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로는 베이산이라고 한다. 요르단지구(地溝)의 북부, 요르단강(江)에 가까운 해면 약 200m 지점에 위치한다. 기후는 건조하며, 특히 여름은 찌는 듯이 덥다.
BC 4000년경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주거지가 발굴된 이래 부근 일대는 고고학상으로 중요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고대로부터 이집트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방면을 연결하는 도로상의 교역중심지로서 발전했다. 또한 전략상의 요지로 많은 지배자가 교차되었으나, 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치하(治下)에서는 팔레스타인 최대도시로 성장했다. 관개농지도 발달했으나 636년에는 아랍인(人)의 침입을 받았고, 후에는 십자군에게 점령되어, 탕크레드에 의해서 성새화(城塞化) 되었으나, 사라딘에게 약탈되었다.
1519년 오트만 제국의 일부가 되고, 한지방의 중심지로 정해졌다. 1922∼1948년에는 영국의 보호지구였다. 현재는 실험농업(實驗農業)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트셰안 [Beit She'an] (두산백과)
구약성서에서는 이 도시의 이름으로 ‘벳스안’과 ‘벳산’이 함께 사용된다. 바로 옆에는 일 년 내내 물이 흐르는 하로드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근처에는 기름진 평야가 있다. 이곳은 원래 주위보다 20m이상 높은 바위언덕이어서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요르단 골짜기 길과 지중해에서 이즈르엘 평야를 거쳐 요르단 건너편 길르앗 땅으로 이어지는 평야 길이 교차하는 등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좋은 여건 때문에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 벳스안은 전형적인 텔(유적 언덕)로서 수 차례의 발굴에서 나온 흙을 가장자리에 쌓아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넓이만도 약 13,000만평이나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이곳은 므나쎄 지파에 배정되었지만, 그곳의 거주민은 이즈르엘 평야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철병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쉽게 정복할 수가 없었다. 사울 왕은 벳스안의 불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였는데, 그의 시신은 벳스안의 성벽에 매달렸고, 그의 갑옷은 벳스안에 있는 아스다롯(Astarte) 여신의 신전에 일종의 전리품으로 바쳐졌다. 솔로몬 시대에 이곳은 지방의 12행정 구역 중에서 욕므암(Jokmeam)과 함께 므기또 다아낙(Megiddo Taanach) 지방에 속하였으며, 그리스 시대에는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또는 니사 스키토폴리스(Nisa Scythopolis)로 불려졌다. 로마 시대에 열 도시 동맹(데카폴리스)중의 하나로서 스키토폴리스라고 불렸지만, 신약성서에서는 이곳에 대한 언급이 없다.
640년 이후 움마야 왕조 시대에 아랍 도시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749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에는 폐허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벳스안은 이스라엘 최대의 고고학 공원으로서 크게 구약 시대의 텔 벳스안과 그리스 시대의 텔 이츠타바(Tel Itztaba), 그리고 주변 평지에 펼쳐진 로마, 비잔틴, 움마야 시대(2~8세기)의 도시 유적 등으로 구분된다. 최초의 유적 발굴은 미국 필라델피아 대학 팀이 주관하였는데, C.S.피셔, A.로우, G.M.피츠제랄드 등에 의하여 1921년부터 1933년까지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Y.야딘은 철기 시대의 주거층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1983년에 발굴을 시행하였고, 1989~1995년에는 히브리 대학의 A.마자르의 지휘 아래 성서 시대의 도시가 재발굴되었다. 로마 비잔틴 시대의 유적지에서는 1961~1962년에 로마식 극장을 발굴하였고, 1986년부터 지금까지 대규모의 발굴 및 복원공사가 히브리 대학과 이스라엘 고고학성 주관으로 진행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벳스안 [Beth-shean;Beth-shan] (두산백과)
[ Beth Shan ]
‘안락의 집’, ‘안전한 집’이란 뜻. ‘벧스안’과 동일 지명(수 17:11, 16; 삿 1:27; 왕상 4:12; 대상 7:29). 갈릴리 남방 22㎞ 지점의 고도(古都). 요단 계곡과 이스르엘 계곡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원래 잇사갈 지파의 영토였으나 므낫세 지파에게 할당되었다(수 17:11; 삿 1:27).
이곳 원주민들은 당시 철 병거를 사용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수 17:16). 거기에 더하여 원주민들은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함으로써’ 이곳을 기업으로 할당받은 므낫세 자손들은 그 원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삿 1:27; 수 17:12-16). 훗날 사울 왕은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과의 일전을 치루다 전사하여 그와 아들 요나단의 목이 그곳의 성벽에 내걸리는 비운을 맞았다(삼상 31:8-12).
한편, 이스라엘의 최대 번영기를 자랑했던 솔로몬 왕 통치 때에는 솔로몬의 신하인 바아나가 므깃도와 다아낙, 이스르엘 등과 함께 이곳 벧산을 관할하였다(왕상 4:12).
신약 시대에 헬라인들은 이곳을 헬라화하여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라 불렀는데, 이는 요시아 왕 때 스구디아(스키타이)인들이 이 성을 침범한 데서 유래한다(Herodotus), 그리고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지배하던 때에는 이곳 주민들이 로마 당국에 협조하면서 자치와 통상, 면세의 특권을 부여받는 로마의 자유시로서 요단 강 동쪽에 위치한 아홉 개 도시와 함께 ‘데가볼리’의 한 도시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벧산 [Beth Shan]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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