을 사거나 팔아서도 안 되었다.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그 사람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칼뱅은 이런 성만찬을 매주 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시 당국이 성만찬을 1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지만, 성만찬의 위력은 대단했다. 제네바 시민들은 성만찬에서 배제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했다. 단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즐거워서 노래를 하다가 또는 너무 화려한 옷을 입었다가, 칼뱅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제네바 시민들은 칼뱅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평을 쏟아냈다.

“프랑스에서 흘러들어 온 외국인에게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우리가 책망을 받아야 하는가?”

1537년 11월 시의회는 신앙고백에 서약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시키도록 한 결정을 문제 삼았으며, 1538년 1월 4일에는 누구도 성만찬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다. 칼뱅과 그를 지지하는 목사들의 과도하고도 성급한 종교개혁적 시도는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시민들의 불평만 샀다. 그런 와중에 공개적 신앙고백과 성만찬을 권징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칼뱅을 비판한 장 필립이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새로운 시 당국은 칼뱅과 추종자들에게 교회 규칙의 시행을 목사에게만 맡기질 않고, 시 정부의 관료에게 맡기도록 하는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엘리 코랄이라는 목사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격하다 체포되었다. 칼뱅과 파렐을 포함한 목사들은 부활절에 성만찬을 집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의회는 그들에게 설교를 금지했다. 부활절이 다가오자 칼뱅은 이 금지를 무시하고 성피에르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그는 강단에서 성만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성스러운 육체를 개들에게 던지기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칼뱅에게서 개들로 취급받은 시당국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최고회의인 200인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시당국의 명령을 무시한 칼뱅과 목사들을 해임할 것인지 의결에 부쳤다. 압도적인 다수가 찬성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칼뱅과 그 추종자들은 직위에서 해제되고 사흘 안에 도시를 떠나라는 선고를 받았다. 칼뱅이 18개월 동안 수많은 시민을 위협했던 추방의 벌이 자신에게 떨어졌다. 1538년 4월 23일 아침 그들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칼뱅은 추방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제네바 시당국으로부터 돌아와 달라는 간청을 받게 된다. 1541년 9월 13일에 제네바에 도착한 추방자 칼뱅을 시당국은 특별한 예우를 갖춰 영접하였다. 그 사이 어떠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엄격한 교회규율 적용 화형까지… ‘관용없는 개혁’ 비난받아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100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540년 3월 29일에 파렐에게 보낸 글이다. 파렐이 제네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을 때, 왜 칼뱅은 차라리 100번 이상 죽는 게 낫다며 거부했을까? 파렐과 칼뱅이 떠난 후 제네바는 다시 구교의 회유와 공세에 시달렸다. 명망 높은 추기경 야고보 사돌레토는 1539년 5월 제네바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톨릭교는 오류가 없으니, 교황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선동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마땅한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칼뱅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6일 만에 칼뱅은 ‘추기경 사돌레토에 대한 응답’을 작성했다. 이 서신은 짧고 정확하게 교황청의 부정을 지적하면서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설명해 구교의 공세를 무력화했다. 이 사건 이후 제네바의 목회자들은 칼뱅에게 여러 차례 제네바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칼뱅은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가 제네바에 다시 온 것은 이 서신을 작성한 후 2년이 더 지난 1541년 9월이었다. 칼뱅은 사실 제네바에 돌아갈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신약성경을 강의하며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보냈다. 항상 존경하던 마르틴 부처와 함께 일하면서 하게나우, 보름스 종교회의에 스트라스부르 대표로도 참석해 종교개혁운동에 앞장섰다. 한편 그는 ‘기독교 강요’ 제2판(1539년), ‘로마서주석’(1540년) 등 여러 저술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1541년에 기독교 강요 제2판을 프랑스어로도 출판해 프랑스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프랑스 당국은 즉각 이 책을 금서목록에 올리고,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불질러버렸다. 칼뱅은 제2판에서 초판의 내용을 훨씬 확대시켰다. 초판은 6장이었으나, 2판은 17장으로 확대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약과 구약의 유사성과 차이성,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의 생애 등 새로운 내용이 들어갔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쓴 이래 죽을 때까지 이 책을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갔다. 최종판은 1599년에 나왔고, 초판에 비해 5배 정도 늘어났다. 내용은 늘어났지만 초판에서부터 최종판까지 그의 입장은 시종일관했다. 저술 작업 이외에도 칼뱅은 인생에서 중요한 성과를 스트라스부르에서 얻었다.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의 부인이었던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을 한 것이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시간은 칼뱅에게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모두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스트라스부르에서 수많은 십자가가 당연히 기다리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정적인 파렐은 이번에도 칼뱅을 하나님의 저주로 협박하며 몰아붙였다. 칼뱅은 못마땅했지만 ‘주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심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칼뱅은 돌아오자마자 권징을 포함한 교회 규율의 제정을 요구했다. 칼뱅이 초안을 작성한 교회 규율은 시의회에서 수정을 거쳐 채택됐다. 교회 규율에 의하면 교회 직제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가지 직분으로 구분된다. 목사의 직분은 공적인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 그리고 상담이다. 교사는 참된 가르침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며, 신학적인 교육뿐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모든 학교 영역을 관장한다. 장로는 성도의 삶을 감독하는 사역을 한다. 집사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역을 한다. 칼뱅은 12명의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종교국을 만들어 교회규율을 담당하게 했다. 이 종교국은 직접 처벌은 할 수 없지만, 권징은 할 수 있었다. 종교국의 권징은 세속 권력의 처벌로 그대로 이어졌다. 칼뱅은 이 종교국을 통해 신정정치를 구현했다. 그의 신정정치는 엄격했고 가혹했다. 처음 5년 동안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 오죽하면 감방마다 죄수로 가득 차서 간수장이 시당국에 단 한 명의 죄수도 더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할 정도였다.

제네바는 엄격한 개신교 도덕과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모범도시로 찬양도 받았지만, 더 이상 활기찬 도시는 아니었다. 신성한 노동 이외에 노래, 춤, 카드놀이 등 모든 쾌락을 금지했다. 당연히 칼뱅에 대한 불만도 증가했다. 처음에 칼뱅의 지지자였던 사람들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았다. 카드놀이 금지로 피해를 본 카드 제조업자 피에르 아모는 칼뱅을 “제네바를 프랑스인이 지배하도록 만든 자”라며 비방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속옷 차림으로 횃불을 들고 시내를 순회하며 칼뱅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처벌이 내려졌다. 존경받던 제네바 시민이 굴욕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당국은 성 제르베 교회 앞에 교수대를 세웠다. 그러나 반항과 충돌은 줄지 않았다.

칼뱅의 신학론에 대한 반발도 이어졌다. 칼뱅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다고 하는 예정론을 주장했다. 제롬 볼섹은 칼뱅의 예정론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복사판이며, 하나님을 죄의 근원이자 폭군으로 만들 뿐이라고 비난했다. 제롬 볼섹은 체포되었고 심문을 받은 후 추방됐다. 이후 장 트롤리에가 볼섹과 유사한 비난을 칼뱅의 예정론에 퍼부었다. 그런 와중에 칼뱅에게 ‘냉혹한 독재자’의 인상을 심어준 결정적 사건은 1553년 10월 27일에 있은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이었다. 세르베투스는 소 혈액순환을 발견한 유명한 의사이자 신학자이었지만, 삼위일체를 공공연하게 부정했다. 칼뱅은 그가 온다면 산 채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별렀다.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와서 예배를 보는 도중에 체포되었고, 심문을 거쳐 화형을 당하였다. 이를 놓고 인문학자 카스텔리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나오지 않는 교리’ 때문에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고 칼뱅을 맹비난했다. 카스텔리오를 옹호하며 독일의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가 쓴 ‘폭력에 대항한 양심’은 냉혹한 독재자로서의 칼뱅의 인상을 현대인에게 심어주었다.

이렇게 칼뱅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서도 적대자들에게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칼뱅의 단호하고도 관용 없는 개혁이 없었다면 제네바는 단시간에 성서에 따라 사는 종교개혁의 도시로 탈바꿈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뱅은 죽기 전에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세워 수많은 개혁주의 학자들을 배출해 개신교의 가르침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존 녹스는 이런 제네바를 보고 “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로 찬양하기도 했다.

칼뱅은 자신의 적대자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결코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평생 칼뱅은 서너 시간의 잠만 잤고 하루에 단 한 번의 검소한 식사를 했다. 그것도 일을 하면서 재빨리 해치웠다. 그의 몸은 온갖 병을 달고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그래도 그는 4000번이 넘는 설교를 했고, 270회의 결혼주례를 했고, 50회의 세례를 거행했다. 또 죽을 때까지 가르치며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칼뱅이 말년에 과로로 쓰러지자 동료들이 휴식을 권했다. 그때 칼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내가 게으름 피우고 있는 것을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칼뱅의 눈으로 볼 때 제네바 시민들은 나태하고 연약했다. 칼뱅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권징, 즉 채찍질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식 율법주의이지 사랑의 권고는 아니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