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지방은 해수면보다 210 m 낮은 곳에 위치한 갈릴리 바다 (혹은 호수)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요단강 계곡의 평야화 이즈르엘 평원 (yizreel Valley)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각종 산업과 어업이 발달하였으며 다른 지방에 비해 천연적인 혜택을 많이 받은 곳이다.
그러나 정치적, 종교적 배경으로 볼 때는 구약시대의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종교의 변방으로서 실상 "멸시를 당하던 스블론과 납달리 땅" (사 9:1) 이었으며, 솔로몬 왕때는 성전을 짓기 위해 수입한 백향목, 잣나무 값으로 인하여 진 부채를 값지 못해 두로 왕 히람에게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떼어 주었으나, 그의 눈에는 들지 않았다 (왕상 9:10 ~ 14). 갈릴리 북부의 대부분은 산지로서 크게 유용하지 못하였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BC 721년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한 이후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방인의 갈릴리"(사 9:1)가 되었으며, 마카비 전쟁때 "갈릴리에 사는 전 이방인들이 합세하여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 하자 구출을 위해 진군" 하는 기록에서도 그 시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헤스모니안 왕조의 아리스토불러스 1세 ( BC 104 ~ 103) 는 갈릴리를 정복하여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 시킴으로써 갈릴리의 유대 재편입을 이룩하였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갈릴리는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 1세기겨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율법을 증오하는 갈릴리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면서 이들을 종교적 이유로 비판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 (요 7:49)로 규정하고,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요 7:52)고 확신하였다. 또한 베드로를 '갈릴리 사람'(눅 14:70)으로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야 말로 메시아를 대망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자들이었다. 제1차 유대 반란의 진원지가 바로 갈릴리였음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지리적 위치로 보면 예수의 공생애 활동의 선교 본부였던 가버나움은 다양한 계층의 '허다한 무리' (마 4:25)가 통행하던 해변의 길 (Via Maris) 의 통로로써 이곳을 지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음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복음서의 천민 (창녀 눅 8:2) , 귀족 (헤롯 안티파스와 함께 자란 요안나, 눅 8:2), 왕의 신하 (요 4:46 ~ 47), 부자 (눅7:36), 군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 (눅 7:2 ~ 10)등의 다양한 계층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 시대의 이 지역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의 미래의 선교 전략을 위한 기초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복음을 받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자발적으로 확산되게 하는 이중적 효과를 예견한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복음의 확산과정을 보면 사도들 중심의 선교사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숨어 등장하는 익명의 많은 사람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음 또한 사실이다.
티베리아 (Tiberias)
티베리아는 갈릴리 호수 서안에 위치하는 온천 휴양지이다. 티베리아는 주후 17년 헤롯왕의 아들 헤롯 안티바스(Herod Antipas)가 건설한 도시로서, 로마 황제 티베리아스(Tiberias)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이 도시가 세워진 후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이곳에 살기를 거부 하였으나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 된 후 차츰 유대인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유태 지식인들이 이곳에 모였고 미슈나(Mishnah)와 팔레스틴 탈무드(Palestinian Talmud)가 이곳에서 완성 되었다.
※ 미슈나(Mishnah) : 구약 율법(Written Law)에 대한 구전법(Oral Law)을 집대성한 것 으로서 주후 200년 경에 완성 되었다.
※ 탈무드(Talmud) : 미슈나에 대한 논의, 해석, 주석, 설명을 총 집대성한 것으로 주후 5세기 경에 완성 되었다.
또한 히브리어에 모음과 구두법에 문법을 도입한 것도 이곳에서 였다고 한다. 따라서 유태인들도 티베리아를 그들의 4대 성도 중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종교적 배경으로 볼 때는 구약시대의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종교의 변방으로서 실상 "멸시를 당하던 스블론과 납달리 땅" (사 9:1) 이었으며, 솔로몬 왕때는 성전을 짓기 위해 수입한 백향목, 잣나무 값으로 인하여 진 부채를 값지 못해 두로 왕 히람에게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떼어 주었으나, 그의 눈에는 들지 않았다 (왕상 9:10 ~ 14). 갈릴리 북부의 대부분은 산지로서 크게 유용하지 못하였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BC 721년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당한 이후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방인의 갈릴리"(사 9:1)가 되었으며, 마카비 전쟁때 "갈릴리에 사는 전 이방인들이 합세하여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 하자 구출을 위해 진군" 하는 기록에서도 그 시대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헤스모니안 왕조의 아리스토불러스 1세 ( BC 104 ~ 103) 는 갈릴리를 정복하여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 시킴으로써 갈릴리의 유대 재편입을 이룩하였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갈릴리는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 1세기겨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율법을 증오하는 갈릴리 사람들이여"라고 말하면서 이들을 종교적 이유로 비판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 (요 7:49)로 규정하고,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요 7:52)고 확신하였다. 또한 베드로를 '갈릴리 사람'(눅 14:70)으로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야 말로 메시아를 대망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자들이었다. 제1차 유대 반란의 진원지가 바로 갈릴리였음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지리적 위치로 보면 예수의 공생애 활동의 선교 본부였던 가버나움은 다양한 계층의 '허다한 무리' (마 4:25)가 통행하던 해변의 길 (Via Maris) 의 통로로써 이곳을 지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음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복음서의 천민 (창녀 눅 8:2) , 귀족 (헤롯 안티파스와 함께 자란 요안나, 눅 8:2), 왕의 신하 (요 4:46 ~ 47), 부자 (눅7:36), 군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 (눅 7:2 ~ 10)등의 다양한 계층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 시대의 이 지역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의 미래의 선교 전략을 위한 기초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복음을 받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자발적으로 확산되게 하는 이중적 효과를 예견한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복음의 확산과정을 보면 사도들 중심의 선교사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숨어 등장하는 익명의 많은 사람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음 또한 사실이다.
티베리아 (Tiberias)
티베리아는 갈릴리 호수 서안에 위치하는 온천 휴양지이다. 티베리아는 주후 17년 헤롯왕의 아들 헤롯 안티바스(Herod Antipas)가 건설한 도시로서, 로마 황제 티베리아스(Tiberias)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이 도시가 세워진 후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이곳에 살기를 거부 하였으나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 된 후 차츰 유대인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유태 지식인들이 이곳에 모였고 미슈나(Mishnah)와 팔레스틴 탈무드(Palestinian Talmud)가 이곳에서 완성 되었다.
※ 미슈나(Mishnah) : 구약 율법(Written Law)에 대한 구전법(Oral Law)을 집대성한 것 으로서 주후 200년 경에 완성 되었다.
※ 탈무드(Talmud) : 미슈나에 대한 논의, 해석, 주석, 설명을 총 집대성한 것으로 주후 5세기 경에 완성 되었다.
또한 히브리어에 모음과 구두법에 문법을 도입한 것도 이곳에서 였다고 한다. 따라서 유태인들도 티베리아를 그들의 4대 성도 중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갈릴리 바다(The Sea of Galilee)
이 바다는 '갈릴리 바다' (마 4:18), '디베리야 바다' (요 6:1) , '게네사렛 호수' (눅 5:1), 또는 '겐네렛 바다' (민 34:11, 수 12:3, 13:27) 등으로 불리운다. 본래 히브리어 키노르 (kinnor)는 하프(harp))로 갈릴리 호수의 모양을 말해주고 있으며, 바다를 일컫는 얌(Yam)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부는 '바다'로, 일부는 '호수'로 번역되면서 '바다' 또는 '호수'로 그 명칭이 달라지게 되었다.
길이 21 Km, 폭 13 Km의 이 바다는 해수면이 낮아 해발 -210 m 이고 바다의 수심은 약 44 m 에 이르고 있다. 수십 종의 고기들이 살고 있으며, 그중 속칭 '베드로 고기'는 유명하여 여행자들의 음식이 되기도 한다.
헤르몬 산으로부터 훌라계곡 (Hulla Valley)을 따라 내려오는 물이 저장되어 있는 이 물은 현재 이스라엘 국민의 수원(水原)이 되고 있어 젖줄이라 말할 수 있다. 갈릴리 하구 지역은 예로부터 매우 기름진 땅과 풍부한 수량으로 농사에 적절한 지역이었으나, 그 이외의 지역들은 낮은 곳의 이 물을 끌여들여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이들로서는 별 효용가치가 없었다.
갈릴리의 중요한 산업으로 어업은 빼놓을 수 없다. 예로부터 이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은 여러 지방으로 수출되었으며, 고기잡이 하던 배는 수없이 많았다. 1985 ~ 6 년 갈릴리 호수에서 발견된 BC 1 세기 ~ AD 1 세기의 나무로 만든 배는 예수 당시의 바다에서의 생활을 잘 모여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활동을 바로 이곳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한 약 12개 마을을 중심으로 개시하셨으며, 그의 제자들 가운데 6명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그리고 마태 - 이 이곳 갈릴리 출신들이었다.
'여행지정보 > 이스라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라엘] 유대광야 (0) | 2015.07.07 |
---|---|
[이스라엘] 예루살렘 골고다언덕(Golgotha) 성묘교회 (0) | 2015.07.07 |
[이스라엘] 예루살렘 감람산 예수님승천기념교회 (Chapel of the Ascension) (0) | 2015.07.07 |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0) | 2015.07.07 |
[이스라엘] 예루살렘 감람산 눈물교회 (Dominus Flevit) (0) | 2015.07.07 |
[이스라엘] 베들레헴 (0) | 2015.07.07 |
[이스라엘] 베드로 통곡교회 (St. Peter in Gallicantu) (0) | 2015.07.07 |
[이스라엘] 베들레헴 목자들의교회 The Shepherd's Field Church (0) | 2015.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