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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한국

전남 영광군 염산면 염산교회




 

영광 염산교회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6·25동란 때인 9월 29일 국군이 영광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미처 퇴각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이 10월 7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교인을 바닷가 수문통에서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달아서 수장시키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때 전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순교했다. 

전남 영광은 6.25전쟁당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남한이 더 우세하다는 오보로 전쟁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전국에서 가장 큰 전쟁피해를 보았던 지역이다. 그러던 중 7월 23일 갑자기 공산군이 몰려들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군수도 피난을 못가고 피살되었다. 공산군들은 우선 교회를 폐쇄했다.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피난을 거부한 김방호 목사가 성도들 집을 오가면서 비밀리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영광읍내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지면서 기독청년들이 우익청년들과 함께 만세 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주도하게 되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공산당들이 이를 분히 여기고 복수하게 되어 염산교회의 순교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순교자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염산교회 23세의 청년 기삼도로 죽창으로 여러번 찔려 순교당했다.  그는 당시 목포성경학교 3학년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두번째 순교자는 노병재 집사였다. 그들은 노집사를 수문 뚝방까지 끌고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집사는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했고 그의 일가족 까지 9명이 순교했다. 세번째 순교자로 10월 13일 염산교회의 1대 교역자였던 허상 장로와 부인이 순교했다.  봉덕산 골짜기로 끌려가 매를 맞고 죽창에 찔러 죽였지만 장로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염산교회 교인들은 수문통 앞에서 무참히 살해되어 순교하게 되었다. 사람을 1m씩 거리를 두고 묶어서 엄지손가락을 십자가 모양으로 해서 가슴에 꽉 조여 매고, 돌도 사람 머리만한 것으로 가슴에 묶어서 그 여러 사람되는 인원을 뒤에서 20명이 동원되어서 한꺼번에 빠뜨려 죽였다. 마지막으로, 장병태 성도 집에 거했던 김방호목사를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창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어서 김목사 사모를 그리고 또 다섯 아들과 8세와 5세 손자를 차례로 죽였다. 1951년 2월 24일 교인의 3분2가 순교를 당한 염산교회의 살아남은 성도들은 다시 모여서 땅 속에 항아리에 숨겨 놓은 성경책과 마루광 항아리에 숨겨둔 찬송가를 꺼내어 새롭게 교회를 세워나갔다. 1997년부터 순교기념 사업을 추진하여 2,000여평의 종교 용지를 마련하고 순교 공원을 조성, 순교자료 전시관과 순교 교육관을 개관하여 200여점의 자료 및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77인의 순교비를 완공하여 교회 앞에 세워 두었다. 또한 ‘77인의 순교사’ 책자와 DVD를 제작해 이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두고 있다.

 

 

첫번째 순교자 기삼도

첫번째 순교자는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염산교회 23세의 청년 기삼도로 죽창으로 여러번 찔려 순교당했다.  그는 당시 목포성경학교 3학년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두번째 순교자는 노병재 집사

노집사를 수문 뚝방까지 끌고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집사는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했고 그의 일가족 까지 9명이 순교했다.

장병태 성도의 순교 김방호목사 일가족 순교

장병태 성도 집에 거했던 김방호목사를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창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어서 김목사 사모를 그리고 또 다섯 아들과 8세와 5세 손자를 차례로 죽였다.

 

순교탑은 9.28 수복 과정에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된  영광 지역의 194명의 순교인을 추모하며 세운것이다. 탑의 형상은 전체의 모습은 사람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팔을 벌린 모습과 천사의 날개, 성부 성자 성자를 상징하는 3개의 원점, 머리의 원은 가시면류관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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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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