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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이스라엘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의 성전산 문제는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인 다윗 왕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구약시대 유다지파에 속하는 무명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냈다. 그는 베들레헴의 목동 출신으로 이스라엘 왕의 자리까지 오른 다윗 왕이었다. 다윗은 천부적인 군사지도자였다. 양을 치던 목동 시절에 이미 블레셋족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매 돌 하나로 거꾸러뜨린 무용담을 남기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이 블레셋족과 싸우다 전사한 후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무장으로서 재능을 십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주변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여 이스라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모든 것을 다 이룬 다윗 왕이었으나 한 가지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성전 건축은 그의 뒤를 이을 다음 왕의 몫이었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일을 다 맡기지 않으셨다. 또한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지도 않으셨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그토록 소망했으나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모세는 요단강 동편 느보 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만보고 지상의 삶을 마쳐야 했다.

다윗 왕의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은 참으로 진지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대신 다윗 왕은 그가 할 수 있는 성전 건설의 준비는 모두 해놓았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했고 사재(私財)도 내놓았다. 건축에 필요한 설계도까지 준비했고 성전을 건축할 땅도 마련해 놓았다. 다윗 왕이 남긴 마지막 기도 역시 성전 건축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내가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역대상 29:19)

다윗 왕이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솔로몬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성전 건축은 그의 최대의 과업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해 목재로 쓸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솔로몬 왕은 좋은 목재로 유명한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해서 정성을 다해 성전을 건축했다. 솔로몬 왕의 성전 건축 과정을 구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돌은 채석장에서 다듬어 준비했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때는 망치나 정이나 그 어떤 연장을 다루는 소리도 성전에서 들리지 않았다”(열왕기상 6:7·공동번역)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성전 건축은 진행되었고 7년만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완공되었다(주전 950년대).

성전이 건축된 장소는 다윗 왕이 마련한 땅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성전이 지어진 곳을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 역대기는 성전산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이라고 명기하고 있다(역대하 3:1).

성전산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 아니라 종교적 중심도시로 확고히 자리매김되었다.

솔로몬 왕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성전의 모습을 정확히 재현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성전은 정동(正東) 방향이었고 삼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성전 입구에는 2개의 큰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서 있었다. 성전으로 들어가 현관(낭실)을 지나면 본전(성소)이 있었고 제일 끝 부분에 지성소(至聖所)가 위치했다. 지성소는 이스라엘 신앙의 상징인 법궤가 안치된 곳으로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다.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은 100평 남짓한 크기로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여호와의 집’으로 불렸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었고 성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성전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더 낫다고 노래했다.

솔로몬 왕이 건축한 성전은 약 400년동안 이스라엘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주전 580년대 예루살렘에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닥쳤다. 당시 중동지역을 제패했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초토화시켰다. 이때 성전산 위의 성전도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유다왕국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로 유대인들의 고난과 고통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전산 위에 성전을 재건하겠다는 염원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이사야 45:1)

역사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승승장구하는 페르샤의 ‘고레스’(Cyrus) 왕에 관해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놀랍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페르샤의 ‘고레스’를 왕으로 기름부어 주셨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왕 이외에 다른 나라 왕에 대해 이런 말씀이 기록된 것은 ‘고레스’ 왕밖에 없다.

둘째는 고레스 왕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잡고 모든 나라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꿇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페르샤의 고레스 왕은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씀이다.

‘고레스’ 왕은 먼저 페르샤 지역(오늘날 이란)을 통일하고,여세를 몰아 바벨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벨론을 공략했다.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의 중심수도였으나,바벨론은 고레스 왕의 공격 앞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써 바벨로니아 제국시대는 끝이 나고 페르샤 제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때가 주전 539년이었다.

고레스 왕은 곧 바벨로니아 제국 내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칙령을 선포했다. 유명한 ‘고레스 왕의 칙령’이었다. 그 내용은 유다 포로민들의 해방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다 포로민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기쁜 소식이었다.

고레스 왕의 칙령이 선포되자,포로민 중에서 제1진이 예루살렘을 향한 귀향길에 올랐다. 귀향민들의 지도자는 유다의 왕족 ‘세스바살’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곧 예루살렘 성전 재건작업에 착수했다.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솔로몬 성전을 불태워 파괴한 후 약 50년간 성전이 세워졌던 성전산 구역은 폐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전 재건은 순조롭지 않았다. 가장 큰 장애는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성전 건축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큰 역사(役事)였다.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귀향민들로서는 자기들이 살아가야 할 집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전 건축은 감내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처음의 열의와는 달리,성전 재건은 기초공사만 마친 채 별 진전없이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때 귀향민 제2진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이들의 지도자는 일찍이 포로로 잡혀갔던 여호야긴 왕의 손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다. 이 두 지도자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전을 재건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이때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독려해줄 하나님의 메신저를 보내주셨다. 이들은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였다. 이들 예언자들은 성전 건축을 뒤로 한 채 자기들이 살 집 마련에 분주했던 귀향민들을 무섭게 책망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하나님)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내 집(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리고 예언자는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선언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개 1:8-9)

예언자들의 무서운 책망의 말씀과 스룹바벨의 지도력이 합해져서,성전 재건사업은 빠른 속도로 추진되었다. 바로 그 때 한 가지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도 성전 재건사업에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북이스라엘 왕국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후,앗시리아 제국의 피정복민들의 인구교환 정책에 따라 대부분 혼혈이 된 사람들이었다. 남쪽 유다 백성들은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혼혈된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멸시하고 천대해왔다.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을 때,예루살렘의 지도층은 이들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들과 함께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이 내민 선의의 손길을 유대인들이 뿌리쳐 버린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는 증오심으로 바뀌게 되었고,이후 그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들의 독자적인 ‘사마리아인 성전’을 세겜 근처 그리심산 위에 건축했다. 이로써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다시는 화해할 수 없이 결별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과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진행되어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산 위에 두 번째 성전이 완공되었다. 이때가 주전 515년이었다. 두 번째 성전은 유다의 왕족 스룹바벨의 지도력으로 건축된 것이기 때문에 흔히 ‘스룹바벨 성전’이라고도 부른다. 두 번째 성전(Second Temple)은 서기 70년 로마 제국의 군대에게 파괴당할 때까지 약 600년 동안 유대인들의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주전 330년대,중동 지역의 역사는 다시 한 번 소용돌이를 쳤다. 페르샤 제국의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를 전쟁터에서 만나게 되었다. 오늘날 터키의 남단 이수스(Issus) 평원에서 벌어진 역사적 전투에서 페르샤의 주력 대군은 23세의 알렉산더가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고 말았다. 페르샤의 다리우스 왕은 혼비백산 도주했고,그의 왕비와 왕족들은 알렉산더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200년간 역사의 중앙무대를 차지했던 페르샤 제국은 퇴장하고 알렉산더가 문을 연 희랍 시대가 개막되었다. 희랍 시대 예루살렘의 두 번째 성전은 크나큰 수난을 겪는 일이 일어났다.

박준서 교수(연세대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