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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정보/유럽

[독일] '보름스의 황제칙령'과 마르틴 루터




1521년 신년초 마르틴 루터는 마침내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 당했다. 한편 이때를 전후해서 독일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1519년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가 독일의 새로운 황제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가 독일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독일어도 할 줄 몰랐고 독일의 내부 사정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의 황제가 되자 보름스(Worms)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했다. 독일의 내부사정을 알 필요가 있었고 특히 당시 팽창일로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책 마련 등 현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1521년 1월말 황제의 도시 보름스에서 제국의회가 열렸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 카를 5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논란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그것은 “루터 문제”였다.

로마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독일 황제에게 루터를 독일제국의 ‘범법자’로 선언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종교법으로는 ‘파문’하고 세속의 법으로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범죄자’로 낙인 찍어 마르틴 루터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독일 내부 사정에 어두웠던 카를 5세는 ‘루터 문제’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황제는 교황청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것으로 루터 문제를 일단락지으려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제국의회에 참석한 제후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확고하게 루터를 두둔했다. 루터에게 자기 주장을 밝힐 소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를 범법자로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카를 5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황제로 선출될 때 프리드리히 선제후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의회에 출석하여 그의 입장을 밝히라는 서한을 보내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루터의 친구들은 모두 보름스로 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들은 꼭 100년전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보헤미아(현 체코)의 얀 후스(Jan Hus)가 끝내 화형당했던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후스가 당했던 운명을 루터가 보름스에서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를 아끼는 친지들이 그를 만류할 때 루터는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힘차게 진실을 외칠 때입니다.”

루터는 이미 골리앗 앞에 홀로 서 있는 다윗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그를 지지하고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독일인이 있었다. 교황청에서 파송한 교황청 특사까지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 “독일인들의 90%는 루터의 이름을 외치며 루터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10%는 ‘로마교황청 부숴버리라’라고 외칩니다.”

독일 국민이 루터의 지지자가 된 데에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인쇄술의 발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인쇄소들이 앞다투어 루터의 글들을 인쇄해냈던 것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루터가 살았던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에는 인쇄소가 무려 30곳이나 있어서 루터의 글을 경쟁적으로 인쇄했다고 한다. 루터의 사상과 주장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고 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루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521년 4월초 루터는 보름스를 향해 출발했다. 루터가 도시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쏟아져나와 루터를 격려해주었다. 특히 에르푸르트를 지날 때는 그곳 대학의 총장을 비롯,교수들이 모두 나와 그 대학이 배출한 자랑스런 졸업생 마르틴 루터를 열렬히 환영하고 그의 장도를 축복해주었다.

비텐베르크를 떠난 지 꼭 2주만에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했다. 그는 보름스성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환영의 나팔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입성했다.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마치 개선장군처럼 루터를 맞이했다.

루터는 친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름스 입성에 관해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 날은 제게는 ‘종려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곧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던 일을 상기시킨 것이다.

루터가 보름스에 도착한지 바로 다음날인 4월17일 오후 4시 그는 독일 황제가 주재하는 제국의회장으로 안내되었다. 루터도 장엄한 어전회의의 광경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가 황제 앞에 섰을 때 심문관은 토론의 기회를 주지 않고 짤막한 두 가지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아멘!”

1521년 4월17일. 이날은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날 오후 4시 루터는 보름스에서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독일 황제 앞에 서게 됐다.

그는 21세의 젊은이였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위에 오른 카를 5세였다. 황제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독일의 선제후들과 여러 지역의 제후들,교황청 특사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이 의관을 갖추고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세속의 권세와 종교적 권위가 회의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루터가 비록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신설 비텐베르크 대학의 소장학자이며 교회의 신분으로는 사제요 수도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루터는 황제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과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신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가 제국회의장으로 안내돼 들어갔을 때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책상 위에 진열된 책들이었다. 모두 그에게는 익숙한,자신이 쓴 저서들이었다. 심문관은 책상 위의 책들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이들 책들은 당신이 쓴 것인가?” 낮은 목소리로 루터가 대답했다. “이 책들은 모두가 본인이 쓴 것입니다.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심문관의 두번째 날카로운 질문이 루터에게 날아왔다. “당신이 쓴 글들 중에서 취소할 부분이 있는가?”

회의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돌면서 모든 시선이 루터에게로 집중되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루터가 입을 열었을 때 의외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순간 회의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루터가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루터가 그의 주장을 취소하고 무릎을 꿇으려는 것인가?

황제는 루터의 요청을 수락했다. 황제를 대신해서 심문관이 큰 소리로 루터에게 통보했다. “황제께서는 은총을 베푸사 내일까지 시간을 주시기로 허락하셨다.”

루터가 왜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을까? 루터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흔들렸을까?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 루터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온 루터는 그날 밤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한 나는 내가 쓴 글의 한 줄도,아니 한 글자도 취소하지 않으리라.”

다음날 4월18일 늦은 오후 루터는 다시 황제 앞에 서게 되었다. 심문관은 어제와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당신이 쓴 글 중에서 취소할 부분이 있는가?”

루터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까지 쓴 글들은 모두 같은 내용이 아닙니다. 크게 세 종류의 글들입니다.” 회의장의 모든 사람은 숨을 죽이고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과 크리스천의 삶에 관한 글들입니다. 본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잘 썼다고 칭찬합니다. 이 글들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루터의 말은 계속되었다. “두번째는 교황과 교황추종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한 글들입니다. 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순간 황제의 입에서는 ‘노’(No)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루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세번째는 개인을 공격한 글들입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한 점도 있었지만 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이때 심문관이 루터의 말을 끊었다. “간단히 대답하라! 당신이 저술한 책들과 그 안에 있는 잘못된 점들을 취소하겠는가? 못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루터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루터의 많은 말 중에서 가장 루터다운 명언으로 꼽힌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저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요 또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루터의 말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저는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의 말은 제국회의장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황제도 이제는 로마교황청의 압력을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다. 황제는 교황청 특사가 작성한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보름스의 황제 칙령’이었다.

“루터는 이단자로 정죄 받은 자이다. 그의 책들은 모두 불살라 없애야 한다. 누구도 그를 보호해서는 안되며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루터와 같이 이단자로 정죄 받을 것이다.”

루터는 서둘러 보름스를 떠났다.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 그런데 곧 이상한 소문이 독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도중 깊은 산속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가 비밀리에 살해되었다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루터의 생사를 알 수 없이 흉흉한 소문만 무성해져 갔다.

박준서 교수 (연세대 교수·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