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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독일] 루터와 독일 농민봉기운동




1524년은 마르틴 루터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가 주도하던 교회개혁운동이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막 본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남부 독일에서 예상치 못했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이 뭉쳐서 귀족 영주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항거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항거의 깃발이 오르자 오랫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은 속속 이들의 대열에 가담했고 곧장 대규모 농민봉기로 확산되었다.

이 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농민봉기 농민항쟁 농민반란 농민전쟁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은 1년 남짓 계속되다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유럽 역사에서는 민중이 주동이 된 사회변혁 운동의 효시로 평가된다.

또한 종교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이 농민운동은 종교개혁의 방향과 전개 과정에 심대한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 이 농민운동도 원인은 상당히 복합적이고 그들의 요구사항도 지역에 따라서 다양했다. 그러나 공통적인 요구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것이었다. 과중한 세금을 경감하고 ‘망자세’(亡者稅)를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망자세’를 내야 했고 이 세금은 그러잖아도 사정이 어려운 과부나 고아들을 더욱 빈곤하게 했다. 또한 산에서 나무를 벨 수 있는 벌목권,사냥할 수 있는 수렵권,고기를 잡을 수 있는 어획권을 요구했고 농노제도를 철폐 등을 주장했다. 그런데 농민들의 요구 사항 중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교회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에 각기 자체적으로 성직자를 선임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한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루터가 주장해온 교회개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사실 독일 농민들의 불만은 오랫동안 누적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불만을 봉기로 점화시킨 것은 농민들의 변화된 의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불만이 누적된 상황에서 의식화된 농민들이 결속해서 일으킨 것이 독일 농민운동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일 농민들을 의식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유명한 ‘만인제사장’을 주장할 때 언제나 농민들을 예로 들었다. 그는 성직(聖職)과 속직(俗職)의 구분을 부정했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톨릭 교회의 교황이나 밭을 가는 농부나 모두 같다고 설파했다. 루터의 말을 들었을 때 독일 농민들은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통해 자기들도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루터가 이끄는 교회개혁을 통해 신성불가침 존재로 철옹성과도 같았던 당시 가톨릭 교회가 개혁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교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제도도 변혁될 수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이렇게 의식화된 농민들은 루터를 정신적 지도자로 따랐고 루터가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자임하고 나선 사람은 마르틴 루터가 아니라 의외의 인물인 토마스 뮌처였다. 뮌처는 당대 명문 라이프치히 대학에 수학하던 시절(1518년) 루터의 글에 접하게 되었고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광신적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다고 주장했고 자기의 사명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임박한 종말론’에 심취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당시 독일의 권세자들을 타도해야 할 악의 세력으로 보았고 칼로 이들을 진멸시켜야 한다고 농민들을 독려했다. 오도된 사명감으로 불탔던 뮌처가 이끄는 농민운동은 필연적으로 피를 흘리며 폭력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을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며 따르는 농민들을 향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손에서 무기를 버리고 하루빨리 농토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농민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루터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농민들의 실망 또한 컸다. 농민들이 폭도로 변하고 농민운동이 폭력화할수록 루터는 더욱더 강도 높게 농민봉기에 대해 반대했다. 반면 농민들은 그들을 지지해주지 않는 루터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루터가 설득하기 위해 농민들을 만났을 때 그는 큰 수모를 당했고 일부 농민들은 적대감까지 나타냈다. 루터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배척하는 농민들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루터는 한 편의 글을 썼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는 농부 떼거리들을 반대하며’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이 표출된 글이었고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글이었다. 루터는 점점 농민들로부터 소외되었고 교회개혁은 독일 민중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러면 루터는 왜 농민봉기에 대해 반대했을까? 우리의 관심이 모아지는 대목이다.


1524년 중반부터 시작된 독일 농민봉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격해지고 폭력화했다. 유능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농민들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난폭한 폭도로 변했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당시 역사기록을 보면 1년 남짓했던 농민봉기 기간에 중부 독일에서만 300여개의 성과 120개가 넘는 수도원들이 약탈되었다. 농민군들이 휩쓸고 지나간 성과 수도원들은 쑥대밭이 되었고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때로는 성에 불을 지르기도 했으며 불타는 성들은 농민들을 더욱 폭도로 만들어갔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귀족과 지주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유혈사태도 끊이지 않았다. 누적된 빈곤상태에서 생존권을 주장하며 일어난 농민운동은 급기야 광폭한 농민 폭동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농민봉기 초기 단계에서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를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생각하고 그의 지도력을 갈망했다. 루터의 가르침은 농민들의 자의식을 일깨웠고 자신들의 권리에 눈뜨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루터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거부했고 농민들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민운동이 광란의 반란 사태로 변해가자 루터는 분노했고 반대하는 그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갔다.


마침내 독일 전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자 루터는 성난 펜을 들었다. 그는 독일의 제후와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반란에 가담한 미친 개 같은 농민들을 쳐죽이고 찔러죽이시오.” 무력으로 농민반란을 진압하라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었다. 지옥의 악마들이 모두 폭도로 변한 농민들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엄청난 독설이었다.

1년 동안 계속된 농민반란은 결국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가들 중에는 무자비한 진압의 큰 책임이 루터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루터가 제후와 귀족들에게 농민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라고 쓴 글이 출판된 것은 1525년 5월께였다. 이때는 이미 제후들의 군대와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이 농민반란을 거의 진압해가고 있을 때었다.

그러나 루터가 농민봉기에 가담한 농민들을 “쳐죽이고 찔러죽이라”고 했던 말은 독일 농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고 그들은 오랫동안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루터를 ‘배신자’라고 배척했으며 로마가톨릭 교회는 배후에서 농민봉기를 조정한 장본인이라고 낙인 찍었다. 루터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사실 루터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공격은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루터는 초기 단계부터 농민봉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결국 독일에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잃게 되었다. 농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루터는 초지일관 농민봉기에 반대했다.

왜 루터는 자신를 따르는 농민들의 봉기에 반대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루터의 모든 관심이 교회 개혁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나깨나 루터의 초미의 기도 제목은 교회 개혁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조직이었다. 교황은 황제와 왕들도 그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하는 절대적 존재였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맞서서 교회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일에만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루터는 확신했다.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추종했던 사람들 중에는 급진 개혁파들이 있었다. 이들 급진 개혁파는 교회개혁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사회 개혁까지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점이 루터와 급진 개혁파 사이를 갈라놓았다. 루터는 농민봉기운동 같은 사회개혁운동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교회개혁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급진 개혁파들은 루터를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난했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있는 비텐베르크의 교황’이라고 공격했다.

만일 루터가 농민봉기를 지지하고 선두에서 지휘했더라면 농민운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루터는 끝내 이를 반대했고 농민봉기는 처절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독일 농민들은 루터로부터 등을 돌렸고 루터의 교회개혁 운동은 독일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루터가 독일 농민과 민중의 지지는 잃었지만 반면 독일 제후와 귀족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독일 세속의 권력자들이 루터의 든든한 후원세력이 되었다. 이때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민중의 차원을 떠나 정치적 권세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세속 권력이 종교개혁을 주도하는 주체가 되는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박준서 교수 <연세대교수·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