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지정보/유럽

[독일] 십자군과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 판매




1517년 초엽 중부 독일지방에 뛰어난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수도사 ‘테첼’(Tetzel)이 교황의 휘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기 위해서였다. 특유의 언변으로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연옥의 고통 중에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귀를 열고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를 낳아주었고 키워주었고 재산까지 남겨주었건만 너희는 우리를 이 고통받는 곳에서 구해주지 않는구나. 이 뜨거운 불꽃 속에 우리를 그대로 놔둘 셈이냐?’ 여러분은 고통 받는 그들의 영혼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찰랑하고 동전이 돈궤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고생하던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릅니다.”

절절히 가슴을 파고드는 테첼의 웅변에 돌아가신 부모형제를 생각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돈주머니를 들고 테젤이 팔고 있는 ‘면죄부’를 사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는 아직 종이화폐가 보급되기 전이라 주화를 사용하던 때였고 면죄부 구매에 돈이 너무 몰려 판매대 한쪽에서 주화를 찍어내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도대체 ‘면죄부’가 무엇이었기에 그 당시 사람들은 그토록 현혹되었을까?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던 교리 가운데 ‘연옥’이라는 것이 있었다. 구원 받아 천국 가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떨어질 정도로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다. 연옥의 뜨거운 불꽃 속에서 죄값을 치른 후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했다. 또 하나는 사람이 구원 받고 천국에 가려면 생존시 쌓아놓은 ‘공적’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즉 천국에 가려면 쌓은 공적이 합격선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은 죄는 각자의 책임이며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대신 형벌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선한 행실이나 믿음으로 쌓은 공적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에 따라서는 넘쳐나도록 많은 공적을 쌓은 사람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 순교자와 또한 성인(Saint)의 칭호를 받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여기서 중요한 교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그들의 차고 넘치는 공적 즉,‘잉여공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연옥에서 죄값을 치르며 고생하는 영혼이 ‘잉여공적’을 나누어 받으면 남아 있는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잉여공적’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은 누구의 권한인가? 그것은 바로 가톨릭교회 교황의 권한이라는 것이었다. 교황이 갖고 있는 이 권한은 죽은 자나 산 자를 ‘죄의 징벌’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천국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실로 막강한 권한이었다. 이것이 곧 교황의 ‘면죄권’이었다.

기독교회 역사를 보면 교황이 ‘면죄권’을 대대적으로 행사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11세기말 십자군전쟁 때였다. 서기 7세기 중엽 당시 신흥종교였던 이슬람교를 따르는 아랍인들이 성지 이스라엘을 정복했고 그후 그들이 줄곧 성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기독교의 성지 탈환’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1099년). 그는 십자군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전사하거나 살아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에 대한 징벌을 면제해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막대한 비용이 들게 마련이다. 십자군전쟁 때도 전쟁이 한창 진행되면서 엄청난 전비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돈 많은 거상이나 귀족들은 십자군전쟁을 위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전비에 쪼들리던 교황은 십자군에 참전하지 않고 돈만 내놓는 사람들도 면죄해줬다. 교황의 면죄권이 돈과 결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십자군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잠잠해졌던 교황의 면죄권은 1500년대 들어서면서 다른 목적을 위해 다른 모습으로 또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언변이 좋은 수도사 테첼이 열을 올리며 판매하던 ‘면죄부’였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성경을 읽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해도 그것을 이루는 수단이 옳지 않으면 칭찬 받지 못한다. 좋은 목적이 잘못된 수단을 결코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교회의 일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2000년에 걸친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하는 일에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권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한 교황이었다. 한편 그는 예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고 예술을 깊이 사랑한 교황이었다. 그는 당대 예술 거장들을 육성했고 그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다.

오늘도 예술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라파엘의 바티칸 벽을 가득 채운 벽화들은 모두 그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큰 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대성당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꿈이었다. 그는 1506년 로마에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설계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Bramante)에게 맡겼다. 워낙 방대한 구상이었기 때문에 율리오 교황은 건축이 진행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세상을 떠났다(1513년).

그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그는 늘어나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전가의 보도와 같은 교황의 면죄권을 사용하기로 했고 결국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를 증명하는 증서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용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면죄부였다. 목적은 좋았으나 그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독일의 중부지역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에는 대학이 신설되었고(1502년) 그 대학에는 젊은 성서학자 마르틴 루터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였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수도단에 속한 수도사이기도 했다.


마르틴 루터는 에르푸르트의 수도원 시절부터 인간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깊이 사색하며 기도했다. 때로는 금식과 고행도 하며 인간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며 씨름했다.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는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루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인간이 힘쓰고 노력해서 ‘공적’을 쌓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너무도 보잘것 없고 미미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인간은 원죄(原罪) 가운데 태어났으므로 인간들이 행하는 선행까지도 인간의 죄성(罪性)으로 오염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밤낮으로 고민하던 루터에게 성경말씀 한 구절이 마치 하늘의 계시처럼 들려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이 한 마디 말씀에서 루터는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해답을 얻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며 인간의 구원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감겼던 눈이 떠지며 밝은 빛을 보듯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신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은총의 순간이었다.

구원의 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루터의 눈에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만들어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성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이 어떻게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이것은 성서의 진리에 전혀 어긋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당시 유럽에는 신학자와 신분이 높은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면죄부 판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와 이를 매매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서적인 일인지를 진정 교회를 위한 충정의 마음으로 또박또박 적어내려 갔다. 모두 95개 조항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그는 먼저 이 문제를 주제로 대학내에서 공개토론을 하고 싶었다. 1517년 10월31일 루터는 공개토론을 제안하는 글과 함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95개 조항을 대학교회문에 게시했다. 루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교회개혁이라는 역사의 새로운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박준서 교수 (연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