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지정보/터키

[터키] 트로이


0123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 신화의 고장 트로이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공항도 없고 정기 버스 노선도 없다. 이스탄불에서 마르마라 해를 남쪽으로 끼고 돌면 자동차로 8시간 정도 걸린다.
에게 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역사적인 항구 도시로 호메로스의 고향인 이즈미르에서 해안가를 따라 북상해도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트로이라 해도 현지에서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히사를리크 트로아라 해야 겨우 알아듣는다.
우기인 지중해의 2월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눈비가 억수같이 내려 20∼30m 앞을 분간 할 수 없다. 그러다가 트로이 유적지 앞에 도착하니 갑자기 햇빛이 반긴다.
20세기 후반의 고고학 발굴사에서 트로이만큼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인류 역사의 기록을 바꾼 사건도 드물 것이다. 호메로서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신화의 내용이 훌륭한 역사적 사실로 바뀌는 순간을 인류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감동으로 지켜보았다. 그 드라마의 위대한 연출가는 독일 태생의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이었다.
슐리만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선물한 게오르크 예러스의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고 호메로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트로이 과대 망상증에 걸린 그를 이해해 주고, 그가 외우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싯구를 끝까지 들어 주던 사람은 이웃 소녀 민나였다. 민나와 사이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또 열심히 돈을 모았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를 역사적 사실로 믿게 된 슐리만은 사업을 통해 큰 재산을 모은 뒤 1866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와 발굴에 전념한다.
소아시아의 트로이 지방을 답사한 그는 종전까지 많은 학자들이 트로이 도시로 간주했던 부나르바쉬 지방을 포기하고 히사를리키를 새로운 후보지로 확신하고 발굴을 시작했다. 우선 부나르바쉬는 가파르고 경사가 심해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추적하기 위해 세 번이나 성 주위를 돌았다는 ‘일리아스’의 묘사와는 맞지 않고, 트로이의 승리가 바닷가에 있는 아가멤논의 막사에까지 들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하여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히사를리크 언덕을 트로이로 확신한 슐리만은 1871년에 그 역사적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에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그의 그리스인 부인 소피아가 처음부터 동행했다. 북쪽에서 파 들어가던 발굴 팀은 2m 지하에서 후기 그리스 양식의 기초벽을 발견했고, 상부 도시를 파괴하면서 지하로 지하로 내려가던 중 4∼5m 지점에서 올빼미 눈을 가진 아테나 여신을 발굴했다.
발굴은 사방에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남쪽에서는 태고의 지반을 찾아 경사면을 따라 성벽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을 발견했다. 서쪽에서는 대주벽을 발견하고 이것이야말로 트로이의 성벽이라고 슐리만은 확신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황금 단추, 금박 목걸이, 금관, 팔찌, 술잔을 비롯한 다량의 황금 보물이 출토되어 슐리만은 이것을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3500년 흥망성쇠 차곡차곡 간직’
트로이는 시대를 달리하는 9개의 도시가 중첩된 유적지다.
좁은 면적에 9개의 서로 다른 도시가 포개져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처럼 히사를리크 언덕 위에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거주 도시가 세워졌으며, 그때마다 선주자들의 터전은 파괴되었다.
그러니 그물처럼 얽힌 기초벽을 구별하여 어느 층이 트로이 전쟁의 무대가 된 도시인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완전한 복원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도시층을 걷어 내는 문화 파괴가 따라야 하니, 트로이 도시의 형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된다.
다만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9개 층 가운데 제7층에 해당하는 도시가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 도시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00만 리라(약 6,000원)의 입장료를 물고 유적지로 들어가면 입구의 커다란 목마가 트로이임을 알려 준다. 실물 크기로 복원된 어설픈 목마 안으로 들어가 트로이의 격렬한 함성과 종말을 되뇌어 본다.
그리스의 해상 원정(현지인들은 그리스의 해적 활동이라 묘사함)에 의해 소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문화 도시가 자취를 감추게 될 때 활약하던 목마다.
트로이 공략의 어려움을 안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따라 시논이란 스파이를 시켜 목마를 트로이 성안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목마는 아테나 여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저렇게 거대하게 만든 것은 트로이군이 성내로 운반하는 것을 막고자 함입니다. 칼카스가 예언하기를 목마가 트로이군 수중에 들어가면 트로이가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트로이에서 그 전쟁의 잔해를 느낄 수는 없다. 복잡하게 얽힌 9개의 도시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시대를 달리하는 신전과 주거지, 지하 저장고와 소극장 오디온 등이 나름대로 복원되어 있다.

슐리만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제1층의 연대는 기원전 2920∼2500년까지 소급되고 트로이 전쟁 시대의 제7층 도시는 기원전 1250∼1025년경이라 한다.
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제9층 도시는 로마의 도시로, 기원전 85년에서 서기 500년까지 번성했다 하니, 3500년의 역사가 한 언덕에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셈이다.
물론 슐리만은 신화 속의 트로이 층을 정확히 밝히지는 못했다. 그는 프리아모스의 보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제2층의 도시를 트로이라 믿었다. 그러나 후일 제2도시의 성채는 훨씬 오래된 도시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과연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는 몇 번째 도시인가? 아직 거기에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슐리만이 발굴한 성채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슐리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트로이 전설에 대한 집념에 사로잡혀 귀중한 다른 유적들을 파괴한 자로 또는 세속적인 물질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고전 문헌을 해독하기 위해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그리스어·아랍어 등을 익히고, 발굴을 위해 평생 사업을 하고 돈을 벌어 자기 목표를 성취한 드라마는 감동적이다.
멀리 에게 해로 떨어지는 트로이의 석양을 보며, 오리엔트와 그리스의 연결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한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여행지정보 > 터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터키] 아바노스 도자기 마을  (0) 2010.08.28
[터키] 보드룸  (0) 2010.08.28
[터키] 이스탄불 국립고고학박물관  (0) 2010.08.28
[터키] 캉갈온천  (0) 2010.08.28
[터키] Ozkaymak Hotel Konya  (0) 2010.08.26
[터키] Klas Hotel Istanbul  (0) 2010.08.26
[터키] GOLDEN HILL HOTEL ISTANBUL  (0) 2010.05.07
[터키] Berr Hotel Istanbul  (0) 201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