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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한국

‘고무신행전’ 바닷길서 밀알을 찾다… 신안 증도로 떠나는 성지순례









모세의 기적처럼 순식간에 바닷물이 물러난다. 증도와 화도를 갈라놓았던 바다가 사라지자 무명천을 풀어놓은 듯 노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문준경 전도사가 한 손에는 성경책을, 한 손에는 의약품과 사탕이 든 보따리를 들고 건너던 복음의 바닷길이다. 그녀가 순교한 지 어언 60년째. 시계바늘조차 천천히 도는 슬로시티 증도가 ‘천국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다.

전남 신안 앞바다의 섬 증도를 ‘보물섬’이라 부른다. 증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검산마을 앞바다에서 14세기 중국 원나라 시대의 도자기 2만여 점과 동전 28t등 모두 2만3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도의 보물은 600년 만에 햇빛을 본 해저유물 뿐만이 아니다.




사옥도의 지신개선착장에서 철부선을 타고 증도 버지 선착장에 내리면 잿빛 개펄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전국에서 게르마늄 함량이 가장 높은 증도의 개펄은 생명의 근원으로 불린다. 개흙을 뒤집어 쓴 짱뚱어와 농게로 바글바글하던 개펄은 달콤한 겨울잠에 빠졌지만 녀석들은 가느다란 숨구멍을 통해 차가운 겨울바다와 호흡을 하고 있다.

염화나트륨 칼륨 코발트 요오드 망간 아연 등 80여 종의 미네랄이 함유된 개펄은 증도를 우리나라 최고의 천일염 생산지로 만들었다. 버지 선착장을 벗어나자마자 만나는 태평염전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단일염전. 인공위성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태평염전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조금 못되는 462만㎡. 이곳에서 우리나라 천일염의 60%를 생산한다.

국내 최대의 소금밭인 태평염전은 1953년에 조성됐다. 한국전쟁 피란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전증도와 후증도 사이의 개펄에 둑을 쌓아 염전을 만든 것이다. ‘버지’라는 지명도 소금 굽는 가마를 뜻하는 ‘벗집’에서 유래된 말. 염부들이 소금수레를 끌고 분주하게 오가던 3㎞ 길이의 비포장도로 옆에는 일렬로 늘어선 60여 채의 소금창고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태양광발전소를 지나 대초리에 들어서면 삼각뿔 형태의 대초리교회가 눈길을 끈다. 지영태 목사가 시무하는 대초리교회는 문준경 전도사가 1936년에 건립한 교회.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성지순례 때 대초리교회를 찾아 눈물로 기도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문준경(文俊卿·1891∼1950) 전도사는 한국이 낳은 여성순교자 중 으뜸으로 꼽힌다. 신안 암태도 출신인 그녀는 1908년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했다. 서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탓에 신혼 첫날부터 소박당한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다 목포로 건너간다. 그리고 북교동성결교회에서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당시 전도사)를 만나 크리스천이 된다.

이어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문 전도사는 증도로 돌아와 이 섬 저 섬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한 해에 고무신이 9켤레나 닳을 정도로 선교에 앞장선 문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는 신안 일대에 100여 곳. 그 중 증도에서 모두 11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증도 대초리와 화도를 잇는 1.2㎞ 길이의 노두는 문 전도사가 화도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고무신 몇 켤레가 닳도록 걷고 걸었던 바닷길이다. 노두(露頭)는 개펄 위에 돌을 놓아 건너다니던 일종의 징검다리로 물이 차면 사라지고 물이 빠지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자동차가 달릴 수 있도록 시멘트 포장을 했지만 사리 땐 노두 바닥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바닷물에 잠긴다.

문준경 전도사의 고무신행전 길로 불리는 노두 저편의 섬은 화도. 화도(花島)는 해당화가 많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영신의 집으로 등장했던 민박집은 화도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문 전도사가 개척했던 화도교회가 마을을 정겹게 굽어보고 있다.

문 전도사가 신학생 시절인 1935년에 증도에서 처음으로 개척한 증동리교회는 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다. 우전해수욕장과 드넓은 개펄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닷가 언덕에 세워진 증동리교회의 담임목사는 김상원 목사.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 목사는 문 전도사가 신도들과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1장과 무덤을 이장할 때 발견한 돋보기 1개를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 돋보기는 문 전도사가 성경을 읽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증동리교회 앞마당에 위치한 낡은 시멘트건물은 문 전도사가 순교한 후 피로 범벅이 된 바닷모래를 실어와 건축한 옛 증동리교회.

일제강점기 때도 박해를 받았던 문 전도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4일에 교회 앞 바닷가에서 59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으로 서울이 수복(9월 28일)되고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10월 1일)하자 후방에 남은 좌익세력들은 당황한다. 국군이 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문 전도사와 양민들을 증동리교회 앞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 학살을 자행한다.

문 전도사의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으로 그녀의 고무신행전을 의미한다. 그녀는 수양딸인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한 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총탄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8일 동안 양민들과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에 버려졌다.

순교지 앞 개펄은 짱뚱어가 뛰어노는 곳으로 몇 해 전 은빛 모래로 유명한 우전해수욕장과 증도면 소재지를 연결하는 470m 길이의 짱뚱어다리가 놓여지면서 증도의 명물로 등장했다. 썰물 때 드넓은 갯벌이 드러나고 물이 차면 바다를 가로지르는 낭만의 다리로 변신하는 짱뚱어다리에서 맞는 해돋이와 해넘이, 그리고 별빛 쏟아지는 야경은 한 폭의 그림.

순교 1년 만에 장례식을 치른 문준경 전도사의 시신은 교회 뒷산에 묻혔다 2005년 순교 현장으로 다시 유골을 이장했다. 그녀의 전도와 순교가 밀알이 되어 현재 증도는 주민 1700여 명 중 90% 이상이 크리스천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고무신행전이 3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화도의 해당화보다 붉고 짱뚱어다리의 노을보다 붉은 문준경 전도사의 하늘 향한 단심(丹心). 이것이 보물섬으로 불리는 증도의 진짜 보물이 아닐까.

신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