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인 상황
중세시대 1,000년을 타락하고 부패한 암흑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러 가지 신학적, 교회적, 윤리적 악습들이 난무하고 진리가 어두워지고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온 유럽을 다스리고 있던 중세시대는 교황의 권세가 대단했다. 당시 교황권의 지배를 받던 모든 사람들이 교황 제도와 교황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불평했다. 독일 교회도 교황의 통치 아래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교황제도로부터 자유와 독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원했다. 이처럼 중세는 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권위로 가득했지만 어두움을 물리칠만한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제 어두운 중세시대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부르셨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개혁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큰 빛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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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생가 - 아이슬레벤
구워 먹을 수 없는 백조가 탄생한 곳, 루터 생가이다. 16세기의 중심 인물이 된 루터는 (Martin Luther, 1483-1546) 1483년 11월 10일, 과거 동독의 작센 지역인 아이슬레벤(Eisleben)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첫째 아들(혹은 둘째)로 태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날인 11월 11일 성 베드로- 바울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 받은 날이 교회력으로 ‘마르틴’ 성자를 기르는 날이어서 세례명으로 마르틴(Martin)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 베드로-바울교회는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세례대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루터가 태어난 지 6개월 쯤 되어 루터의 부모는 약간의 돈과 재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큰 광산지역인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루터의 어린 시절은 혹독한 가난과 싸우던 시기였다. 그의 부모는 교육받지 못한 하급 신분으로 경제적 여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루터는 촌스러운 자신의 배경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평소 “나는 농부의 아들이며 (ich bin eins Bauern),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선조들은 모두 정직한 농민들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농민들의 사상과 감정과는 대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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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젊은 루터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훈련은 엄격한 부모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교육 기술의 주요 수단은 체벌이었으며 루터의 부모도 매우 엄격한 훈육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모는 루터가 약간만 잘못했어도 혹독한 체벌을 했기 때문에 루터는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 또한 학교에서도 교사들은 어린이들을 구타하면서 라틴어 초급 문법을 가르쳤다. 루터도 학교에서 매를 맞으며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아무리 루터의 어린 시절이 혹독했다 할지라도 그는 부모의 훈육이 오직 사랑 안에서 행해졌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경건한 기독교인 어머니 마가레테(Margarete)는 그를 어릴 적부터 철저한 신앙생활을 가르쳤는데,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 루터는 요리문답,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그리고 라틴 문법과 독일어 찬송을 배웠다.
한편 아버지 한스(Hans Luther)는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여 만스펠트 백작의 법률고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육에 집념이 강한 아버지는 어린 루터를 라틴어 학교에 입학 시켰다. 그리고 루터가 14살이 되었을 때 부친은 그를 아이젠나흐에 있는 라틴어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 학교에서 루터는 종교, 도덕, 정확한 문법, 라틴어, 논리학, 웅변술, 시, 음악 등을 배웠다. 이런 과목들은 장래 루터가 신학자로서 활동과 종교개혁을 수행하는데 효과적인 기본 도구들이 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을 만스펠트, 막데부르크(Magdeburg),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등지에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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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푸르트 대학의 루터
1501년, 학문에 대한 열정이 점점 뜨거워진 18살의 루터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에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곳 대학에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인문주의 학문의 권위자들로 존경받는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라틴어 실력이 탁월한 루터는 고전 라틴 작품들, 중세 철학, 스콜라 철학, 논리학, 변증법, 수사학, 물리학, 형이상학, 라틴어 성경, 고대의 고전에 대한 연구, 그리고 자신이 원하던 문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루터는 언어를 성령의 검을 보관하는 칼집으로 여겼으며, 대학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 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열의를 다하여 공부를 했고 좋은 성과를 얻었는데 4년 후인 1502년에는 인문학 학사학위를 받고, 1505년에는 인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루터는 그의 아버지의 큰 기대에 따라 법률가가 되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법률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루터가 세속 법률 교육을 받도록 학비를 계속 지원했고, 심지어는 턱 없이 비싼 책인 법전까지 사 주었다. 루터는 1505년 부활절부터 법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터는 갑자기 법률 공부를 그만 두었다. 신기하게도 루터에게 돌연한 방향 전환이 생겼다. 루터는 같은 해 7월 17일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Augustinerkloster) 의 문을 두드렸다. 루터는 신학으로 기울어졌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새로운 그의 인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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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나흐에서 젊은 루터의 고된 훈련
독일의 중부 튜링엔의 아담한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는 루터 당시 4,500명의 아이제나흐 인구 중 400명 정도가 수도사내지는 수녀들이어서 성직자들의 서식처(Pfaffennest)로 블리워졌다. 이곳에는 루터의 외갓집이 있었고, 루터가 청소년 학창시절을 보냈다. 14살 청소년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뛰어났다. 그는 명문 귀족 집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류트(lute)를 연주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어느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부유하고 상류 귀족인 우르술라 코타 (Ursula Cotta) 부인은 루터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루터는 코타 부인의 사랑스런 섬김 속에 하숙생으로서 코타 하우스(Cotta Haus)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광산촌 서민 출신이었던 루터는 부유하고 교양있는 귀족들의 상류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으로서 루터는 이곳에서 1498년부터 1501년 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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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학창시절에 행복하게 살았던 이 루터하우스 (Luther haus)는 후에 아이제나흐의 목사관으로 쓰여지다가 지금은 루터의 학창시절과 그 생애, 지역교회의 역사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쓰여지고 있다. 루터하우스는 이 도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독일 전통가옥 (Fachwerkhaus)중 하나다. 또한 루터가 살던 집 옆의 거리 구석에는 작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고 그 밑에 다음의 글이 쓰여져 있다. "Und wenn ich wu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wurde ich doch heute ein Apfelbaumchen pflanzen".- Martin Luther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적은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구절과 루터의 이름과 문장이 적혀있다. 우리가 대부분 이 말이 스피노자 (Spinoza, 1632-1677)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루터의 말이었다. 스피노자는 루터보다 뒤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스피노자가 인용했으리라 본다. 루터의 표현이 원조인 셈이다.
또한 이 도시에는 1498년 마르틴 루터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게오르겐 교회(Georgenkirche)가 있는데 루터는 이 교회에서 약 3년 동안 소년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당시 폰 카이저베르크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에 눈을 뜬 루터는 그 이후 광명의 빛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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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토테른하임 - “루터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신다. 심한 폭풍 가운데서 나타나서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축을 흔드는 천둥과 번개로 루터에 나타나셨다.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한 루터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먼 길을 걸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친구와 함께 들판을 걷고 있던 루터는 폭우를 만났고, 그때 옆에 있던 친구 (후에 알렉시우스라고 불려짐)가 천둥 번개 속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천둥 번개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하지만, 루터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벼락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벼락에 맞아서 죽은 한 친구의 죽음은 루터의 일생 중에서 가장 두려웠던 경험이었을 것이다. 번개가 번쩍하는 사이에 루터는 허겁지겁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평소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루터는 그만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만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온 몸이 떨리도록 느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다급한 심정으로 그는 성 안나를 향해 앞으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한다.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 안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한 것은 그가 아직 주님과의 만남이 분명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1505년 7월 2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 루터의 서원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환경에 의해 일어났다.
루터는 단 한 번의 벼락 사건 때문에 훌륭한 법률가가 되겠다던 인생의 목표를 일순간에 수도사로 바꿔버렸다. 루터는 결코 소명감에서 비롯된 결단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그리고 다가올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도사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의 체험은 루터 생애에 있어서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 루터처럼 우리들도 생의 전화점이 되는 슈토테른하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슴 설레이고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현장인 슈토테른하임의 주위는 넓고 푸른 들판이었다. 이곳에 이 위대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1917년 높이 2m의 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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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서원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룩한 땅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에서 이곳에 떨어진 번개가 젊은 루터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2. Juli. 1505
1505년 7월 2일
“도우소서, 성 안나여,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튀링겐에서 빛이 발하다
빛이 밝아오는 중세 암흑기 -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하다”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많은 전도자들의 복음 전파로 인해 타올랐던 복음의 등불은 중세기 유럽에서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중세 암흑기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진리가 완전히 가리어져 있었고, 교회들이 참된 영적 생명과 활력이 없었다. 교회가 부패한 상태로 타락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개신교 설교자가 없던 시기이며 그 누구도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오랜 동안 종교적인 불만 및 소란함이 쌓이고 쌓였다. 중세교회의 억압은 깨트려지고 닫힌 문이 열려져야 한다. 이제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악행을 정화하여 철저하게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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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부패한 중세시대를 마무리 하시기 위해 젊은 루터를 고된 시련을 겪게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터는 신앙 교육과 삶의 시련으로 훈련되어져 가고 있었다. 경건한 평민에 속한 젊은 루터는 수준 높은 교육의 결핍과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의 얼굴은 더욱 더 강인해 졌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전투적인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는 무엇인가 살아있는 신앙을 원하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개혁이었다. 에르푸르트대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있던 루터는 벼락 사건으로 인해 법관으로서의 희망을 포기했다. 그의 부친은 루터가 수도사보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루터는 장차 법률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키면서 결국 어거스틴 수도원을 향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은 사실상 루터의 종교개혁의 불은 슈톤테른하임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문한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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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년 7월 2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우뢰로 인해 슈토테른하임에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루터는 2주 지난 7월 17일에 성 어거스틴 수도원 (Augustinerkloster)으로 들어갔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라고도 불리우는 성 어거스틴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수도원이다.
에르푸르트에는 당시 약 2000 여개의 많은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루터가 입문한 어거스틴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적이며 개혁의식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었다. 또한 어느 수도원보다도 더 엄격한 계율과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이러한 수도원에서 루터는 허름한 의복과 소식, 기도와 명상, 낮 시간의 노동, 예배, 찬양, 미사, 고해성사, 매일의 의무, 음식을 조달하는 방법 등에 관 규칙들을 모두 감수할 것을 서약했다. 기독교 경건의 가장 고상한 형태인 수도원 생활에서 루터는 구원을 얻기 위해 수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의 수도원 서약은 제2의 세례이자 새로운 출발이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을 상세히 규정해 놓은 원칙을 정확히 가슴에 새겼으며, 수도원장이 그의 뺨 위에 입 맞추는 의식을 끝으로 1년간의 수습 수도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수도원 입교를 축하하는 행사에서 머리 중앙부를 삭발했고, 검은색의 수도원 복장을 착용했다. 수많은 수도원 규칙들을 기억하면서 루터는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기도와 시편 묵상, 성가, 독서, 미사, 하루 7번의 기도회 등을 마치고 밤늦게 취침에 들어갔다.
특별히 루터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키는 수도원에서 루터는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고, 교육을 잘 받아 나갔고, 성경을 읽었다. 또한 그는 기도문도 열심히 암송했고, 자기 몸에서 귀신들을 축출하려는 소망으로 금식도 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했으며, 불을 지피지 않은 방의 추위도 견뎌 냈다. 그는 매일 정절, 청빈, 순종, 금식, 철야, 그리고 금욕적 극기까지도 하면서 인간 스스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갖은 노력과 애를 썼다. 그의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행이 쌓여가는 증거인 것처럼 생각했다. 만약에 수도사 훈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루터는 틀림없이 천국에 갈 정도로 엄격한 수련을 쌓았다. 당시 루터는 얼마나 수행에 열심이었는지 만성 위장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여러 수도사들 중 가장 열심 있는 수도사였다.
이처럼 루터는 자신이 구원 받는 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행이라도 실천했다. 루터가 그처럼 몸부림치며 자신의 죄를 보상해 보려고 했지만 이 모든 수고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리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인간의 구원문제에 대해 심한 갈등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루터는 수도원의 엄격한 계율 속에서 기도와 찬송, 말씀묵상,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루터의 영혼에 대한 고뇌는 수도원에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부림은 더욱 심했다. 그는 불의했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셨다. 그동안의 충분한 공로와 충분히 쌓은 의로운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루터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였다. 그는 훗날에 깨닫게 되지만 당시에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성경에 없는 가르침과 관행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복음이라는 교회의 참된 보화를 은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그는 수도사의 과정을 마쳤다. 루터는 1505년부터 1511년까지 이곳에서 수도사로 머무른 것으로 유명하지만 젊은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었다.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루터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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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4월 3일, 수도원에 들어온 지 9개월이 지난 후 루터는 요한 폰 슈타우피츠 (Johann Von Staupitz, 약 1468-1524) 원장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슈타우피츠는 중세 수도회의 최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루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슈타우피츠에게 자신의 크고 작은 죄를 모조리 고했다. 슈타우피츠는 일일이 열거하고 고백하고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관심을 개인적인 죄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놓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죄에 대한 고민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서 찾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 후 슈타우비츠는 루터에게 성경 연구에 매진하도록 인도하였고 특히 성경의 원전으로 씨름하게 하였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했다. 루터에게 정식으로 높은 수준의 신학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루터는 이 수도원 생활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접하게 되었는데, 후일 루터 신학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론과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서 영적 스승이었고 사랑으로 길을 인도해 준 멘토 이기도 했다.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는 갈렙이 있었고, 위대한 전도자 바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고, 위대한 루터에게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있었다.
루터가 사제 서품 받은 에르푸르트 대성당
수도사 과정을 마친 루터는 드디어 사제가 되었다. 에르푸르트 돔이라 불리어지는 성 마리엔 돔(Marien Dom)은 1278년부터 1400년까지 120여년에 걸쳐 지어졌으며, 위엄있게 에르푸르트의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뾰쪽한 첨탑을 자랑하는 독일 고딕 양식의 걸작품으로 에르푸르트의 랜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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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전면에 있는 70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대성당 내부는 숨이 막히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제단이 보인다. 이곳 대성당에서 루터는 1507년 2월 27일 부제로, 그해 4월 4일 가톨릭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신부가 된 사람은 이제 성만찬을 집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미사의 신비가 신부 루터를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사제 서품을 받은 후 5월 2일에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교회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교회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한 신부의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죄인이 감히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루터는 괴로웠고 공포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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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종교개혁자로서 여러 고뇌의 과정을 거치는 루터
젊은 루터가 가장 혹독한 훈련을 받은 도시는 수도원으로 가득한 에르푸르트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장래 종교개혁자로서 다듬어지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어거스틴 수도원에서의 엄격한 생활은 22세 루터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매우 고뇌하게 했던 현장이었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영적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와 만남을 통해서 신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지 2년 뒤, 그의 나이 24세 되었을 때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게 된 일은 파격적이었다. 또한 신부로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박사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 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장래 종교개혁자 루터는 준비되어 갔다. 루터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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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신부 루터
루터는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수도사로서 엄격한 규율 속에서 혹독하게 자신을 훈련시켰다.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로서 미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루터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으며 그토록 갈망했던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루터는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과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음을 몰랐다.
또한 인간이 행한 최상의 선행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냄새나는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6세기 루터의 치명적인 영적 문제는 계속 칭의와 성화를 혼돈하면서 칭의 없이 성화를 이루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18세기 존 웨슬리 역시 그가 회심 전에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신앙의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어떤 공로로 이루어지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했다.
비텐베르크 시교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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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몇 년 동안 라틴어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중에 하나님의 진리를 많이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수도사이자, 설교가로, 그리고 신학교 교수로 3가지 직책을 수행하였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성경 교수로 활동하면서 1517년 까지 비텐베르크 시교회(Wittenberg Stadt Kirche)에서 사제로서 목회사역도 하였다.
당시 대학과 수도원의 전통적인 언어는 라틴어였고, 도시민의 언어는 독일어였다. 그 때문에 루터는 독일어로 설교했는데 이 교회는 독일어로 설교한 최초의 개신교회가 되었다.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 Church)라고도 불리는 비텐베르크 시교회에서 루터는 매주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목회자로서의 루터는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깊이 숙고하면서 자신의 설교를 통해 신자들이 성경 진리를 잘 이해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양떼 즉 신자들의 구원에 관심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심방도 열심히 했다. 이러한 루터의 신학적 및 목회적 관심은 교회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 1517년 10월 31일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던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진리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와 성경의 새로운 계시의 빛이 루터에게 비취어지자 그는 곧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보게 되었다.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짓과 속임수와 그리고 온갖 위선을 깨달은 루터는 결코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어두움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하고자 결심하면서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1517년 10월 31일, 이른 아침에 긴 사제복을 입은 루터가 어디론가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 성교회(Wittenberg Schloss Kirche)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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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낮 12시가 되기 전, 루터는 가지고 온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펼쳐 들고서 라틴어로 된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못으로 박았다. 지금은 청동문으로 되어 있어 못으로 박을 수 없지만, 그 당시는 나무문으로 되어 있어서 못으로 박을 수 있었다. 이 95개조 반박문 문서는 공개 토론을 위한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95개조 논제에 대해 아무도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무런 토론도 없었다. 비텐베르크의 교수와 학생들은 그 문제에 대해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이 공개 된지 2주 만에 복사되고 번역되어, 전 독일에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혜성같이 등장한 금속 활자 인쇄술로 인해 4주 만에 전 유럽전역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마치 갑자기 핵폭탄이 터져 버린 것처럼 로마 교황청을 향해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유럽과 세계사를 진동시킨 역사적인 대사건으로서 그 중심인물은 1483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젊은 마르틴 루터이다.
루터는 중세말의 타락한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여 갱신하고자 했다.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영적 전쟁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95개조 논제의 핵심 내용루터는 말씀의 진리를 위한 증거에 매우 충실했기에 교회에서 철저하게 개선되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95개조 논제를 내걸고서 공개 토론하자는 반박문 내용의 핵심은면죄부(indulgentia) 판매이다. 면죄부 사건은 루터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죄 용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죄책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면죄부에 대해 루터는 당시에 교회의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라고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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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필요로 할 때, 그는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강요했다. 판매 책임자인 도미니크 교단의 탁발수도사 요하네스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은 가는 곳마다 ‘면죄부를 사면, 살아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는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 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완전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인 된 우리가 십지가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비성경적이고, 구원에 아무 효과가 없는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함 받는다고 가르쳐 왔는데, 가톨릭교회는 죄를 범한 인간이 신부에게 죄를 고함으로 인해 죄 용서를 받는다는 고해성사를 주장한다.
또한 교황은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최고의 통치자이기에 절대 오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교황무오설이다. 또 성체숭배 사상이 있다. 성찬식 할 때 성도들이 받는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화체설숭배는 잘못된 것이다. 개신교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종교개혁자 칼빈이 주장한대로 영적으로 임재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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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톨릭교회는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성인 숭배 사상이 있다. 1984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는 한국 방문 중에 103위의 성인 시성식을 행하였고, 2014년 1월 프란체스코 교황 방문 때는 124명의 시복미사를 거행했다.
하지만 루터는 과도한 성인숭배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성상숭배 사상도 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성인들, 교황들의 형상 등을 만들어 놓고서 그 형상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이 성상 숭배인데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성상들을 다 부셔버렸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는 아무 형상이 없고 깨끗하다.
또한 십자가 숭배 사상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양을 조각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정이나 성단, 교인들이 경영하는 사업장이나 병원에 달아 놓고 거기에 절하거나 기도하는 행위이다.
마리아 숭배 사상도 있다.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신격화 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마리아 무죄 잉태설,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는 “구원의 어머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천주교회에 들어가 보면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다. 그들은 그러한 종교적 그림에 절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성화숭배사상이 있다. 루터는 이 모든 것들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모든 것들의 잘못된 행동들은 그 근본이 잘못된 성경관에 기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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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는 말씀도 좋지만 행위로 의롭게 되고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구원관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로마 천주교회의 부패와 종교적 타락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루터는 이러한 부패와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이 면죄부 비판에서 출발하여 중세 제도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루터는 작은 촛불을 켰는데, 그것은 그의 원래 의도를 훨씬 넘어서 칠흑같이 어두운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이라는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면서 멀리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1517년 10월 31일을 개신교 설립일로 기념한다. 금년 10월 31일은 루터 종교개혁 498년을 맞이하게 되며, 2017년에는 역사적인 500주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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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뉴스파워 유럽본부장)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27707§ion=s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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