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 채플 방문을 환영합니다.
1. 존 웨슬리와 채플 (John Wesley and Chapel)
존 웨슬리는 감리교 창시자이며 1703년 6월 17일 영국 링커셔(Lincolnshire)의 웹워스(Epworth)에서 국교회 신부인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잔나 웨슬리(Susanna Wesley)사이에서 19남내중의 15번째로 태어났다.
1720년 6월 24일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에 입학하였고, 1726년 3월 17일 옥스퍼드 링컨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이로부터 35년 이상 링컨 대학에서 라틴어, 아랍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문학 등을 연구하였다.
1729년 그의 동생 찰스웨슬리와 함께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Holy Club'(홀리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의 목적은 '참된 기독교적 품격을 형성하기' 위해 성경연구, 영성훈련과 명상, 기도와 예배, 사회적 실천 등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이 모임의 사람들을 규칙쟁이(Methodist) 들이라고 불렀고 이 말은 후에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로 불리워져 감리교회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다.
1735년 미국 선교를 위해 항해 하던 중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될 위기에서 두려워하는 자신과는 달리 리츠만이 이끄는 모라비아 성도들의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올더스 게이트(Alders gate)가에서 모인 한 저녁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강해'를 듣던 중 8시 45분경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 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 체험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다는 확신을 선사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로운 은총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1739년 휘트필드의 초청으로 브리스톨에서 집회를 계획하던 중 국교회에서 교회를 빌려주지 않자 노방집회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계는 나의 교구(The world is my parish)'라는 일화를 남기면서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88세의 생을 일기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까지 4만 2천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고, 52년간 334.672km의 거리를 선교를 위해 여행했다.
웨슬리의 채플 (Wesley's Chapel)
웨슬리의 채플은 건축가 조지 댄스(George Dance)와 건축업자 사무엘 투스(Samuel Tooth)에 의해 1778년에 지어졌습니다. 건축당시에는 단순한 내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채색창문과 여러가지 기념물들이 덧붙여 졌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 채플을 새 채플(New Chapel) 이라 이름 짓고, "아주 산뜻하지만 훌륭하지는 않다(Perfectly neat, but not fine)"라고 당시의 채플을 묘사 했습니다.
건축 당시 천장의 경간(SPAN)은 영국에서 가장 긴 것이었고 비둘기와 뱀이 그려있는 2층 발코니 장식때는 '구속과 치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 기둥은 당시 왕 조지 3세가 부두에 있던 돗대를 하사한 것으로 1891년 감리교 헌금에 의해 현재의 벽옥기둥으로 대체되었고, 현관 기둥만이 본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Charles Wesley's Organ은 Foundry Chapel 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웨슬리의 무덤 (Wesley's Tomb)
존 웨슬리는 채플 뒤편 묘지에 잠들어 있고, 채플 앞 도로 건너편 묘지 Bunhill Fields, the Nonconformist 묘지에는 수잔나 웨슬리(Susanna Wesley 웨슬리의 어머니), 다니엘 데포(Daniel Defoe), 윌리암 브레익(William Blake) 그리고 존 번연(John Bunyan)의 묘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3. 웨슬리의 집 (Wesley's House)
웨슬리의 집은 1779년에 지어졌고 웨슬리는 그의 마지막 생애 11년 4개월을 이집에서 지냈습니다.
흔히들 '감리교 발전소'라고 불리워지는 기도방은 침실 뒤에 있으며 윗층의 방들은 방문 설교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웨슬리의 집에는 웨슬리의 오리지날 가구를 비롯하여 약 400여권의 책이 있는 개인적인 도서관, 친필서명노트, 밤에 썼던 모자, 어렸을 때 가졌던 방울, 심방카드, 윌리암 월버포스에게 편지를 썼던 펜 등 많은 개인 비품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흥미있는 물건 중에 하나는 전기기계 인데 이것은 웨슬리가 가벼운 전기쇼크로 우울증 환자를 고쳐줄 때 사용했던 것입니다.
4. 웨슬리 박물관 (Wesley's Museum)
웨슬리 박물관은 1984년에 개관되었고 존 웨슬리부터 현재 까지의 감리교 역사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가 사용했던 강대상과 수집한 도자기 그리고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하시는 그림과 마지막 임종 순간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시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존 웨슬리의 생가 (John Wesley's House)
존 웨슬리는 이 집에서 생애의 마지막 11년을 보냈다. 이 집은 국보급에 지정된 건물로 현재 드물게 남아 있는 18세기 런던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2. 현관의 로비 (The Vestibule)
로비 양쪽 두개의 창문은 마크 카잘렛(Mark Cazalet)의 작품이다. 한쪽은 불로 계시된 하나님을 표현했으며, 도널드 잉글리시(Donald English) 목사와 그의 부인 베르다(Bertha)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두 번째 창문은 물로 계시된 하나님을 표현했으며 레슬리 위더헤드(Leslie Weatherhead)와 윌리엄 생스터( William Sangster)의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2003년 개시되었다.
3. 회심의 창문 (Convesion Window)
성전 왼쪽 위층을 보면 회심의 창문을 볼 수 있다. 이 창문은 존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 회심한 날 찰스 웨슬기가 3일 전에 작곡한 회심 찬송가인 'Where shall my wondering soul begin?'을 형제가 함께 부르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4. 성전 앞 성찬대 난간 (Front Communion Rail)
성전 앞 성찬대 난간은 전 영국 수상이었던 마가렛 데처(Magaret Thatcher)에 의해서 기증되었다. 그녀는 웨슬리 채플에서 결혼 했으며 그녀의 자녀들은 이 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5. 설교단 (The Pulpit)
기존의 설교단은 현재 보다 5피트 더 높았으며, 한 단이 더 있었다. 위의 단으로부터 설교자, 말씀 봉독자, 그리고 찬송을 인도했던 선창자가 자리했다. 현재의 설교단은 1864년에 교체되었다.
6. 웨슬리의 성찬대 (Wesley's communion table)
7. 세례반 (Frnt)
이 세례반은 1891년 영국 서부 스롭셔지방 마델레이 (Madeley)에 있는 존 플레처(John Fletcher)의 교구교회에 의해서 기증되었다. 세례반안에 있는 조각된 돌은 1759년에 나다니엘 길버트 (Nathaniel Gibert)가 그의 노예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던 앤티가 섬에서 옮겨졌다. 이 것은 캐리비안에서의 감리교 운동의 시작이었다. 세례반 안에 조각된 부숴진 사슬은 노예신분의 폐지를 의미한다.
8. 에즈버리의 창문 (ASbury window)
이 창문은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 위에 내려졌던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프란시스 에즈버리(Frances Asbury)를 기념하며 만들어졌다. 웨슬리는 1771년에 새롭게 독립한 미국 감리교인들의 리더로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성전의 기둥 (The Columns)
기존의 성전 기둥은 조지 3세로부터 기증 되었던 배의 돛대로 만들어졌으며, 해외의 여러 감리교인들로부터 기증된 대리석 기둥으로 대체되었다.
9. 파운더리 성전 (Foundery Chapel)
이 빅토리안 후기의 성전은 무어필드(Moorfields) 근처에 있었던 파운더리(The Foundery)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웨슬리는 파운더리를 이 곳 시티로드로 옮겨오기 전 거의 40년 가까이 감리교 본부로 사용하였다. 이 소 성전에는 원래의 성전에 있던 나무 장의자 몇 점과 찰스 웨슬리의 소형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10. 존 웨슬리의 무덤 (Wesley's Tomb)
웨슬리는 이 교회에 묻혀졌던 843번째 사람이었다. 묘비명은 그의 제자였던 아담 클라크(Adam Clarke)에 의해서 쓰여졌다. 그의 여동생이었던 마르다(Martha)와 그의 전기작가, 그리고 6명의 설교자들이 함께 그의 무덤에 묻혀있다.
개관시간 :
월요일~토요일 : 오전 10:00 ~ 16:00
폐관 : 목요일 오후 12:45 ~ 13:30, 일요일 오후 12:30 ~ 13:45
Wesley's Chapel
49, City Road London EC1Y 1AU
Tel. 020 7253 2262
Fax. 020 7608 3825
http://www.wesleyschapel.org.uk/
18세기에 영국국교회에서 분립된 또 하나의 주요 교단은 감리교(Methodist Church)였다. 감리교는 무엇보다도 존 웨슬리의 탁월한 사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17세기에 분리주의 운동의 결과로 영국 땅에서 많은 교단들이 설립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또 하나의 주요 교단이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감리교의 분리는 여느 교단들의 분리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어떤 기존 신학에 대한 반성이나 교회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른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신앙운동 혹은 영적 부흥운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분리였다는 점에서 독특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감리교의 생성에 있어서 웨슬리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지만 자신은 국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감리교는 웨슬리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미국과 영국에 각각 설립되었다. 웨슬리가 평생 동안 국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신학과 사상이 기본적으로 국교회적인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18세기의 감리교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의 영국은 종교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18세기 초까지 국교회를 포함한 영국의 여러 개신교 교단들은 영적인 활기보다는 교리 논쟁에 빠지고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교회들은 사람들에게 활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고,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고 있었다.
농촌을 떠나 도시빈민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던 많은 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농촌의 교회들은 교인들을 잃고 도시의 교회들은 그들에 대한 어떤 대책도 없었다. 또 17세기 이후의 계몽주의적 철학사조들은 그 시대의 교회지도자들에게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영국의 대다수 기독교 교단들은 영적침체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한 새로운 부흥운동은 영국의 기독교 전체에 참신한 도전을 던져주었고 영적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존 웨슬리는 1703년 영국 링컨샤에서 교구 목사의 15번째 아들로 출생,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종교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5세 때 화재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은 어릴 때부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한 뒤 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 등과 함께 '신성클럽' 혹은 '메소디스트'라고 불렸던 소그룹 활동을 시작하였다. 메소디스트라는 말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원칙과 격식에 따라 판에 박힌 듯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활동은 나중에 메소디스트 운동이 소그룹 운동으로 전개되는 데에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1735년 웨슬리는 당시 식민지였던 신대륙의 조지아에 파견되었는데, 배에서 만난 모라비아 교도들에 의하여 새로운 영적 도전을 받았다. 조지아 사역에서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인 피터 뵐러를 만나고 독일의 모라비아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영성에 눈뜨게 되었다. 웨슬리는 휫필드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으나 곧 신학적인 차이로 인해서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었다.
웨슬리는 계속해서 그의 감리교운동을 확장시켜 갔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 운동을 독립된 교단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또한 그럴 의도도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성공회의 미사에 참석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감리교 그룹은 개인들의 신앙을 돕고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돕는 사설단체라고 생각하였다. 웨슬리의 탁월함은 커져가는 운동을 조직화하는 일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는 '속회'라는 소그룹을 기본단위로 하는 '신도회'를 구성하고 여러 신도회들을 지역별로 묶어 '순례구역'을 조직하였으며 '감리사'를 파견하여 돌보았다.
이 모든 단위모임들이 합쳐져서 '감리교연합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기도 하였지만 지금까지 감리교 교단 구조의 가본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웨슬리의 의도와는 달리 감리교운동은 결국 독립된 교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팽창하는 사역의 필요에 따라서 설교자들을 안수하여 사역지로 파견하였다. 처음에는 성공회와의 마찰 때문에 꺼렸지만 결국 곳곳에서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역자들을 세우는 활동은 감리교운동이 국교회와 독립하는 첫 단계였다.
공식적 교단이 먼저 발족된 것은 영국보다는 미국에서였다. 미국에서도 이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웨슬리에 의하여 감리사로 파송된 토마스 코우크와 프란시스 애스베리는 미국에서 감리교 교단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웨슬리의 뜻과는 달리 스스로를 감독(bishop)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미국 감리교는 감독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영국의 감리교운동과는 독립된 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다.
미국 감리교회는 남북전쟁으로 남북 감리교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합동하여 '연합감리교(UMC)'를 형성하였다. 영국에서는 휫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운동의 결과로 1779년에 '헌팅턴 부인의 연합회'라는 독립된 교단이 형성되었고 후에 '웨일즈 감리교'가 되었다. 웨슬리 그룹도 웨슬리가 1791년 타계한 후 결국 국교회와 결별하고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였다. 우리나라의 감리교는 1884년 미국 북감리교의 일본주재 선교사 R. S. 맥클레이와 헨리 아펜젤러가 와서 세웠다.
감리교 전통에 있는 교회들은 그 교리적·신학적 논거를 웨슬리의 가르침에서 찾는다. 그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영국국교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흔히 웨슬리의 신앙적 표준을 '사중표준'이라는 말로 설명을 한다. 국교회가 교리와 신학을 구성하는 세 가지 표준을 성경, 이성,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두는데 웨슬리는 여기에 경험을 추가하여 신학의 '사중표준'으로 삼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신앙생활을 규정하는 최고의 권위였으며 기독교 신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자료였다. 웨슬리는 또한 성경의 이해와 해석을 돕고 보완하는 이차자료로서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하였다.
또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인간의 이성이 유용하게 쓰인다고 보았다. 이성은 영적인 진리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신앙의 광신주의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여기에 더하여 신앙의 경험을 중요시하였다. "성경에 계시되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며 이성에 의해 확고해진 복음의 진리"는 실질적인 신앙의 경험을 통하여 생동감을 얻는다고 하였다.2) 웨슬리가 신앙의 경험을 중시한 것은 이후의 감리교의 중요한 신앙적 특징이 되었고, 그것은 감리교에서 비롯된 여러 성결운동의 교단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웨슬리 신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구원론과 성화론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우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고 전제하고 동시에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웨슬리의 구원론은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또 구원을 칭의 사건과 성화 사건으로 나누었다. 그는 또 구원을 칭의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성화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극단적인 은총론의 결과로 야기될 수 있는 '값싼 은혜'의 개념을 경계한 것으로 평가된다. 웨슬리는 또한 초기부터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여 감리교운동의 중요한 유산이 되게 하였다. 웨슬리의 신학과 교리에 대한 설명은 주로 그의 신약성경 주해와 설교집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감리교 교리가 가장 잘 요약되었다고 평가받아온 감리교 찬송집도 감리교 교리의 표준이 되어왔다.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이 성공적으로 발전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선 산업혁명의 결과로 도시에 모여든 당시의 소외계층이었던 노동자들에 대한 사역의 필요를 잘 인식하고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복음운동과 산업도시에서의 사회운동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것도 성공적 사역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의 조직력도 한몫하였다. 감리교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소그룹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소그룹을 통한 교육과 영성 훈련을 강조한 것은 당시의 교회 상황에서는 사역의 주체를 뒤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역의 주체가 고위성직자가 아니라 사역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으며, 웨슬리 운동의 가장 중요한 영성과 사역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운동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탁월한 평신도 설교자들과 여성 사역자들이 배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소그룹의 활동이 생활의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교육하지 않을 것이면 전도하지 않겠다"라는 복음 전도 이후의 양육 과정을 강조한 것도 이 운동의 지속적인 강점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웨슬리의 개인적 영성과 복음의 열정이 이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가 경건한 영성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그 영성이 실제로 사회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은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삶의 모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웨슬리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교회 갱신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한 표본을 제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에도 교단을 초월하여 웨슬리의 영향은 지속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감리교회 (기독교의 교파, 2006. 11. 30.,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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