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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독일] 하이델베르크 [Heidelberg]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예로부터 예술과 교육의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매료시킬 만큼 시정이 넘치는 도시이다. 유유히 흐르는 네카강 건너편 언덕 중턱에 길게 누워있는 철학자의 길을 따라 거닐며 내려다 보이는 붉은 벽돌색 지붕의 대학가와 구 도시, 그 위에 떠 있는 듯한 고성의 모습 등, 모든 경치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버린다. 




하이델베르그 고성은 독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13세기부터 팔츠 선제후인 비테르스바하 가문의 역대 왕들이 건축한 성으로 고딕에서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였는데, 17세기 오를레앙 계승전쟁시 프랑스의 루이14세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386
년 선제후 루프레히트1세가 세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현재까지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 X-Ray를 발명한 뢴트겐도 이 대학 출신이다. 
마틴루터의 친구이며 동역자인 종교개혁자 멜랑흐톤도 1509~1512년 하이델베르그대학을 다녔는데. 매우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350여년 역사의 학사주점 붉은 황소의 집과 쉐펠, 50만년 전 원시인 하이델베르그인의 유골이 전시된 선제후박물관, 중세시대로부터 이어온 의약품박물관, 1592년 건축된 르네상스식 기사관, 선제후 무덤이 있는 성령교회 등이 볼 만하다.


종교개혁에
있어 중요한 사실은 마틴루터 생전에 교황청으로 부터 신교로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인데 무렵에 이러한 신교 안에서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느 정도 서로의 강조점과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그룹들이 있었다. 대표적이 칼빈개혁주의로 루터주의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1555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정으로 도시의 종교는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포되었는데 하이델베르그가 속해있던 팔쯔지역의 제후, 프리드리히3세는 칼빈주의 (루터주의에서 바뀜)었으므로 신학자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1534~1583) 임명하여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 교리문답서(Heidelberger Katechismus) 만들게 하였고 이를 1563년에 공포하였다.



네카어강(江)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12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였다. 1225년 라인 백작령(領)이 되었으며 1720년까지 선제후의 거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1386년 선제후 루프레흐트 1세(Ruprecht I)에 의하여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프라하대학교와 빈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어권에서는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보루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 이후 쇠퇴하였다가 프랑스혁명 전쟁 이후 옛 명성을 회복하여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이 되었다.

1952년 이후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또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가 17세기 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고성으로도 유명하다. 이 성의 지하에는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라는 약 5만 8080갤런 규모의 거대한 술통이 있다. 그밖에 1701∼1703년 건립된 시청사와 이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 불리는 오솔길 등이 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독일 신교도(칼뱅교도)의 신앙고백으로서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요구에 따라 작성된 것이며, 1563년 발행된 후 널리 호응을 받아 여러 신교 교파에도 채택되었다.

기계, 정밀기기, 피혁, 담배, 목제품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관광산업이다. 하이델베르크성(城)을 중심으로 해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