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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독일]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의 승리(1555년)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 독일에 군림하던 황제는 카를 5세였다. 그는 소년기를 막 벗어난 16세 때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약관 19세에 신성로마제국 즉,독일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인물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으로 거대한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혁신과 개혁의 시대를 이끌고 나갈 만한 역사적 통찰력이나 정치적 지도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루터 지지파와 가톨릭교회 지지파 사이에 끼여 우왕좌왕하다가 황제의 자리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퇴위했다. 그후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생애를 마친 불운한 인물이었다.

카를 5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곧 보름스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루터를 범죄자로 규정,법적 보호를 박탈하는 칙령을 선포했다(1521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내 루터의 지지 세력은 늘어만 갔고 독일의 많은 제후들들은 강력한 루터의 지지자가 되었다.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에게는 이러한 독일내 문제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긴박한 현안들이 많았다. 항상 숙적관계에 있던 프랑스 문제,유럽의 문턱까지 밀고 들어오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가톨릭 교황청의 무거운 압력 등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었다.

1526년 카를 5세는 하이델베르크 근처 고도(古都) 스파이에르(Speyer)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대외적인 모든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잠을 설치게 했고 교황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의 압박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는 독일내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의 협력과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했던 1521년의 ‘보름스 칙령’과 관련하여 그 칙령을 영지내에서 시행하느냐 하지 않느냐 여부는 제후들의 재량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즉 루터의 교회개혁에 관한 입장을 제후들의 판단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루터 지지파 제후들은 황제의 결정을 그들의 영지에서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다고 생각했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루터 지지파 제후들이 승리에 도취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후 1529년 스파이에르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열렸다. 이때는 대외적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고 황제는 긴박한 상황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유약했던 황제는 이러한 상황 변화와 가톨릭측의 압력에 못 이겨 3년전의 결정을 번복해버리고 말았다. 즉 보름스 칙령을 부활시키고 친가톨릭교회 정책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돌변 상황에 루터 지지파 제후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서 황제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때부터 루터 지지파들은 ‘항의하는 자’들이라고 알려졌고 그런 뜻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리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루터 지지파들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와 대비된 개신교 전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루터 지지파들은 단순히 항의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1531년 독일 중부지역의 도시 슈말칼덴(Schmalkalden)에 모여 동맹을 결성했다. 황제의 친가톨릭 정책은 결과적으로 루터 지지파들을 더욱 결속시켰다. 루터 지지파들로 구성된 ‘슈말칼텐 동맹’은 독일내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과 황제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 상황이 빚어졌다. 마침내 황제도 이들의 단합된 힘에 손을 들고 말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황제와 루터 지지파 사이에 대화합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개신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Peace of Augsburg)이다. 이 화의의 핵심은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cuius regio,eius religio)는 것이다. 이때부터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됐다.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소장 학자 마르틴 루터가 대학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계시한 이후 38년만에 그가 이끈 종교개혁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언제나 자기 백성을 미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향한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것이다.

그러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온 변화는 무엇인가? 먼저 교회 예배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 가톨릭교회 예배의식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모든 예배는 성직자 중심이었고 평신도는 방관자에 불과했다. 모든 크리스천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믿었던 루터는 모든 예배자가 다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찬송가를 직접 작곡?작사해서 모두 함께 부르게 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예배의식의 큰 변화였다.


마르틴 루터가 성공적으로 이끈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개혁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종교개혁은 유럽 역사 전반에 걸쳐 중세시대를 마무리 짓고 근대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됐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 핵심은 교회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 첫째로 교회 예배의식(儀式)이 크게 달라졌다. 성직자 중심의 예배로부터 예배자 모두가 참여하는 예배로,의전(儀典)중심의 예배로부터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변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성직자 중심의 예배였다. 예배는 라틴어로 진행됐고 성직자 외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진행된 예배에서 회중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 성경은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성만찬에서 일반 신도들은 떡만 받고 포도주 잔은 받을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를 실수로 흘려서는 안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제들의 특권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모든 관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예배는 모든 독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로 진행하게 했고 따라서 예배자들은 오랫동안 막혔던 귀가 열리게 됐다. 성만찬에서 모든 예배자는 떡과 잔을 받게 됐다. 루터는 또한 찬송가를 직접 작사?작곡해서 모든 예배자가 한목소리로 찬양하게 했다. 모두 참여자가 되어 예배는 활기가 넘쳤고 교회에는 신선한 새 바람이 불게 됐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예배의 중심에 놓았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요,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 선포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까지 틀에 짜인 정형화된 의전 중심의 예배로부터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뀌게 됐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강조했던 루터는 그 자신이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는 평생토록 비텐베르크 교회 강단에서 2000차례 이상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루터의 교회개혁은 이런 외형적 변화와 함께 성경을 모든 크리스천이 읽을 수 있는 ‘열린 성경’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루터 이전까지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크리스천들에게는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닫힌 책’이었다. 우선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필사본’ 성경시대에 성경은 보통사람들이 살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가품이었다.

인쇄술이 발달된 이후에도 인쇄된 성경책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는 라틴어 성경이었다. ‘만인 제사장’을 주장했던 루터는 모든 크리스천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성경을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또 하나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사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13세기에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독일어 성경은 전혀 보급되지 않았다. 번역도 난해할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독일에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독일어는 성경의 오묘한 진리를 드러내는 데 부적합한 언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독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독일어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시기에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시작됐다.

1521년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하는 ‘보름스 칙령’을 선포했고 루터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때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납치극’을 벌여 루터를 그의 영지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채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이 성채에서 가명을 쓰고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변장을 한 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이 기간은 루터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이었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기간이었다. 은둔생활이었기 때문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는 성경번역에만 집중했고 12주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수난의 시간에 하나님은 루터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부어주신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딱딱하고 난해한 축자적 번역이 아니었다. 누구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번역이었고 생동감이 넘치는 유려한 문체였다. 성경 번역에서 루터는 상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장 28절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유럽세계가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은 천사가 마리아를 부를 때 ‘은혜가 넘치는 자여’(gratia plena)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에게 ‘넘친다’는 말은 그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잔에 ‘맥주가 넘친다’는 것을 연상시키는 말이었다.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따르지 않고 ‘은혜를 크게 받은 자여’holdselige)라고 번역했다. 이런 것을 보면 루터가 성경말씀 한 자 한 자를 얼마나 심사숙고하며 세심하게 번역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