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루터가 비텐베르크를 출발했다. 그때까지는 그가 주장했던 교회개혁은 신학적 이론 단계였을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개혁운동은 구체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가시적인 변화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독일 황제 앞에서도 그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10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던 기간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루터가 없는 동안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충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성급히 교회개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은 루터의 동료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카를슈타트(Karlstadt) 교수였다. 그는 루터보다 몇 년 앞서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했고 루터가 교회개혁의 주장했을 때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교회개혁운동의 주동자로 나선 카를슈타트는 먼저 복장부터 바꿨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 신분이었던 그는 사제 복장을 벗어던지고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또한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 뿐만 아니라 마흔 살이 넘은 사제였던 그는 15세 남짓한 어린 신부와 결혼했다. 그의 일련의 행동들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결혼을 계기로 사제들의 독신제도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 결과 비텐베르크에서는 결혼하는 사제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수도원의 수도사와 수녀들까지도 결혼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런 현상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 가장 가시적인 교회개혁은 예배의식의 변화였다. 특히 ‘성찬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교인에게 두 가지 준비를 요구했다. 첫째는 금식이었고 둘째는 죄를 사제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받는 ‘고해성사’였다. 이 두 가지를 준비한 사람만이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된 예배의식에서는 이를 폐지했다. 또 종래의 성찬식에서는 일반 교인은 떡만 받을 수 있었고 포도주는 받을 수 없었다. 포도주는 사제들에게만 허락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성찬예식에서는 모든 예배자에게 떡과 포도주가 허락되었다.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일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던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바뀌었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들도 사제복을 입지 않고 평복을 입었다. 이것이 지나쳐 깃털이 달린 베레모를 쓰고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까지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개혁운동은 당시로서는 급진적 방향으로 치달았다. 교회의 성모상을 비롯해서 성상(聖像)들을 부숴버리는 성상파괴운동이 뒤따른 것이다. 교회 안에 걸려있던 성화(聖畵)도 모두 철거되었고 십자가도 우상숭배라고 제거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더욱 과격하고 극단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유럽 각지에서 비텐베르크에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예언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시 받은 대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과격하게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가서 기물을 파손하기도 했고 전통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개혁에 동조하지 않는 사제들에게 폭력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급진적 개혁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균형감각을 갖춘 지도자가 없이 진행된 교회개혁운동은 점점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조용했던 대학도시 비텐베르크는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텐베르크 시의회는 피신중인 루터에게 긴급히 공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하루빨리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개혁운동을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된다면 그가 주장한 개혁운동은 출반 단계에서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로서는 더 이상 은둔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1522년 3월초 루터는 10개월 동안의 밧모섬 피신생활을 정리하고 비텐베르크로 떠났다.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한 독일 황제의 칙령이 아직도 유효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10개월 동안의 도피생활을 마감한 마르틴 루터는 긴 수염과 기사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비텐베르크에 무사히 돌아왔다. 루터는 그가 없는 동안 너무도 크게 변한 도시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기거하던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거의 빈 건물로 변해 있었다. 성상(聖像)파괴운동으로 교회 안의 성상들은 모두 파괴됐다. 심지어 ‘피에타’ 석상도 목 부분이 잘려나가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깊은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다. 대표적인 것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급진 개혁파와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그리고 이에 따른 혼란 상태였다. 루터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급진 개혁파들도 포함돼 있었다. 사실 루터에게 더 힘든 상대는 급격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과격파들이었다. 그들은 과거 루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지지하고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도하고 있던 교회개혁은 바로 루터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어떻게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고 혼란 없이 교회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루터의 고민이요 과제였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즉시 교회 강단에 서서 신념에 찬 열변을 토해냈다.
“우리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루터 특유의 웅변적 설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가톨릭 교회는 금식을 강요했고 성만찬 때 떡만 받으라고 강요했고 고해성사를 강요했습니다.” 숨을 죽이고 듣는 사람들을 향해 루터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도시의 시민들은 개혁의 이름으로 또 다시 모든 것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그동안 교회가 강요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모든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루터가 돌아옴으로써 천군만마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급진개혁파들은 루터의 설교를 듣고 크게 실망했다. 루터가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설교를 시작으로 해서 루터는 거의 매일 강단 설교를 통해 교회개혁의 질서 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그는 특히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는 교회개혁의 방법으로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외쳤다. “기도하고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그러나 폭력은 절대로 안됩니다.”
둘째로 루터가 강조한 것은 교회개혁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도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적어도 3년간의 연구와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루터의 설교는 계속된다. “그런데 신학이나 성경을 깊이 알지 못하는 일반 성도들이 어떻게 급격한 개혁의 변화를 따라올 수가 있겠습니까?” 루터는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급진적 개혁을 반대했다.
루터는 당시 중세교회에서 행해졌던 ‘성상숭배’를 누구보다 강하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로 몰려가 성상을 때려부수는 성상파괴자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어리석게도 태양 달 별들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태양 달 별들을 없애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급진개혁의 기수였던 카를 슈타트는 루터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 깊이 상처를 받았다. 결국 그는 비텐베르크를 떠났고 그의 뒤를 따라 과격 개혁파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루터로서는 자기를 지지해준 사람들이었지만 종교개혁의 성공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위해 그들과의 가슴 아픈 결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비텐베르크는 질서를 회복했고 모든 시민은 루터가 이끄는 교회개혁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어느 개혁운동이든지 그것을 이끄는 지도자가 중요한 것이다.
루터의 지도력으로 비텐베르크에서 개혁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교회개혁의 분위기는 독일 전역과 인접한 스위스,동유럽 등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이제는 독일 안에서 누구도 쉽게 손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루터는 교회개혁운동과 함께 대학 교수로서 그리고 저술활동 등으로 분주하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예상치 않았던 시련의 폭풍이 루터에게 몰아닥쳤다. 1524년 남부 독일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일부 농민들이 항거의 횃불을 들자 이는 단기간에 넓은 지역으로 확산돼 나갔다. 그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이 루터의 개혁운동에 힘을 얻어 기득권 세력에 항거,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루터가 당연히 약자인 농민편에 서서 봉기를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루터는 밤새워 기도하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독일 황제 앞에서도 그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10개월 동안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던 기간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루터가 없는 동안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충분한 준비나 계획 없이 성급히 교회개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은 루터의 동료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카를슈타트(Karlstadt) 교수였다. 그는 루터보다 몇 년 앞서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임했고 루터가 교회개혁의 주장했을 때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이었다.
교회개혁운동의 주동자로 나선 카를슈타트는 먼저 복장부터 바꿨다. 가톨릭 교회의 사제 신분이었던 그는 사제 복장을 벗어던지고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또한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 뿐만 아니라 마흔 살이 넘은 사제였던 그는 15세 남짓한 어린 신부와 결혼했다. 그의 일련의 행동들은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결혼을 계기로 사제들의 독신제도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 결과 비텐베르크에서는 결혼하는 사제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수도원의 수도사와 수녀들까지도 결혼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런 현상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 가장 가시적인 교회개혁은 예배의식의 변화였다. 특히 ‘성찬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교인에게 두 가지 준비를 요구했다. 첫째는 금식이었고 둘째는 죄를 사제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받는 ‘고해성사’였다. 이 두 가지를 준비한 사람만이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혁된 예배의식에서는 이를 폐지했다. 또 종래의 성찬식에서는 일반 교인은 떡만 받을 수 있었고 포도주는 받을 수 없었다. 포도주는 사제들에게만 허락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성찬예식에서는 모든 예배자에게 떡과 포도주가 허락되었다.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일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던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바뀌었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들도 사제복을 입지 않고 평복을 입었다. 이것이 지나쳐 깃털이 달린 베레모를 쓰고 성찬식을 집례하는 사제까지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개혁운동은 당시로서는 급진적 방향으로 치달았다. 교회의 성모상을 비롯해서 성상(聖像)들을 부숴버리는 성상파괴운동이 뒤따른 것이다. 교회 안에 걸려있던 성화(聖畵)도 모두 철거되었고 십자가도 우상숭배라고 제거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더욱 과격하고 극단적인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유럽 각지에서 비텐베르크에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예언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시 받은 대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과격하게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가서 기물을 파손하기도 했고 전통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개혁에 동조하지 않는 사제들에게 폭력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급진적 개혁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균형감각을 갖춘 지도자가 없이 진행된 교회개혁운동은 점점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조용했던 대학도시 비텐베르크는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텐베르크 시의회는 피신중인 루터에게 긴급히 공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하루빨리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개혁운동을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 혼란과 무질서가 계속된다면 그가 주장한 개혁운동은 출반 단계에서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로서는 더 이상 은둔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1522년 3월초 루터는 10개월 동안의 밧모섬 피신생활을 정리하고 비텐베르크로 떠났다. 루터를 범죄자로 정죄한 독일 황제의 칙령이 아직도 유효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10개월 동안의 도피생활을 마감한 마르틴 루터는 긴 수염과 기사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비텐베르크에 무사히 돌아왔다. 루터는 그가 없는 동안 너무도 크게 변한 도시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기거하던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거의 빈 건물로 변해 있었다. 성상(聖像)파괴운동으로 교회 안의 성상들은 모두 파괴됐다. 심지어 ‘피에타’ 석상도 목 부분이 잘려나가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깊은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다. 대표적인 것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급진 개혁파와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그리고 이에 따른 혼란 상태였다. 루터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급진 개혁파들도 포함돼 있었다. 사실 루터에게 더 힘든 상대는 급격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과격파들이었다. 그들은 과거 루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지지하고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도하고 있던 교회개혁은 바로 루터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어떻게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고 혼란 없이 교회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루터의 고민이요 과제였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즉시 교회 강단에 서서 신념에 찬 열변을 토해냈다.
“우리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루터 특유의 웅변적 설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가톨릭 교회는 금식을 강요했고 성만찬 때 떡만 받으라고 강요했고 고해성사를 강요했습니다.” 숨을 죽이고 듣는 사람들을 향해 루터의 설교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도시의 시민들은 개혁의 이름으로 또 다시 모든 것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그동안 교회가 강요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모든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루터가 돌아옴으로써 천군만마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급진개혁파들은 루터의 설교를 듣고 크게 실망했다. 루터가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설교를 시작으로 해서 루터는 거의 매일 강단 설교를 통해 교회개혁의 질서 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그는 특히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는 교회개혁의 방법으로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외쳤다. “기도하고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그러나 폭력은 절대로 안됩니다.”
둘째로 루터가 강조한 것은 교회개혁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도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적어도 3년간의 연구와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루터의 설교는 계속된다. “그런데 신학이나 성경을 깊이 알지 못하는 일반 성도들이 어떻게 급격한 개혁의 변화를 따라올 수가 있겠습니까?” 루터는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급진적 개혁을 반대했다.
루터는 당시 중세교회에서 행해졌던 ‘성상숭배’를 누구보다 강하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로 몰려가 성상을 때려부수는 성상파괴자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어리석게도 태양 달 별들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태양 달 별들을 없애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급진개혁의 기수였던 카를 슈타트는 루터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 깊이 상처를 받았다. 결국 그는 비텐베르크를 떠났고 그의 뒤를 따라 과격 개혁파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루터로서는 자기를 지지해준 사람들이었지만 종교개혁의 성공이라는 역사적 대의를 위해 그들과의 가슴 아픈 결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비텐베르크는 질서를 회복했고 모든 시민은 루터가 이끄는 교회개혁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어느 개혁운동이든지 그것을 이끄는 지도자가 중요한 것이다.
루터의 지도력으로 비텐베르크에서 개혁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교회개혁의 분위기는 독일 전역과 인접한 스위스,동유럽 등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이제는 독일 안에서 누구도 쉽게 손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루터는 교회개혁운동과 함께 대학 교수로서 그리고 저술활동 등으로 분주하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예상치 않았던 시련의 폭풍이 루터에게 몰아닥쳤다. 1524년 남부 독일에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일부 농민들이 항거의 횃불을 들자 이는 단기간에 넓은 지역으로 확산돼 나갔다. 그동안 눌려 살아왔던 농민들이 루터의 개혁운동에 힘을 얻어 기득권 세력에 항거,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루터가 당연히 약자인 농민편에 서서 봉기를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루터는 밤새워 기도하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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