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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터키

[터키] 노아의 방주 아라랏산,이삭파샤사라이,반호수,반,가지안텝



아라랏과 반

노아의 방주가 정말 있었을까?

터키에서 제일 높은 산은 바로 아라랏(ararat)산이다. 터키 사람들은 이 산을 뷰육 아으르(buyuk agri)산이라고 부르는데 ‘큰 무거운 산’이라는 뜻이다. 높이가 5,165미터로 만년설로 덮여있고, 산 정상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 만큼 높기 때문이리라.

몇해 전 터키의 유명한 산악가의 목숨을 앗아가지도 했던 결코 쉽지만은 않은 산이다. 이 산이 우리에게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성경 때문이다. 모두들 잘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아라랏이다. 지금도 적지 않은 성지 순례객이 이 곳을 찾는다.

노아의 방주가 닿았다는 흔적이 있는 곳은 실제로 아라랏 산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닻 형태의 것도 있는데 실제로 바로 이것이 그것인지는 정확치 않다.

어쩌면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노아시대 때의 홍수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전에는 흑해도 호수였지만 노아 시대의 홍수에 의해서 바다와 연결 됐다고 하니까 말이다.

노아의 방주가 닿은 흔적

도우 베야짓(dogu beyazit)은 그렇게 크지 않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예전에는 상업의 중심지로 이란과 아나톨리아, 또 흑해를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고, 지금은 이란과의 국경 무역이 활발한 지역이다. 예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의 영토가 된 적이 있었다. 인구의 대부분이 쿠르드인으로 역시 터키어보다 쿠르드어가 많이 쓰인다.

이곳 도우 베야짓에선 아라랏 산이 아주 잘보인다. 아라랏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관광객들에겐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만년설에 뒤덮인 크리스천, 유대교인과 이슬람교인의 영산 아라랏은 끊임없이 신비를 토해내는 산으로 인류에게 자리 잡을 것이다.

이 곳에서 노아의 방주가 닿은 흔적이 있는 장소는 일반 배낭 여행객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길이 좋지 않아서 버스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말이다. 필자도 버스가 못 올라가서 지름길을 찾는다고 언덕으로 올라섰다가 고지라는 것을 잠시 잊고 너무 빨리 행동을 취했다가 고생을 하고 심지어는 양치기 개한테 쫓겨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던 것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이곳은 평지도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지대란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걸 너무도 어렵게 찾으니 실망과 기쁨을 반반씩 느끼며 노아의 방주가 닿았다는 곳에 도달했다. 크리스천들의 흥미를 자아내는 노아의 방주의 흔적은 바로 길가에 있다. 만약 버스가 못 올라간다 해도 큰길에서 이탈하지 말고 올라가면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본인 같은 실수를 하지 마시길.

그루지안 스타일의 이스학파샤사라이

도우 베야짓(또는 도우 바야즈트)에서 빼놓지 말고 봐야하는 곳은 바로 이스학 파샤(Ishak pasa) 사라이(saray·궁전)다. 도우 베야짓의 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이 궁전은 항상 많은 유럽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으로 상당히 높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역시 걸어서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

웅장하게 산기슭에 솟아 있는 궁전은 18세기 이 지역의 영주 이스학 파샤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궁전으로 이스학 파샤의 아버지가 짓기 시작해서 그의 아들 마흐뭇 파샹에 의해 완성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저녁 해질 무렵의 광경은 터키의 동부를 상징하는 포스터의 대표주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궁전의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완성됐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하다. 건축방식도 셀축과 그루지안 스타일의 여러 건축 방법이 혼합돼 있으니 그것도 신기한 일일뿐 아니라 동부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견디기 위해 중앙난방 시스템으로 설계된 것도 당시의 기술 수준을 알려주고 있다.

터키의 어딜가나 그렇듯 당연히 우뚝 솟은 회교사원이 있으며 역시 미나렛(minaret·회교사원의 첨탑)도 쭈욱 뻗어있다. 회교에서는 남자들이 생활하는 세람륵(selamlik)과 여자들과 아이들이 기거하는 하렘륵(haremlik)으로 궁전울 구별한다. 여기도 마찬가지 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벽의 곳곳에 새겨져있는 부조는 정말로 아름다운데 바로 셀축 스타일이다. 이 궁전의 뒤쪽에 자리잡은 우랄투인들의 성도 역시 이곳을 돋보이게 하는 유적 중 하나다. 최초에 아나톨리아의 문명인 중에서 우랄투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 산성은 그 후에도 비잔틴 제국과 셀축조에 이어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도 사용돼 왔다.

바다같은 호수 반(Van)

도우 베야짓에서 반(Van)으로 이동하다 보면 무라디예라는 정말 아름다운 폭포를 지나가는데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되어있다. 역시 배낭여행객은 방문할 수 없다. 이 폭포앞에 놓여 있는 구름다리에 서서 폭포를 바라보아도 좋고 좀 더 여유가 있다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폭포의 물줄기를 감상하는 재미를 누려보길 권한다.

반은 캐디(kedy)와 반 호수로 유명한 터키 동부의 최대 도시로 역시 이곳 사람들도 대부분이 크루드인이다. 반은 내륙에 위치하면서도 해변을 가지고 있는 도시인데 반 사람들은 반 호수를 바다라고 부른다. 그 만큼 크다는 이야기다. 터키에서 제일 큰 반호수, 그와 접한 반은 호수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도시다. 간혹 반에서는 두 눈동자가 다른 고양이를 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반 고양이 인데 터키 정부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다.

 













 



반에서 남쪽 길을 따라서 게바쉬(Gevas)로 간 다음에 거기서 보트를 타고 악다마르섬에 갈 수 있다. 악다마르에는 아주 작지만 아름다운 아르메니아의 교회가 있는데 이 악다마르섬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하며 반으로의 여행을 마치겠다.


악다마르교회악다마르교회

 




옛날 교회의 주교에게 타마르라고 하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 딸은 마을의 한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알게 된 주교는 타마르를 섬으로 옮겨가게 한다. 주교의 딸 타마르를 사랑하는 총각은 타마르가 비춰주는 촛불을 향해서 섬으로 헤엄쳐가서 타마르를 만나곤 했다.

이것을 눈치챈 주교는 어느날 밤 촛불을 들고 나와서 청년에게 신호를 보낸다. 자기의 연인 타마르의 신호인줄 안 청년은 밤에 수영을 해서 섬으로 간다. 그러나 신호가 되는 불빛은 이리저리로 방향을 바꾼다. 그만 힘이 빠진 청년은 “아! 타마르”라는 말을 남기고 물에 빠져 죽는다.

아침에 이 사실을 안 타마르는 청년을 따라 물 속에 몸을 던진다. 이 말에서 악다마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전설이겠지만, 전설 만큼이나 아름다운 섬 악다마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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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동부에서는 타 지역에서보다 유달리 검은 흙,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대규모로 방목되는 양떼 및 소떼가 자주 눈에 띈다. 이처럼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 빚어진 근원은 동부에 풍부하게 자리한 물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이 시작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상류지일 뿐만 아니라 터키 최대의 호수인 반호수를 품은 곳이 바로 이곳, 반(Van)과 디얄바키르(Diyarbakir) 지방이다. 다른 문명이 그러했듯이, 이곳 역시 풍요로운 문명을 탐낸 외적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견뎌내야 했던 굴곡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늘만큼 푸른, 바다만큼 넓은 호수

반호수(Van Lake)의 제일 넓은 곳을 직경으로 측정한 길이가 119㎞에 달하고 차로 호수 주변을 한바퀴 도는데 8시간이나 소요된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바다처럼 파도가 칠 때도 있지만, 평균적으로는 물살이 잠잠한 편이라, 호수 표면이 가까운 하늘의 푸르름을 그대로 담아내 운치 있는 풍광을 연출한다. 평균해발 950m인 터키답게 반호수가 위치한 높이도 해발 1700m. 이렇게 높은 곳에 이처럼 대규모의 호수가 자리 잡은 것도 놀라운데, 반호수는 또다른 역사학적 가치를 여럿 지녀 그 존재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반호수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 봤을 때 세계 각지의 종교학자에 의해 인류가 처음으로 존재했던 곳, 즉 ‘에덴동산’이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또한 BC 9세기~AD 10세기까지 히타이트족부터 우랄루트, 아르메니아인 등이 이곳에 문명을 뿌리내렸고 또 그를 지키기 위한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켰다.

-에덴동산, 노아의 방주를 품은 곳

반 호수 인근 언덕 위에 세워진 반 칼레(Van Castle)는 대리석과 타조알 등을 섞어 반죽한 독특한 건축 재료로 지어졌으며, 히타이트 멸망 이후 번성한 우랄루트 왕국에 의해 건설됐다. 현재 우랄루트 왕국에 대해선 남겨진 자료 및 사료가 많지 않아, 반 칼레는 역사학적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채 위로 오르면 지평선처럼 펼쳐진 반 호수의 전경을 보다 시원스레 감상할 수 있다. 말을 기르던 곳, 가축을 희생해 제사를 지내던 장소 등이 고스란히 남아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반호수 반대편으로 아스라히 보이는 아라랏산은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이후 처음으로 정박한 장소다.

-아브라함의 고향에 몰리는 무슬림

터키는 이스라엘보다 성지가 많이 분포, ‘성경의 땅’이라 지칭해도 손색이 없는 나라다. 그중 아브라함의 고향이자 아브라함의 연못, 물고기가 있는 디얄바키르의 산르 우르파(Sanli Urfa)는 성경학적 가치로 인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 유대교인까지 전세계의 종교인이 모여드는 성소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터키의 국교가 이슬람교다 보니 현지를 가보면 이슬람 성지순례자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아브라함의 성소에 세워진 할릴 라흐만 역시 이슬람 사원이다. 이슬람 국가의 교리에 따라 아브라함이 태어난 동굴에 입장하기 위해서도 여성 및 남성의 입구가 다르며, 여성의 경우 입구에 비치된 차도르를 반드시 착용하고 신발을 벗어야만 입장이 허용된다. 어디서나 코란을 꺼내들고 진지하게 글을 낭송하는 여인과 일반 길거리에서보다 엄격한 복장을 착용한 무슬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층은 이슬람 복장을 갖춰 입는게 일반적이지만 나이가 어려질수록 옷차림이 현대적으로 바뀌는 모습에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바뀌는 전통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플러스 알파

1. 반 디얄바키르로 가려면 주로 비행기를 이용한다. 이스탄불에서 국내선을 타고 반 공항으로 이동하면 된다. 비행시간은 약 2시간 가량. 반에서 디얄바키르는 주로 버스로 이동하며 소요시간은 약 5시간 남짓 걸린다.

2. 군인, 군부시설은 촬영 금지! 동부에서도 디얄바키르 지역은 시리아, 이라크 등 분쟁이 잦은 나라들과 국경이 가까워 쿠르드 반군이 종종 출몰하거나 밀거래가 적발되기도 해, 관광차량임에도 불구하고 무장군인이 검문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국가경비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요즘 시리아, 이라크의 국내사정이 살벌하기 때문에 사진촬영 금지 등의 규제가 비교적 심한 편이니, 트러블이 생기길 원치 않는다면 ‘로마법을 따르는’ 게 상책이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方舟)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 (창 6:14)
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창 8:4 - 5)

아라랏 산

 

터어키의 동부 아르메니아 지역, 소련과의 국경지역에 아라랏(Ararat) 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또한 이 아르메니아 지역의 옛 이름이 아라랏 이라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이 산을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고 믿어왔으며, 신성하게  여겨왔다. 마르코 폴로도 그의 동방견문록에서 이곳을 " 만년설로 뒤덮인 아무도 오를 수 없는 그곳에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고 기록했다.
해발 5,156 m 의 아라랏 산은 넓은 들판에 홀

로 솟아 있으며, 그 높이에 견주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게다가 구름 속에서 어쩌다 잠깐 모습을 보이는 산꼭대기는 흰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어 장엄함과 신비함을 더해 준다. 거기에 대홍수에 관한 전설까지 곁들여졌으므로 사람들은 대대로 이 산을 공경하고 두려워 하였다.

기원전 300년, 바빌로니아의 신관 베롯소스는 '방주 있는 곳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언제나 배에서 송진을 긁어내어 악마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삼았다' 고 썼다. 기원 초기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자 죠지 하고피안 (George Hagoppian)이 방주를 찾으려고 몇 번이나 아라랏 산에 올랐다. 그가 세번째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은 이 산에 오르지 말라고 하시며 방주의 나무 조각 하나를 주셨다는 말이 전해 진다. 어쨌든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거의 2 천여년간 아무도 이 신성한 산에 오르지 않았다. 아라랏은 '노아의 방주'와 '에덴동산'이 있었던 성지로, 하나님이 출입을 금한 금역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아왔다.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성서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바빌론, 메소포타미아등 중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원전 3천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수메르 (Summer)의 서사시, '길가메쉬의 서사시' 가운데 200행에 가까운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으며, 기원전 1700년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때의 점토판에도 '7일 낮 밤 큰비가 땅 위로 쏟아져 내렸으며, 큰 배가 바다로 떠내려 가자 태양신이 나타나 하늘과 땅에 빛을 내려 주셨다'고 씌어 있다.

 

탐사의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방주를 찾아 보려는 일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조직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했다. 1829년 10월 독일의 파로트(Parrot) 교수가 처음으로 아라랏 산 꼭대기에 올랐으나 방주는 찾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54년 뒤인 1883년 5월, 지진피해를 조사하던 터키 관리들이 빙하에 드러난 나무로 된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거의가 얼음에 묻혀 있었으므로 전체 모습과 크기를 알 도리는 없었지만, 그 안에는 높이 5 m 짜리 칸막이가 줄지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 물체가 드러누워 있는 모양으로 보아 산등성이를 빙하와 함께 미끄러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 했다. 온 세계가 놀랐지만, 사진이 없었으므로 미심쩍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방주 이야기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앞뒤로 해서 많이 쏟아져 나왔다. 주로 전쟁터에 나갔던 조종사들의 목격담이었다. 1916년 늦여름, 아라랏 산에서 북쪽으로 40 km 떨어진 곳에 있는 러시아 제국 제3 코카서스 항공 분견대에 근무하던 블라디미르 로스코비카(Roskovitsky) 중위는, 어느날 새 비행기를 시험하느라 아라랏 산 근처에 다녀왔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 눈 덮인 산꼭대기를 몇 킬로쯤 돌아서 남쪽으로 날아가니 사파이어처럼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산 그늘 쪽은 아직 얼어붙어 있었다. 호수 위를 지나친 나는 한번 더 살펴보려고 기수를 돌렸다. 그때 뒷자리에 탄 동료가 뭐라고 소리치며 호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둥그스름한 지붕으로 덮인 묘하게 생긴 배 한 척이 얼음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낮게 떠서 그 언저리를 몇 번이나 맴돌았다. 그 배는 엄청나게 컸다. 뱃머리에 가까운 한쪽옆은 많이 뜯겨져 있었고, 그 반대 쪽에는 7m 는 됨직한 큰 문이 나 있었다. 우리는 기지로 돌아오자마자 대장에게 그 일을 알렸다. 대장은 자기를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를 따라 호숫가의 배 모양을 살펴 본 대장은 부대로 돌아오면서 그것은 틀림없는 노아의 방주라고 말했다. 1년중에 두 달만 조금 드러나고 열 달은 얼음에 묻히므로 썩지 않고 5천년간 버텨왔을 거라는 것이 대장의 의견이었다. 대장은 이 사실을 로마노프 황제에게 보고 했다.

황제는 얼마 안있어 2개 중대를 보내왔다. 우리는 탐험대와 함께 산기슭 벼랑을 따라 길을 만들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배 있는 곳까지 닿은 때는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우리는 그 배의 크기를 재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배 안은 몇 백 개나 되는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는데, 어떤 방은 아주 크고 천장도 높았다. 마치 코끼리 같은 큰 짐승을 넣으려 만든 것처럼. 또 어떤 방에는 바구니가 겹겹이 줄지어 있어 새들을 넣어두는 방같기도 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구석구석에 촛농 같은 것이 두텁게 발라져 있었는데, 선체는 잘 썩지 않는 소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근처의 봉우리 꼭대기에서, 배의 한쪽에서 떨어져 나간 나무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일부러 그곳까지 옮겨져, 방 하나짜리 작은 신전을 짓는데 쓰였다. 그 신전은 불에 타 거의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1917년 봄 탐험대장은 사진과 함께 자세한 보고서를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제국은 볼세비키 혁명으로 무너졌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로잡혔고, 탐험보고서와 사진들은 신을 믿지 않는 볼세비키 들의 손에 넘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 우리 항공대의 몇몇 사람들은 아르메니아를 거쳐 자유 세계로 빠져 나왔다"

로스코비키라는 조종사의 이름은 그가 공산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거짓 이름을 쓴 것이므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꾸며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몇몇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 육군 장교들이 아라랏 산의 큰 봉우리와 작은 봉우리 사이 낙타등처럼 움푹 들어간 기슭으로 파견되었다는 말은 사실이며, 그때 비행사의 이름은 사보로키 중위와 레이진 중위, 지휘관은 콜 대령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탐사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소련 공군 마스케린 소좌가 1916년의 기록을 확인하려고, 부하로 하여금 아라랏 산을 정찰 비행토록 하였다. 부하는 돌아와서 얼어붙은 호숫가에 반쯤 파묻힌 배가 있다고 보고 했다. 특별 조사반이 그곳에 가서 조사한 바로는 그 배는 나무로 만들어 졌으며 거의 화석으로 변하였고, 길이는 120m가 넘는다고 했다 (성경에는 137m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에 붙여졌다.


이 배는 소련 쪽 기슭에 있었으므로 소년공군 조종사들은 많은 자료와 사진을 가자고 있었으나, 단 한 장도 미국인들에게 나눠 준 적이 없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소련은 동맹국이었으므로, 미군 조종사들은 1942년 '군사 원조 비행'때 아라랏 산 위를 날 수 있었다. 이때 찍은 사진들이 미군 잡지 '성조지'에 실렸으나 거의가 빨리 지나치면서 얼핏 찍은 사진들이어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배 모양을 보았다는 몇몇 미국인들 가운데, 1959년 터키에 머물렀던 미공군 제 428 전술 비행 중대의 슈잉하머(Schwinghammer) 소위가 제일 믿음직한 사람으로 꼽힌다.

"터키인 한 사람과 내 친구와 나는 F-100 전폭기를 몰고 아라랏 산으로 갔다. 며칠 전 미국인 교수에게서 노아의 방주가 그 산에 있다고 들었으므로 그 말이 진짜인지 알고 싶었다. 그곳은 소련 국경 근처인데다가, 얼마 전 C-130 수송기가 격추된 일이 있는 터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시계 바늘과 반대로 아라랏 산을 돌았다. 그러자 낙타등과 같이 생긴 산등성이 밑에 배같은 보양이 드러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모양으로, 너비는 12m 쯤이고 길이는 얼음 위로 드러난 것만 30 m 가 넘었다. 우리는 1,200m 높이에서 빠르게 지나쳤으므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U-2기 조종사가 그것을 촬영했다는 말을 어디선가들은 적이 있지만 사진을 본 일은 없다. 그날 우리는 소련 국경을 넘지 않으려고 서둘러 돌아왔지만, 우리가 본 물체는 틀림없이 네모난 배 모양이었다."

영원한 수수께끼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기독교 교단들은 앞을 다투어 탐험대를 아라랏 산에 보냈다. 그들은 방주를 찾아내어 성경의 기록을 증명하려 하였으나 아직 아무도 방주를 찾은 사람은 없다. 영국과 미국은 몇 차례 대규모 탐험대를 보냈지만, 정보부의 끄나풀이란 핑계로 소련과 터키로부터 번번이 등산 허가를 받지 못했다.

1974년 ERTS (지구 자원 탐사 기술 위성) 가 아라랏 산 위 740 km에서 어렴풋한 물체를 찍어 보내왔다. 미국의 모스 상원 의원은 이것의 크기나 모양이 방주와 꼭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주 아라랏 산을 비행기로 측량해온 터키 정부는, 그것은 화산암이 침식되어 우연히 배 모양을 나타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과연 노아의 방주가 아직 남아 있을까? 지금도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라랏 산에 대한 현대적인 과학탐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가슴속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으리라.

반 공항

 

반 공항

 

노아의 방주 방문센터

 

아라랏산

 

노아의 방주 터

 

반 호수

 

악다마르교회

 

이삭파샤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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