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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이탈리아] 로마 카타콤베 [Catac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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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

나폴리 ·시라쿠사 ·몰타 ·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며, 로마 아피아 가도()에 면()한 성()세바스찬의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게르만 침입 후 지하매장을 하지 않게 되어 카타콤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랑()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통랑의 곳곳은 넓은 방처럼 되어 지도자급 교도의 묘실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통랑의 벽면()에도 시체를 두는 벽감()을 일정한 규칙으로 설치하였다. 여기에 남겨진 수많은 벽화는 고대 이교미술()과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흥미롭다. 그 밖에 비명()과 초대 그리스도 교도들이 예술의 상징으로서 그린 물고기 그림 등이 남아 있다. 로마제국의 박해시대에는 그리스도 교도들의 피난을 겸한 예배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현재 그 유적은 로마시의 관광 코스에 포함된 것도 있으며, 순례자 등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카타콤바의 어원

카타콤바라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동굴도 거의 다 무덤으로 차 버리자, 그때부터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네크로폴리' 즉 죽은 자들의 장소라고 불렀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무덤을 '체메테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잠자고 있는 중 또는 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 체메테리움(현재는 이탈리아어로 치미테로라고 부름)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지어 낸 말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덤이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네크로폴리'라고 불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것은 313년이다. 그 후 교황 성다마수스(366-384)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고, 이곳을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 후 중세기 때부터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지하 공동묘지(주로 1세기에서 4세기 초까지) 전체에 대해 일반적으로 카타콤바라고 널리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내려온다.

카타콤바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


네로 시대의 박해를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첫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주로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의 보금자리와 휴식처는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밖엔 없었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절을 행할 수 있었던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1세기-3세기

로마에서 순교한 사도 베드로는 바티칸 골짜기에, 사도 바울은 오스티아로 가는 길 주위에 있던 이교도들의 무덤 사이에 묻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두 사도가 순교했던 1세기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용 묘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교의 대상이 주로 경제력이 없던 가난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묘지와 같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을 마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세기에 들어오면서 선교의 대상이 중류 또는 상류 계층까지 확대되면서, 차츰 그들의 소유하고 있던 로마 근교의 별장, 과수원, 또는 농장을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희사함으로써 비로소 공동체 전용 묘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당시의 공동체는 희사 받은 땅 위에 무덤을 세울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가장 경제적인 방법은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카타콤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3세기는 순교가 가장 많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황제는 카라칼라와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 발레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공동 묘지를 색출하여,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313년에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이제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당시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공적인 재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덤을 땅 위에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지하에 묻혀 있던 성인과 순교자들 무덤 옆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묻히기 위해 계속 그들의 무덤을 지하에 만들었으며, 이러한 일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5세기-9세기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는 313년부터 시작된 카타콤바 성지 순례는 거의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현재 발견된 카타콤바에 가 보면, 그 당시 성지 순례를 하던 신자들이 성인이나 순교자의 무덤이 있던 벽 위에 새긴, 그분들의 전구를 빌었던 기도문 등이 남아 있다.

반면에 네 차례에 걸쳐 로마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곳 지하 무덤도 예외 없이 그들로부터 약탈을 당하였다. 옛 로마인들의 장례 풍습은 사람이 죽게 되면 평소에 지녔던 모든 금붙이 또는 패물 등을 그대로 관속에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무덤은 로마에 침입한 이민족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 보더라도 관 뚜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 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바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바에서 점점 멀어졌으며, 이때부터 카타콤바는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10세기-16세기

이 시기는 카타콤바가 완전히 잊혀진 시대였다. 카타콤바라는 말 자체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시대이다. 

17세기-18세기

17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당시 고고학 분야의 대가 였던 안토니오 보시오(1575-1629)의 연구에 의해 약 삼십여 곳의 카타콤바가 로마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19세기-현재
 
이후 약 2백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예수회 신부이자 고고학자였던 주세페 마르키(1795-1860)가 카타콤바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를 듣던 제자들 중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1822-1894)는 마르키 신부의 수업 중에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로마에 남겨 놓은 교회 유적'이란 제목의 강의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 감동이 거의 천 년 이상 역사에 묻혀있던 카타콤바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데 로시가 없었더라면 카타콤바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젊은 고고학도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했던 대상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숨어들었던 지하 무덤, 즉 카타콤바에 관한 것이었다. 어렵고도 끈질긴 인내를 요구하는 이 작업은, 1854년 로마의 남쪽 성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들판의 땅 밑에서, 3세기 때의 교황 무덤과 체칠리아 성녀의 무덤을 발견함으로써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카타콤바의 존재를 그 중요성과 함께 세상에 드러냈다. 

카타콤바의 형태
 

로쿨로

카타콤바 내부에 가장 많은 무덤 형태로, 내부의 지하 통로 양쪽으로 벽처럼 되어 있는 곳에 직사각형으로 구멍을 파 놓은 것이다. 이러한 무덤은 관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을 구멍 안에 눕혀 놓고, 그 위에 천만을 덮고는 무덤을 가리기 위해 뚜껑으로 막았다. 이 뚜껑은 주로 기왓장이나 벽돌을 사용했으며, 간혹 대리석을 얇게 잘라서 사용하기도 했다. 

포르마

이는 순교 성인의 무덤이 있는 곳과 규모가 제법 큰 공동 무덤이 있는 곳의 땅에 마련된 무덤들로서, 관의 뚜껑은 주로 대리석을 사용하였고 간혹 큰 기왓장을 만들어 덮기도 하였다. 

 

아르코솔리오
카타콤바 내부에 있는 무덤들 중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무덤이다. 벽을 넓고 깊게 파서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아치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주로 3-4세기에 많이 만들어 졌다.

쿠비콜로

이 무덤 형태는 주로 가족묘지에 사용되었으며, 장방형의 방(보통 2-3평 정도의 넓이)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먼저 소개된 무덤의 형태, 즉 직사각형 모양의 로쿨로 또는 아치로 장식된 아르코솔리오,그리고 바닥에는 포르마라고 일컫는 무덤들이 간혹 자리 잡기도 한다.

이곳의 내부 벽 위에는 벽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벽화들의 내용은 주로 구약의 요나 이야기, 신약의 세례받는 예수님의 모습과 기적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크립타

카타콤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장소이며, 이곳에는 주로 순교자 교황 또는 성인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공간이 넓었기 때문에 카타콤바 내부에서 교회와 같은 역할도 했다고 한다. 

카타콤바의 소개


로마주변에는 약 60여개의 카타콤바가 현재까지 발견되었다. 그중 중요한 몇 곳을 소개한다. 

성칼리스투스의 카타콤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었던 2세기말에서 3세기 초, 당시 교황 제피리누스(199-217)는 로마의 명문이었던 체칠리아 가문으로부터 이 지역의 땅을 희사받게 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부제였던 칼리스투스에게 명하여 이곳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초기 교회 공동체의 정식 관리를 받게 된 첫 번째, 공적 재산이었으며, 동시에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인의 지하 공동 묘지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현재 발견된 모든 카타콤바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지하 5층까지 개발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한 통로는 2킬로미터 정도나 뻗어 있다.

모든 카타콤바는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이름들은 카타콤바 안에 있는 성인이나 또는 땅을 희사한 봉헌자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이 카타콤바 역시 순교자 교황 성칼리스투스(217-222)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순교자 교황 성칼리투스는 부제가 되기 전,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이탈리아 지중해 바다 가운데 있는 사르데냐 섬의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중노동을 하다가, 로마의 귀족 부인이며 신자였던 마르치아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어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그 이후 당시 교황 제피리누스의 부름으로 부제가 되어 약 20년 동안 이곳 카타콤바의 관리 및 교황의 보조자로 일했다. 제피리누스 교황이 서거하자 교황으로 선출되어 양떼들을 보살피는 목자의 역할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교황들의 무덤
카타콤바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장소가 바로 3세기에 만들어진 교황들의 무덤이다. 이곳에는 모두 아홉 분의 성인 교황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중 세 순교자 교황은 다음과 같다.

 

성폰시아누스(230-235)
세베루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막시미누스(235-238)는 다시 그리스도인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명하였다. 당시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속속 잡혀가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평생 중노동을 하거나 경기장에 던져져 맹수의 밥이 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교황 폰시아누스는 자신의 양떼들을 보살피다가 체포되어 종신 중노동형에 처해졌고, 사르데냐의 탄광으로 추방되었다. 광산의 중노동자로서 힘든 일을 하던 교황은 탄광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시신을 몇 년 후 광산 주변에서 찾아 내어 이곳에 안치하였다.

성파비아누스(236-250)

교황은 14년간 재위하면서, 막시미누스의 대박해시기 때 순교했던 교황 성폰시아누스의 시신을 찾아내어 카타콤바로 옮기는 등, 그 당시 순교자들을 위해 특별한 일을 많이 하였다. 막시미누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해는 데치우스(249-251)가 황제로 오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부르며, 옛날 자신의 선대들이 하던 식대로 신전 안에 석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 꿇고 축복의 주문을 읊도록 명령하였다. 교황 파비아누스도 끌려가서 주문을 읊는 것뿐 아니라 배교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이를 거부하자 즉시 신전 밖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때가 250년 1월 20일이었다.

성식스투스 2세(257-258)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253-260)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공적인 교회 묘지였던 카타콤바에 대해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스 태생의 교황 식스투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안에서 교회 전례 모임을 갖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그 역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258년 8월 6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체칠리아 무덤
성녀로 익히 잘 알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2세기 때, 로마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남편 발레리아누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으며, 초기 공동체를 위하여 많은 헌신을 하던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황제대 일어난 박해 때 두 사람 다 순교하였다. 성녀는 죽기 전에 자기 가문의 소유지를 공동체에 기증하였고, 그녀 자신도 순교 후 이곳에 묻혔다. 821년 교황 파스칼리스 1세(817-824)가 그의 시신을 로마 시내의 테베레 강 옆에 있던 성녀의 생가(이곳은 5세기 때 이미 성당이 되었음)로 이전할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성녀가 어떻게 순교하였는지 잘 보여 주고 있는 이곳의 석상은, 17세기 초 카를로 마데르노라는 유명한 대리석 조각가가 1599년 성녀 체칠리아의 기념 성당에서 성녀의 유해 보수 작업을 위해 처음으로 관을 열었을 때 보았던 모습을 스케치하였다가, 나중에 조각하여 성당 지하에 있는 성녀의 무덤 앞에 봉헌하였다. 현재 이곳에 있는 석상은 그 작품을 그대로 복사하여 놓은 것이다. 목 부분을 잘 보면 잘린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성녀는 순교사상 처음으로 뜨거운 목욕탕에서 증기로 질식시켜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당했으며, 이 방법이 여의치 않자, 다시 참수형을 받아 처참한 순교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오른쪽 손가락 셋을 펴고 있고, 그 위에 왼쪽 손가락 인지 하나를 포개고 있는데,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일체라는 것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조각과 벽화-초기 기독교 미술

성녀 체칠리아의 무덤 왼쪽 벽 위에는 순교자 교황이었던 성우르바누스(222-230)와 그리스도가 비잔틴 양식의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사이에 그려졌음이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를 비롯해 카타콤바 내부에는 성서 내용을 주로 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초기 신자들은 자신들의 관이나, 관 뚜껑에 그리스도인 이었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을 부조 또는 조각 해 놓았다. 이러한 상징들은 그 무덤의 주인이 신자였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반드시 죽은 날짜, 그리고 시간까지 정확히 새겨 두었다.

대표적인 벽화들과 부조, 조각은 다음과 같다.

 

선한 목자
선한 목자는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모습인데 구세주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한 영혼을 상징한다. 이 상징물은 특히 벽화에 자주 등장하고 석관의 부조에도 많이 나타난다. 석상이나 무덤을 덮은 비석에 새겨 넣은 문각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

이 형상은 대개 두 팔을 벌려 들어올린 모습인데 이미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서 사는 영혼을 상징한다


 

 

모노그램 (Monogramm)
그리스어 알파벳 Χ(키)와 Ρ(로)라는 두 글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리스도(Christus)를 발음하는 그리스어 단어 ΧΡΙΣΤΟΣ의 처음 두 글자를 나타낸다. 이 모노그램이 어느 무덤에 새겨져 있으면 그 고인이 그리스도인 이었음을 가리킨다.

요나의 이야기

거의 모든 가족 무덤에 빠지지 않고 요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두려워 도망을 가다가 고래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예언자이다. 요나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신앙의 표상이었다. 그들은 죽음이란 다만 부활을 대비한 잠자는 상태 또는 쉬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바다의 큰 괴물의 뱃속에서 삼일 낮과 밤을 지내고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던 요나의 모습은 그들에게 바로 희망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40절
을 보면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사흘만에 부활할 것임을 미리 예고편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막 6:41-44)

성서에서 밝히고 있는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사람들에게 떼어 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에 관한 그림은 대부분 식탁을 앞에 놓고 일곱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것으로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물고기

그리스어로는 물고기를 ΙΧΘΥΣ(ichtous: "익투스"라고 읽는다)라고 한다. 이 단어들을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놓으면 ΙΗΣΟΥΣ(Iesus: 예수) ΧΡΙΣΤΟΣ(Christos: 그리스도) ΘΕΟΥ(Theou: 하느님의) ΥΙΟΣ(Uios: 아들) ΣΩΤΗΡ(Soter: 구세주) 첫머리 글자들과 맞아떨어진다. 이런 단어를 합체문자(合體文字: 그리스어로 acrosticos)라고 한다. 어떤 단어들이나 문구들의 첫 글자들을 따서 합성하는 단어이다. 물고기를 그린 이 형상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가장 널리 보급된 상징이었으며,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요 표징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

그리스 말의 크리스토스(xpiotos)에서 나온 상징으로, X는 '크'의 발음이며, P는 '로'의 발음이다. 즉 그리스도를 뜻하는 합성문자이다.

 


구원의 상징이자 무사히 영원한 항구에 접어든 영혼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신자들에게 내세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상징한다. 당시 신자들은 하나님나라로 가는 것을 일종의 먼 여행으로 생각했으며, 그 시대의 여행수단은 배밖에 없었다. 닻이 주는 의미는 배의 안전과, 천국에 도착했을 때 여행이 끝남을 뜻한다. 즉 이 닻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안전하게 도달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비둘기
주둥이에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는 형상인데 하느님의 안식에 든 영혼을 상징한다.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그리스도가 만유의 시원이요 종국임을 의미한다.

불사조

아라비아에 산다는 전설적인 이 새(Pheonix)는 죽은지 여러 세기가 흐르면 자기의 잿더미에서 되살아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부활의 상징물이 된 것이다.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카타콤바

성칼리스투스의 카타콤바에서 남쪽 방향으로 걸어서 10분거리에 있는 이 카타콤바도 아피아가도 옆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카타콤바라고 부르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이곳은, 세바스티아누스 성인(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때 로마 황제들의 궁전이 있던 팔라티노 언덕에서 304년에 순교하였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성보나벤투라 성당이 있음)의 유해를 찾아냄으로써, 성인의 이름을 따서 성세바스티아누스의 카타콤바라고 부른다.

이 카타콤바는 3세기 중엽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 박해와 함께 이미 순교한 성인들의 무덤까지 다시 파헤치면서 박해자들이 수모를 당하자, 바티칸 골짜기와 오스티아 길목에 있던 두 사도, 즉 베드로와 바울의 유해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이곳으로 잠시 옮겨 왔다고 전한다.

다른 지역의 카타콤바들과는 달리 땅 밑에 나 있던 자연 동굴 덕분에 무덤을 파기가 쉬웠다고 한다. 성칼리스투스의 카타콤바는 사람들이 일일이 지하로 파내려 갔기 때문에 무덤 위치의 표준이 되는 통로들이 거의 직선 형태인 반면에, 이곳은 자연 동굴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곡선 통로가 많은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곳 지하 무덤 안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물 자리가 남아 있으며, 그 주위에 돌을 깎아 만든 긴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사람의 기일(忌日)을 소중하게 여긴다. 가족을 비롯하여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이 날 한 곳에 모여 죽은 사람을 위해 공동으로 기도하고 찬미가를 부르며, 찬 음식을 마련했다가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이 우물은 그 안에 음식을 싸서 줄에 매달아 보관하기 위해 파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예배가 끝나면 성당 마당에 모두들 둘러서서 준비된 찬 음식을 나누어 먹는데, 이런 음식들은 린프레스키(Rinfreshi)라고 부른다. 

도미틸라의 카타콤바

이곳은 이 지역의 땅 소유자였던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95년 로마의 총독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테의 조카였으며, 외가 쪽으로는 로마 황제와도 인척 관계가 있었다.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도미틸라는 황제 도미시아누스(81-96)에 의해 이탈리아 지중해 가운데 있는 폰자섬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2세기 중엽, 도미틸라는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던 이 지역의 땅 전체를 교회 공동체에 희사하였다. 3세기 말엽에서 4세기 초 사이에 순교한 성인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무덤이 이 카타콤바 안에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무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이곳은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었던 313년 이후, 신자들이 성인 가까이에 묻히기 위해 이곳에 무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두 성인의 원래 무덤이 있던 곳에는 아치형의 뒷벽 안쪽에 4세기 중엽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원판이 남아있다. 벽화의 내용은 어린 소녀가 천국의 정원에 서 있는 모습이다.

897년에 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허물어졌다. 19세기 중엽 이후 카타콤바에 대한 재개발이 한창이었을 때, 이곳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발견됨으로써 본격적인 탐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이곳은 지하 4층까지 발굴되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2층까지만 개방되고 있다. 남아 있는 벽화들은 거의 모두가 선한 목자와 양떼들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카타콤바 안에 있는 아르코솔리(아치형으로 세운무덤)들 중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의 벽화가 있는데, 이는 4세기 중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벽화가 그려질 무렵 스승들이 입었던 가운(흰색으로 된 옷에 붉은 색의 긴 줄이 양쪽에 있음)을 걸치고 제자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수염이 전혀 나지 않은 아주 젊은 모습으로 되어 있다. 

성녀 아녜스의 카타콤바

포르타 피아(Porta Pia) 앞으로 나 있는 노멘타나 길을 3킬로미터쯤 가면 왼쪽에 오래된 성당이 보이는데, 이 성당의 지하 무덤이 성녀 아녜스의 카타콤바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시기였던 304년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성녀 아녜스의 무덤이 이곳에 마련되어 있다. 물론 카타콤바의 이름도 성녀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녜스 성녀의 순교 모습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도미틸라의 경기장(현재 이곳은 나보나 광장이라고 부르며, 로마의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임)에서 목이 잘리기 전, 박해자들은 성녀에게 수모를 주기 위해 당시 로마에 있던 천민 계급의 부랑자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후, 성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알몸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부랑자들의 조소와 음탕한 말들은 모두 성녀에게 죽기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성녀의 머리카락이 길어져 알몸을 가리운 것이다. 놀란 군중들은 마녀라고 부르짖었으며, 박해자들도 두려운 생각이 들어 얼른 목을 잘랐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으면서 이 광장에는 성녀를 기념하는 작은 성당이 들어 섰고, 17세기 때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성당 안의 왼쪽에는 작은 기도방이 있는데, 이곳의 제대 뒤편에 성녀의 두상이 보전되어 있다.

성녀 아녜스의 카타콤바는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신자들의 무덤보다 이교도들의 무덤이 더 많이 발견된 곳이다. 입구는 성당의 왼쪽에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개방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