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기념비 부조. 왼쪽부터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처음 시작한 파렐, 칼뱅, 칼뱅의 후계자인 베자,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의 씨앗을 뿌린 낙스. 칼뱅 탄생 400주년이던 1909년부터 제작에 들어가 1917년 완성했다.
개신교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극심한 도덕적·물질적 타락에 맞선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 태어났다. 교회가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종교개혁 운동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개신교가 가톨릭에서 분리돼 거듭난 것이다. 약 500년 전 중세시대의 개혁을 지금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회가 당면한 현실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목회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자들도 많지만 한국 개신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개혁’을 요구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세속화에 따른 물질적 타락은 물론이거니와 성장제일주의, 교권주의, 거듭되는 분열, 기복신앙화 등으로 오히려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될 정도다.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의 독일, 스위스, 체코의 종교개혁 순례(3~10일)에 동행했다. 그 현장에서 한국 개신교회에 빛과 소금이 될 개혁의 정신을 찾아본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프랑스 출신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활동을 펼친 장 칼뱅(1509~64·존 캘빈)의 말이다. 한국은 물론 세계 장로교회의 초석을 쌓은 칼뱅은 교회의 개혁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개신교계에서 최대 규모의 교단이 바로 장로교회란 점에서 칼뱅의 신학체계, 그의 사상은 우리 개신교회의 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혁을 강조하는 칼뱅주의는 그의 제자이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인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로 다듬어진 뒤 미국 등으로 확산됐고, 한반도에도 감리교와 함께 다른 교파보다 일찍 들어왔다.
장로교의 특징은 교회 구성원들이 함께 교회를 운영하는 이른바 ‘교회회의(회중정치)’다. 칼뱅이 도입한 교회회의는 성직자의 독단적 지배가 아니라 교회 안팎의 다양한 의견을 모아 교회를 운영해가는 ‘교회 민주주의’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목사, 교사(박사), 장로, 집사 등 교회 내 직분체계의 틀을 만든 것도 칼뱅이다. 루터파 교회보다 더 엄격한 교회 가치를 강조한 칼뱅의 ‘개혁 교회’는 교회 내 장식물을 줄이고, 우상화를 우려해 성상 설치까지 금지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그 전통을 상당 부분 잇고 있다.
당초 서방 교회의 종교개혁 운동은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대학 교수이던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항의 논제를 담은 ‘대자보’를 붙이면서 본격화했다. 루터는 95개 논제를 통해 면죄부 판매 등 당시 로마 가톨릭의 행태에 대한 공개 토론을 제안했고, 그의 문제 제기는 삽시간에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대자보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독일을 넘어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으로 확대됐고 깊이도 더해졌다.
2세대 종교개혁가라고 할 수 있는 칼뱅은 루터의 개혁조차 개혁돼야 한다며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프랑스 누아용 출신의 그는 파리에서 대학을 다녔으나 교회의 본질적 순결성을 회복하는 데 사명을 바쳐야 한다고 깨닫는다. 이후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스위스 바젤로 떠나 앞선 종교개혁자들인 파렐 등과 교유한다. 바젤에서 칼뱅은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을 담은 <기독교 강요(綱要)> 초판을 펴낸다. 칼뱅은 개혁운동 초기 지나치게 엄격한 신앙생활 요구 등으로 배척받기도 하지만 결국 성 피에르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종교개혁을 이끈다.
기자가 지난 8일 찾은 성 피에르 교회는 제네바 구시가지에 있었다. 빌딩 위로 뾰족이 첨탑을 내민 교회는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교회는 칼뱅의 종교개혁 본산인 데다 교회 탑에 올라갈 경우 제네바 시내를 둘러볼 수 있어 꽤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종교개혁 기념공간이 있다. 바스티옹 공원 내에 마련된 기념공간에는 칼뱅을 비롯해 파렐, 칼뱅의 후계자인 베자,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뿌리 내린 낙스 등 4명의 모습을 담은 거대한 부조가 우뚝 서 있다. 길이 100m, 높이 10m의 장대한 돌벽에 새겨진 부조는 순례객들을 압도한다. 벽에는 당시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Post Tenebras Lux(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어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과 개신교 역사의 한 단면을 느낄 수 있다.
칼뱅이 1559년 세워 칼뱅주의의 국제적 거점이 된 ‘제네바 아카데미’를 모체로 한 제네바 대학교
아름드리 소나무, 참나무가 들어선 공원 한쪽의 기념상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그 건너편에는 칼뱅이 1559년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를 모태로 한 제네바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낙스가 “사도 시대 이래 지상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말한 제네바 아카데미는 칼뱅주의의 국제적 거점이다. 이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수많은 이들이 세계로 퍼져 칼뱅주의를 확산시켰다.
칼뱅은 루터나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이끈 츠빙글리(1484~1531) 등 앞선 종교개혁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섰다.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 신국일 목사는 “종교개혁의 의미는 시대를 막론하고 되새겨야 할 가치”라며 “근본 정신은 루터로 시작했지만, 체계화나 실천화는 칼뱅을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칼뱅은 끊임없는 교회의 개혁을 강조했다. 그가 도입한 장로 중심의 4개 직분은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철저한 봉사직이었다. 나아가 시민들의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꿈꾸었고, 시민들의 실천을 요구했다. 그는 모두가 자신이 맡은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하기를 요청했다. 바로 코람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 신앙이다.
한국 개신교회는 칼뱅주의의 맥을 잇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금언을 지금도 과연 잊지 않고 있는가. 가톨릭 교회에서 개신교회로 바뀐 성 피에르 교회 마당에 서니 문득 드는 생각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16절)
제네바 칼뱅무덤
제네바(스위스) | 글·사진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중세 가톨릭의 부패를 상징하며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당시 면죄부와 돈. 독일 비텐베르크의 루터 박물관인 ‘루터 하우스’에 소장돼 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 논제를 붙여 종교개혁의 발원지가 된 독일 비텐베르크의 캐슬교회 전경. 캐슬교회 대문에는 95개 논제가 새겨져 있다.
‘루터의 도시’인 독일 비텐베르크의 한 식당 앞 길 위에 세워진 루터상.
1517년 10월31일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의 캐슬성당. 주민들 사이에 서로 소식을 전하는 공간인 성당 대문에 한 장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사제이자 비텐베르크대 신학교수이던 마르틴 루터(1483~1546)가 한창 판매 중이던 면죄부의 옳고 그름을 신학적으로 토론해 보자며 붙인 벽보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면죄부만 사면 연옥에 있는 조상들까지도 천국으로 갈 수있다”며 면죄부를 팔아 돈을 챙겼다. 면죄부는 부패하고 세속화된 중세 종교의 표징이다.
루터는 대자보에 “우리의 주이시고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는 회개하라’고 했을 때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하는 것이 돼야 함을 의미한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모두 95개의 논제를 담았다.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요약하면 성경으로 본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 교황권의 문제, 특권 속에 군림하는 사제 등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루터는 “죄는 면제부가 아니라 회개로 용서되고, 교황은 면죄부를 팔아 곳간을 채우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의 논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등 기술 발전, 부패한 가톨릭에 대한 뜨거운 개혁 욕구 등에 따라 독일 전 지역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인류사를 바꾼 종교개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루터가 지핀 종교개혁 운동의 불길은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결국 개신교는 가톨릭에서 분리됐다. 원성을 받던 중세 가톨릭에 대한 ‘개혁’의 산물이 현재의 개신교다.
지난 5일 새에덴교회(담임 소강석 목사)의 종교개혁지 순례단과 함께 독일 동부 작센안할트주의 비텐베르크를 찾았다.
엘베강을 끼고 있는 비텐베르크는 종교개혁 운동의 발원지답다. 온전히 루터의 도시다. 공식적으로도 비텐베르크는 ‘Lutherstadt Wittenberg(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로 불린다. 각국 사람들이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루터가 95개의 논제를 붙인 캐슬교회다. 동판으로 덮인 교회 대문에는 후세인들이 95개 논제를 라틴어로 새겨놓았다. 교회 내부에는 루터와 루터의 제자이며 최고의 동지이던 멜란히톤의 무덤,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한 설교대도 옮겨와 있다. 캐슬교회 안내자로 일했다는 베르하르트 그룰(75)은 “요즘은 해마다 약 20만명이 찾아 온다”며 “종교개혁의 상징이니 당연하다”고 말한다.
비텐베르크에는 루터의 삶과 종교개혁 과정을 보여주는 유품 등이 소장된 루터 박물관 ‘루터 하우스’,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파문장을 불태우고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선 현장인 ‘루터의 참나무’, 멜란히톤의 집 등도 남아 있다. 이들 유적지는 루터의 고향인 아이슬레벤의 유적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독일 곳곳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자취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 잘 보존돼 있다. 아이제나흐 인근 바르트부르그 성에는 살해의 위협을 피해 숨어 있으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 성경으로 펴낸 ‘루터의 방’이 순례객에게 감흥을 안긴다. 독일어 성경은 사제들만이 볼 수 있던 당시 성경을 그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했다는 의미와 더불어 독일어 발전에도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 고전문학의 최고로 손꼽히는 ‘니벨룽겐의 노래’ 무대인 보름스도 중요한 종교개혁 순례지다. 루터는 신성로마제국 제국회의장에 소환돼 화형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나는 이곳에 섰습니다. 나는 (진리를 따르는 것밖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서있던 자리는 지금의 보름스대성당 뒤뜰로 ‘황제와 제국 앞에 여기 (루터가) 서 있었다’란 문구가 새겨진 명판이 있다. 인근에는 루터와 체코의 얀 후스, 영국의 위클리프, 이탈리아의 발덴저와 사보나롤라 등 종교개혁 운동가들의 동상이 순례객을 맞는다.
종교개혁지 가이드를 한 독일 슈발바흐성령교회 신국일 목사는 “근래들어 한국 개신교계도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숨쉬는 현장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개혁을 요구받는 한국 개신교계 지도자들이 먼저 찾아야 할 곳이 바로 종교개혁 현장이다. 중세 가톨릭에 맞서 개혁된 교회를 표방했지만 이젠 공공연하게 개혁 대상이 된 게 우리 개신교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세속화, 교권 강화, 권력화, 평신자들과 괴리된 사제들의 특권의식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곤 ‘오직 신앙’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등을 주창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본질, 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했다.
루터가 비판한 당시 가톨릭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 개신교회 실상과 많이 겹쳐진다. 낮고 누추한 곳을 지향해야 할 교회가 물질과 성장주의에 빠져 그저 커지기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실천되는가가 아니라 주일 예배에 몇만명이 오는지가 목사와 장로들의 관심 대상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찾기보다 공공연하게 권력을 꿈꾸고, 교권 다툼으로 목사들끼리 폭력사건까지 벌어지는 곳이 한국의 교회다.
과연 루터가 지금 한국 교회에 온다면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우리 개신교계 성직자들이 스스로에게 꼭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할 만큼 뜨겁다. 세계에서 유일한 새벽기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이 따라나서겠다고 선언한 그리스도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사회적 약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길이다. 과연 개신교인들은 교회 밖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지 자문할 일이다. 이제는 우리 목사님이, 우리 교회가 종교개혁의 그 정신을 제대로 실현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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