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북쪽 해안 약 5km 남쪽 길 서쪽 언덕이 쿰란이다. 이 쿰란이란 이름은 그 언덕 옆을 지나는 쿰란 와디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쿰란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47년으로, 이 쿰란 주위의 동굴들에서 BC 2세기경의 성경 사본과 성경의 주석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경 사본이 사해 주변에서 발굴되었다고 하여 “사해 사본” 이라고 하기도 하고, 쿰란 주위에서 찾았다 하여 “쿰란 사본” 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이 사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 내의 사해 사본 보관소(The Shrine of the Book)에 보관되어있고 록펠러 박물관에서 연구되고 있다.
1947
쿰란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쿰란 언덕에서 볼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은 BC 2세기에서 1세기에 성경사본을 하던 도서관, 공동식당, 항아리 공장, 정결례 목욕탕, 주거시설 등 공공 목적으로 사용된 건물들의 발굴현장과 방문센터 등이 있다. 쿰란의 동쪽 언덕에는 약 1,200개 정도의 무덤이 줄지어 있다. 방문센터에는 기념품 판매장과 식당 그리고 쿰란의 역사를 보여주는 멀티미디어 프로그램 공연장이 방문객을 맞고 있다.
잃어 버린 염소
1947년 5월의 어느 봄날. 한 베드윈(Bedouin) 소년이 염소떼를 돌보다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염소를 찾고 있었다. 사해 서쪽 해안의 절벽 지대의 한 동굴 속에 돌멩이를 던졌다가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는, 친구를 불러 동굴 속으로 들어 가 보았다. 입구는 좁았지만 굴은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안은 길이 8.5 m, 너비 3 m, 높이가 3 m 나 되는 꽤 큰 굴이었다.
그곳의 한쪽 구석에는 깨진 질그릇 조각들 사이로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높이가 60 ㎝ 가량되는 큰 항아리들이었다. 무하마드와 아메드는 조심조심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다. 뭔가 시커먼 덩어리들이 드러났고, 꺼내보니 얇은 양가죽을 꿰매서 이은 두루마리였다. 너비 44 ㎝에 길이 1 m ~ 8 m 나 되는 그 두루마리들에는 뭔지 모를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보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골동품상에 가져가면 몇 푼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소년은 그것들을 꺼내 들고 동굴을 나왔다. 무하마드가 다섯 개, 아메드가 세 개.
신비한 두루마리
두 소년은 베두윈 족장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아메드는 골동상 한 군데에서 싼값으로 두루마리 세 개를 팔고 돌아갔다. 무하마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몇 군데를 더 기웃거렸다. 아주 귀한 것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골동품 상인은 알아보고 나서 값을 매기겠다고 하였다. 족장과 무하마드는 그 상점에 두루마리 다섯 개를 맡기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골동상 주인은 그 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사무엘 대사교를 찾아갔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펴보던 대사교는 할 말을 잊은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의 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대사교는 두루마리에 씌어진 글은 히브리 글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5파운드에 사겠다고 했다.
사무엘은 이 두루마리가 어쩌면 구약성서 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약은 유태인들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이 당신께서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야훼의 계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구약은 그때까지도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사무엘의 가슴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히브리 글자로 씌어진 이 두루마리가 구약의 원본이라면? 그는 서둘러 예루살렘에 있는 아메리카 동방 연구소의 트레버 박사를 찾아갔다.
확대경으로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던 트레버는 어지러운지 잠시 일손을 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하나님!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어떤 은총으로 내가 이 귀중한 것을 보게 되었을까? 사무엘 대사교님, 이것은 틀림없는 구약성서입니다. 아직 증거가 없다 뿐이지 제 생각에는 구약 원본이 틀림 없습니다." 그때까지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Codex)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사본이었는데 이 사해 사본은 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서기 전 10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트레버는 한참을 더 살핀 뒤 두루마리 가운데에서 구약성서의 이사야 서를 찾아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기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한참 지나서야 트레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글씨체로 보아 이것은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의 것입니다. 어서 사진을 찍어 과학자들에게 보여서 원본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사해문서
그들은 곧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두루마리를 잘 다듬어 사진을 찍는데는 무려 아홉 달이나 걸렸다. 1948년 2월 그 사진은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고고학자들에게 보내졌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3월 15일, 사무엘 대사교는 미국 존 홉킨스 대학 고고학 교수 알브라이트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처럼 거룩한 경전을 구해서 보내주신 대사교님께 축복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 문서는 구약 원본이며 기원 전 1백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발견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발견이며, 인류 역사에 가장 뛰어난 발견입니다. 부디 나머지 두루마리도 찾아서 구약 39권을 모두 갖추게 되기를 빕니다."
그 무렵, 이름 난 성서 학자인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장 수케닉 박사도 옛 두루마리 세 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메드 소년이 판 두루마리였다. 그 또한 이 두루마리가 구약 원본임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두루마리들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것이 구약 원본임을 증명하는 일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나머지 두루마리 다섯 개를 사무엘 대사교가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무엘과 수케닉이 만난 날, 두루마리 여덟 개가 합쳐진 날, 그 날은 인류가 잃었던 보물을 되찾은 날이 되었다. 그들은 두 달 동안 두루마리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나서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수케닉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받아 적었다. "여러분, 이 두루마리에는 구약의 이사야서 원본이 들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에세네 교파에서 썼던 '공동체 계율','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 싸움','감사 찬미가 모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크나큰 기쁨과 행운을 얻는 일이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쿰란공동체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드 브오 (R. De Vaux)가 사해 일대 탐험에 나섰다. 브오 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 그리고 그곳 베두윈들을 데리고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던 벼랑으로 갔다. 브오 신부는 그곳에 에세네 교파가 살았던 자취가 반드시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이 단 한 군데의 동굴에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귀중한 것일수록 만일을 대비하여 여기 저기 흩어 놓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브오 신부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탐험대는 동굴을 열 개나 더 찾아 내었고, 그 안에서는 두루마리가 수백 개나 쏟아져 나왔다. 탐험이 계속 될수록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바위 아래 깊은 땅속에는 옛 도시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Essene) 집단의 수도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수도원은 원래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이 보다 높은 지점의 계곡에 댐을 건설하여 겨울철의 우기에 흘러내려 오는 빗물이 수로를 따라 수도원의 물 탱크에 자동적으로 저장되었다. 한 주간 중 평일에는 근처의 수많은 동굴 속에서 기거하던 엣세네 수도자들이 안식일에는 이곳으로 내려와 물로 씻는 정결 예식과 성서 연구를 하였고 공동의 식사를 위한 대형 식당과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이곳에 갖추어져 있었다. 또 키르바트 쿰란 (Khirbat Qumran)이라고 불리는 수도원 건물도 있었다. 수도원 방 안에는 나무로 만든 큰 책상과 걸상이 먼지에 덮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붓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동안 발견된 문서들은 모두 그 방에서 쓰여졌음이 분명했다. 뒷날 실험하여 보니, 잉크병의 잉크와 두루마리 글씨의 잉크는 같다고 밝혀졌다.
에세네파
브오 신부의 탐험으로 밝혀진 사해 동굴의 옛 유적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이 사해 바닷가를 거닐기 전에 이미 이곳 동굴들에서는 에세네 (Essenes)파로 불리는 한 무리가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갈래였다. 이 무리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 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으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 등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웠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따위를 모두 함께 했다. 결혼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들은 세상이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 '빛의 아들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200년 동안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세상의 종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서기 68년이 되자 그들은 '어두움의 아들들' 이 아닌 로마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고, 끝까지 항거하는 마사다 요새를 무너뜨린 뒤 유태인들을 수천년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 10군단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진 듯하다.
'쿰란 공동체'에서 찾아낸 두루마리들에는 '에스더서 (Esther)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 있다. (에스더서에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말이 한 마디도 없다). 또 에세네파가 지켜야 할 '공동체 계율' 같은 기록들도 많이 있다. 이곳에서 나온 구약성서는 오늘날의 구약과 거의 다름이 없다.
단 '쿰란 공동체'를 처음 만든 '정의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다. 어떤 이는 그가 예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가 인류 전체의 구원을 바랐던 데 비해 에세네파는 자기들만의 구원을 빌었으므로, 정의의 스승을 예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정의의 스승'은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꽤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 광야에서 선교하던 세례 요한이나 근처의 요단 강에서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했던 예수도 이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는 발견된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scroll)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 뿐이며 나머지는 수천 개의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은 구약 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 등으로써, 대부분 양피 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 놓은 것들이다. '사해 두루마리'는 그 뒤로 수케닉 박사의 아들이자 1963년에 마사다 요새를 찾아낸 야딘(Yadin)이 사무엘 대사교의 두루마리를 25만 달러에 사들여, 모두를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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