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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오스트리아] 비엔나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물관 [Sigmund Freud]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기스문트 슐로모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의 작은 도시 프라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는 40세 때 20세의 여성과 재혼해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맏이가 바로 ‘지기’였다. 얼마 후 프로이트 일가는 빈으로 이주했으며, 당시 다섯 살이었던 ‘지기’는 훗날 나치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무려 70년 넘게 이 도시에 살았다. 비록 인종차별이 있긴 했지만 빈의 유대인은 다른 유럽 여러 지역에 비해서는 현지인과 잘 융화되어서, 당시 그곳의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 가운데 절반가량이 유대인이었다.


1873년, 빈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이때부터 이름을 지그문트(Sigmund)로 바꾼다. 생리학을 전공한 프로이트는 어류와 갑각류 등의 신경계 구조를 연구해 1881년에 학위를 받았다. 1882년에 그는 훗날 아내가 되는 마르타 베르나이스를 만나 약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연구직을 포기하고 빈 종합병원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일한다. 최대한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프로이트는 그 당시 각광받던 새로운 마취제 코카인의 효력을 연구하는 일에 뛰어드는데, 이때 코카인의 중독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그의 일생일대 실책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885년, 프로이트는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5개월 동안 저명한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의 강의를 듣는다. 샤르코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비롯한 발작증 치료에서 최면술을 이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의 치료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후 반세기 동안 자신의 화두가 될 인간의 심신 관계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1886년에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신경질환 전문의로 개업하는 한편, 약혼 4년 만에 마르타와 결혼해서 첫 아이를 얻는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만약 프로이트가 결혼 때문에 병원을 개업하지 않았다면 정신분석학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신경질환 전문의였던 요제프 브로이어(1842-1925)와의 만남은 프로이트의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브로이어는 훗날 임상보고서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안나 O.를 비롯한 여러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문제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했다. 두 사람은 <히스테리 연구>(1895)라는 공저를 내놓았지만, 성(性)을 히스테리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 프로이트와 그렇지 않다고 본 브로이어 간에는 불화가 빚어진다. 브로이어와 결별한 프로이트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1858-1928)의 도움으로 이른바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을 구상한다. 그리고 1896년에 이르러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한다.

1896년,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한 프로이트는 연구 영역을 더욱 넓혀 나간다. 이후에 간행된 <꿈의 해석>(1899),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 등의 저서는 정신질환자가 아닌 일반인의 심리 분석을 통해 인간 무의식의 근본 구조를 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런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에 공감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1902년에 수요 심리학회를 창설하고, 1908년에 이르러 빈 정신분석학회로 개명한다.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나 칼 융(1875-1961)과 같은 촉망 받는 정신의학자들이 프로이트의 주위에 몰려든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10-20년대에는 세계 각지에 정신분석학회가 설립되면서 프로이트의 명성도 높아졌지만, 아들러와 융을 비롯한 차세대 정신의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의견에 반대해 연이어 결별을 선언했다. 이 시기 동안 프로이트는 꾸준히 저술을 내놓으며 정신분석의 개념을 보다 명료히 하는 데에 주력한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1920)는 삶의 본능(에로스)과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안했고, <자아와 그것>(1923)은 이른바 에고(자아)-이드(그것)-슈퍼에고(초자아)의 3박자 도식을 제안했다. <환상의 미래>(1927)와 <문명과 불만>(1929)은 그의 이론을 종교와 문명 등의 더 넓은 주제에 적용하려 한 사례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유대계인 프로이트의 저서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공개 화형에 처해진다. 주위에서는 망명을 권했지만 프로이트는 줄곧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빈에 남아 있었다. 이미 그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1923년에 구강암 선고를 받고 여러 번에 걸쳐 수술을 했지만, 1937년에 암이 재발해서 통증으로 고생했던 것이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 돌격대가 프로이트의 집에 쳐들어와 가택 수색을 실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마침내 프로이트도 망명에 동의했고, 여러 사람의 주선 끝에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39년 9월 23일,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망명지인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 -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인물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