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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독일] 루터와 가톨릭 교회의 대결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1∼2)

구약성경 전도서의 말씀대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때를 정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의 때가 이르도록 기다리시기도 한다.

가정해서 마르틴 루터가 그의 시대보다 100년전에 교회개혁 운동을 일으켰다면 그래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루터의 교회개혁 운동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성경을 비롯한 모든 책과 기록은 손으로 필사되었다. 필사본 시절 새로운 지식의 확산이나 정보의 전달은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 한정되었고 그 전달 속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변혁을 가져온 것이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1400년대 중엽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납으로 활자를 주조하고 인쇄용 기름 잉크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그가 개발한 인쇄기로 처음 인쇄해낸 책은 라틴어 성경이었다. 이로부터 5년 동안 만들어진 성경은 과거 1000년 동안 필사된 성경보다 많았다.

1500년대에 들어서자 인쇄기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되었고 유럽의 대도시에는 인쇄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인쇄술은 보편화되었다. 이로써 지식과 정보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때를 기다려 마르틴 루터를 들어쓰셨다.


1517년 10월 마지막 날 루터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 조항’을 발표했을 때 즉각 독일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독일 주요 도시의 인쇄소들은 앞을 다투어 ‘95개 조항’을 인쇄했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95개 조항’이 확산되자 루터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면죄부 판매는 급감했다. 신설 대학의 무명의 젊은 교수 마르틴 루터가 일약 화제의 인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만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루터의 주장은 조용한 대학도시에서 일어났던 ‘작은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술 때문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95개 조항’에 대해 로마교황청의 초기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교황청은 젊은 신학 교수의 혈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95개 조항의 내용이 알려지고 독일에서 루터의 지지자들이 늘어나면서 면죄부 판매가 급감하자 교황청은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의 신부이며 수도사 신분을 갖고 있던 루터에게 로마로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루터의 로마행은 위험한 것이었다.

이때 루터와 교황청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작센의 선제후 프레드릭이었다. 독일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까지 갖고 있던 그는 독일 에서 뿐만 아니라 교황청에도 영향력이 컸던 당대의 거물이었다.

그는 그의 영지 안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설립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젊은 교수를 보호해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중재로 루터는 로마로 가지 않고 독일에서 교황이 보낸 인물에게 그의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교황청에서 지명한 인물은 당시 손꼽히는 신학자였던 추기경 카예타누스였다. 면죄부에 대해 신학 논쟁을 고대하던 루터는 그와의 만남이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루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우크스부르크로 가서 추기경 앞에 섰다(1518년 10월).

그러나 진지한 신학적 토론을 기대했던 예상과는 달리 추기경은 일방적으로 루터를 혹독하게 견책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의 입장은 확고했다. 추기경의 요구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루터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교황청은 이번에는 신학 논쟁의 달인으로 이름난 신학자 에크를 루터와 만나게 했다. 에크라면 젊은 신학 교수 루터를 충분히 제압하리라고 믿은 것이다. 루터와 에크의 만남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이루어졌다. 이 논쟁에서도 루터는 종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성역이었던 교황권과 종교회의의 최고 권위까지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로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제 가톨릭 교회로서 남은 길은 루터를 ‘파문’하는 것뿐이었다.


1520년 6월 중순 로마교황청은 마르틴 루터에게 교황의 교서를 내려보냈다. 그 내용은 루터가 그동안 발표한 ‘이단적’인 모든 책과 글들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60일 이내에 그의 ‘잘못된’ 주장들을 철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루터가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파문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도 첨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교회의 파문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바울의 진노를 면치 못하리라.”

이보다 꼭 1년 전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신학논쟁에서 루터는 면죄부 판매나 교황권에 대해서 종래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제 교황청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루터를 파문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당시 파문은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 교서가 루터를 침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청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은 루터는 전혀 흔들림 없이 그다운 방법으로 대응했다. 밤을 새워가며 장문의 논문 3편을 작성한 것이다. 그는 먼저 ‘독일국가 귀족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썼다. 뒤이어 ‘교회의 바벨론 포로’ ‘크리스천의 자유’를 연속해서 집필했다. 루터의 글들은 곧장 인쇄소로 전달되었고 독일의 인쇄소들은 밤낮없이 이들을 찍어냈다.

파문의 위협 앞에서 루터가 집필한 3편의 논문은 그가 쓴 수많은 글 중에서 단연 백미로 꼽힌다. 루터는 63년의 생애를 통해서 초인적이라고 할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오늘날 독일 비텐베르크에는 ‘루터의 집’라고 명명된 역사적 건물이 잘 보존돼 있다. 루터가 그의 생애의 절반이 넘는 35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본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단’에 속하는 수도원이었다. 루터가 당시 새로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부임했을 때 그는 이 수도단에 속한 수도사의 신분이었다. 자연히 그는 이 수도원을 거처로 삼게 되었고 그후 평생 그곳에서 살게 된 것이다. 루터의 체취가 곳곳에 배어있는 이 건물은 오늘날에는 ‘마르틴 루터 기념박물관’으로 전환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루터에 관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모두 수집해놓아 루터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

그곳에 진열된 소장품들은 모두 소중하지만 그중 특별히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루터가 평생 집필한 글들을 집대성해 놓은 ‘루터 전집’이다. 거의 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범인들로서는 평생을 걸려 읽기에도 어려운 엄청난 양이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루터의 글들 중에서 그의 신학사상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글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루터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그것은 1520년 후반 루터가 파문될 위기의 시간에 밤을 지새며 집필했던 3편의 논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논문은 루터 신학의 정수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 모든 개신교회 신학의 토대와 초석이 됐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루터의 신학을 대표하는 3편의 논문의 핵심요지는 무엇인가?

먼저 ‘독일 국가 귀족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보자. 이 글에서 루터는 교회 안에 세워진 장벽들이 무너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구약시대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듯이 교회 안의 장벽도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너져야 할 장벽 중에 두 가지만 열거하면 첫째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장벽이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세례 받은 모든 크리스천은 농부든 상인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교황이나 사제들과 똑같이 제사장의 신분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다만 직임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유명한 ‘만인제사장’ 신학이다.

다음으로 무너져야 할 장벽은 로마 교황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장벽이다.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교황은 신앙과 교리 문제에 있어서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의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성역 중의 성역이었던 교황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또한 루터는 이 글에서 교회는 많은 재물을 소유할 필요가 없고,헌금의 종류도 줄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적인 일에 더욱 전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가 이 글을 쓸 때 그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할 것을 각오했다. 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화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성경 말씀의 진리 안에서 그는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없는 참된 자유인으로 거듭나 있었다.

박준서 <연세대교수·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