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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한국

제주시 아라동 성안교회


제주선교
    (성안교회
,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

 

  이기풍 목사는 1895년 12월 23일 평양성 동대문 밖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머리가 명석하여 6세 때에 사서오경을 줄줄 외울 정도였으며, 12세 때에는 백일장에서 붓글씨 부분의 장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암울했던 그 시대는 그로 하여금 학문보다는 곁 길로 빠지게 했으며, 평양 시내의 어깨 두목으로 마포삼열 (Samel
 A Moffett)목사에게 돌을 던져 턱을 깨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포 삼열의 따뜻한 온정과 청일전쟁 동안에 원산지방으로 피신하였다가 소안련(W. L. Sw-allen)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01년은 그에게 큰 영광의 한 해였다. 장로 장립, 평양신학교에 입학 그리고 10세 연하의 윤함애씨의 결혼이었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 1회 7명의 졸업생과 함께 목사 임직을 받은 후 총회에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908년 3월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는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9월 조선 독노회에 '원입교인 9명, 회집교인 20명, 제주 토박이 김홍련이 전도인으로 자청하였다'라고 보고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렇게 세워진 제주도 최초의 교회가 성안 교회였다.
  성안교회는 계속 발전하여 1984년 선교 100주년 기념과 교회창립 76주년을 기념하여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를 세웠다.

◈◈◈ 이기풍 목사 ◈◈◈


이기풍 한국장로교회 초대목사 7인중 1인


[1865-1942]
[제주도 선교사, 순교자, 평남 평양에서 출생]


1. 기독교 박해자에게 열렬한 신자로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핼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2. 제주도에서 선교활동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양전백,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청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3. 도서벽지를 통해 복음전파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작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비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려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4.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경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순교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나덕환,김 상두, 김순배 목사등과 함께 1938년 체포당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전에 졸도하여 벙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제주 성안교회 100주년 기념예배당            (출처- http://jejuseongahn.org)

 

제주시 아라1동에 자리한 제주성안교회는 1908년 3월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가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9월 조선 독노회에 '원입교인 9명, 회집교인 20명, 제주 토박이 김홍련이 전도인으로 자청하였다'라고 보고로 시작되었다.  제주도 최초의 교회로 세워진 서부교회(후에 성내교회와 성안교회로 나뉘었다)가 계속 발전하여 성안교회는 1984년 선교 100주년 기념과 교회창립 76주년을 기념하여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를 세웠고 2007년 새 성전을 건축하였다. 새 성전은 건축면척 1788.35㎡에 지상4층, 지하1층 규모로 1700석 규모의 본당과 500석 규모의 중예배실 그리고 10개실 정도의 소그룹실등으로 갖추어져 있다.

 

ㅁ1908년 이기풍목사가 세명의 신자들과 함께 향교골에서 기도회 시작

(제주 최초의 교회시작)

ㅁ일도리 중인문 안에 초가 여섯간을 매입하여 교회당을 사용.

ㅁ구 출신청을 매입하여 성내교회당으로 사용.

ㅁ교회 설립계를 제출(제주성내교회)

ㅁ구 출신청 앞에 목조 52평의 예배당 기공.

ㅁ영흥 야학교 69년제 보통과 설립.

ㅁ관인 중앙유치원 개원(제주 최초의 유치원)

ㅁ교회 구내에 노회경영 성경학교 교사의 기숙사를 신축

ㅁ교회 부흥으로 제주동부교회를 설립하고 성내교회는 제주서부교회로 개칭.

ㅁ용담동 지역 교인을 분리하여 한라교회를 설립

ㅁ삼도 1동 905에 새예배당을 신축하고 입당(현 YMCA)

ㅁ광양지역 교인을 분리하여 광양교회(현 제광교회)를 설립

ㅁ교육관 57평 신축

ㅁ제주중부교회와 합동하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

ㅁ교회명칭을 제주 최초교회의 명칭인 제주성내교회를 이어받아 제주성안교회라 칭하고 양 교회 교인 238명이 모여 합동예배를 드림

ㅁ6.25동란으로 피난 성도들이 제주서부교회당에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

ㅁ삼도2동(현 전매청앞)에 제주피난민교회를 세움

ㅁ그 후 그 중의 일부가 제주영락교회를 창설(12.31)

ㅁ교회명칭을 제주읍 중부교회로 변경

ㅁ삼도1동의 한 주택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

ㅁ삼도 1동 184의 대지 397평 매입

ㅁ건평 75평의 교회당 신축

ㅁ제주서부교회와 합동하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

ㅁ제주노회 제63회 정기노회에서 교회합동 승인

ㅁ삼도1동 606-1에 새 예배당 신축 입당

ㅁ제주성서신학원을 본 교회에서 개원(79.3에 제주기독센타로 이전),

유치원 재설립

ㅁ봉성리에 개척교회 첫 예배드림

ㅁ금악개척교회 창립예배

ㅁ교육관 증축 봉헌예배

ㅁ교회창립 75주년 기념으로 김경하 목사를 콜롬비아 선교사로 파송

(제주 첫 선교사)

ㅁ교육관 준공(지하 138평)

ㅁ아라동 100주년 기념 새성전 건축 (2007.11 입당)

 

제주 성안교회 100주년 기념예배당  

 

제주 성안교회

 

제주 성안교회  

  

새 성전 야경 

 

교회 내부                          (출처- http://blog.daum.net/zunki)

 

강단

 

중 2층

 

교회 내부 로비모습

  

성안교회 vision 5 

 

2006.4.16  100주년 기념교회 기공예배     (출처-  http://jejuseongahn.org)

 

2006.4.16  100주년 기념교회 기공예배 (제주시 아라동) 

 

100주년 기념 성전 첫 예배 (2007. 11.18)          (출처-  http://jejuseongahn.org)

 

100주년 기념 성전 첫 예배 (2007. 11.18)

 

100주년 기념 성전 첫 예배 (2007. 11.18)

 

100주년 기념 성전 첫 예배 (2007. 11.18)

 

새 성전 입당예배 (2007.12.2)               (출처-  http://jejuseongahn.org)

 

새 성전 입당예배

 

새 성전 입당예배

 

새 성전 입당예배  

 

새 성전 입당예배 

 

창립 100주년 기념예배 

 

2008년 부터 2월 마지막주일을 교회창립 기념주일로 지키기로 하여 1,2,3부 예배를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주일예배로 드리며 예배시긴에 비젼선언문 선포식이 있었다. 설교는 본교회16대 담임목사님이셨던 정영택 목사님(경주제일교회)이 말씀해주셨고, 홀리보이스의 특송이 있었다.

 

100주년 기념 연합예배

 

100년전 이기풍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제주최초의 교회인 동부,성내, 성안교회가 교단을 초월해 감격의 연합감사예배(2/24)가 제주성안교회 영광예배당에서 드려졌다.설교는 임명규 목사님(기장총회장) 하셨으며, 예장총회장의 축사와 제주도지사의 축사, 성찬식을 통해 한몸임을 선포하고, 매년 연합예배를 드릴것과 제주복음화에 앞장설것을 다짐했다.

 

구  성안교회

 

성안교회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 


이기풍 목사의 선교 초기 중심교회이자 제주 최초의 교회인 제주성안교회 뜰에는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 목사의 일대기가 자세히 기록된 선교기념비는 1984년 교회창립 76주년을 맞아 성도들이 직접 세운 것으로 제주선교역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 일곱 목사 중 한 명인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 제주선교에 헌신하며 제주성안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0여 개의 교회를 설립, 제주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고문 끝에 77세의 일기로 순교했다.

 

성안교회 초기사진     (출처-  http://jejuseongahn.org)

 

구 교회에서의 마지막 예배  

 

구 교회 내부 

 

새 성전 부설 성안미술관 개관

 

성안미술관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