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국토의 중심부를 비스듬히 흐르고 있는 두 개의 큰 강,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이다.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강 사이의 땅)라고 불려온 이 지역에 대부분 도시와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오늘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도 바로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하고 기름진 천혜의 땅이다. 에덴동산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할 정도로 좋은 땅이다. 이곳에서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일어났고 이집트 인도 중국과 함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도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있었다. 우르는 오늘날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바스라와 나시리아 근처에 있었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이 고대 문명도시 우르를 떠나 황무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막이 오른다. 그러나 당시 고대 역사의 중심무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고 가나안은 변방에 불과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들이 등장했다.
먼저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에서 ‘아시리아’(앗수르) 제국이 일어났다. 티그리스 강변의 ‘앗수르’‘카르나’‘니느웨’ 등 (이들 도시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근처에 있었다)을 중심으로 했던 아시리아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던 무적의 정복자였다.
아시리아 제국의 위력 앞에서 변방 이스라엘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전회에 언급한 대로 아시리아 제국의 ‘살만에셀’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공격했고 이를 함락시켰다. 주전 720년대말이었다. 이로써 200년간 계속된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끝이 났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에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살만에셀’ 왕의 뒤를 이은 ‘사르곤’ 왕은 북이스라엘을 아시리아 제국 영토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역 전체를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명명했다. 따라서 그 곳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 곧,‘사마리아인’들이 되었다. 피정복민들로서 사마리아인들의 수난의 역사는 이어졌다. ‘사르곤’ 왕은 사마리아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을 아시리아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옮겨오게 했다.
아시리아 제국의 피정복민 정책의 일환이었던 ‘인구교환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넓은 지역으로 분산되었고 이로써 ‘잃어버린 이스라엘 10지파’ 전설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유입으로 자연히 혼혈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줄곧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불우한 운명을 살아가야만 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땅에는 ‘세겜’근처에 약 600명 남짓한 ‘사마리아인’들이 남아 있다. 이들은 지금도 유월절 의식을 비롯해서 자기들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주전 701년 ‘사르곤’ 왕의 뒤를 이은 ‘산헤립’은 20만이 넘는 아시리아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해왔다. 당시 예루살렘의 왕은 ‘히스기야’였다. 천하무적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사색이 되었다. 산헤립은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전승기념비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히스기야왕을 새장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은 굵은 베옷을 입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예언자 이사야가 있었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가(산헤립 왕) 이 성에(예루살렘) 이르지 못하며 한 화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가 오던 길로 돌아가리라.”(이사야 37:33∼34)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날 밤 아시리아 군대에는 갑자기 괴질이 퍼졌고 20만 대군이 몰살하고 말았다. 군대를 잃은 산헤립 왕은 황급히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늘의 새도 떨어뜨리는 위세를 떨치던 아시리아 제국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다.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기 때문이다. 주전 612년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성 ‘바벨론’을 중심으로 한 바벨론 세력은 ‘메대’와 손을 잡고 아시리아 제국의 심장부 니느웨를 공략했다. 바벨론-메대 연합군은 화공(火攻) 전법을 사용해서 불화살을 니느웨 성 안으로 쏘아댔다. 니느웨 성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고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왕은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성벽 길이만 해도 13㎞에 이르고 성벽 높이가 6m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도성 니느웨가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이로써 아시리아 제국시대는 끝이 나고 바벨론 제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주전 612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시편 137편)
시편 137편은 바벨론 근처 강변에 앉아 멀리 떠나온 예루살렘을 그리워 하며 목 메어 불렀던 이스라엘 포로들의 망향의 노래이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유대인)들이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주전 612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대사건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늘을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위세를 떨치던 아시리아 제국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제국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구약 전도서의 말씀대로 천하에 범사가 다 기한이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힐 때도 있는 법이다.
주전 612년 바벨론·메데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의외로 힘없이 무너졌다. 이로써 아시리아 제국 시대는 허망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것이 바빌로니아제국이었다. 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도 북부의 ‘니느웨’에서 남부의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사실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당시보다 약 1100년전에 ‘바벨론’에 유명한 왕이 등장했다. ‘함무라비 법전’으로 인류 역사에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었다(주전 18세기). 함무라비 왕을 전후한 시대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장악했던 권력의 핵심부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오래 가지 못했고 그 자리를 아시리아 제국이 차지해 오랜 기간 메소포타미아의 맹주가 되었다. 함무라비 왕 시대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 바벨론의 영광의 날은 다시 찾아왔다. 역사가들은 과거 함무라비 왕 시대와 1000년 뒤에 일어난 제국 시대를 구별하기 위해서,후자를 ‘신(新)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 시대라고 부른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했다. 100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다(주전 626∼539년). 그러나 이 제국은 고대 어느 제국보다도 더 큰 권세와 영화를 자랑했다. 이 제국 역사의 중심인물은 구약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이었다. 그는 제국 역사의 절반이나 되는 40년이 넘는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의 절대적 제왕으로 군림했고(주전 605∼562년) 그의 이름 뒤에는 ‘왕’ 대신 ‘대왕’(大王)이라는 호칭이 따랐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다.
주전 597년 ‘느부갓네살’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왕 여호야김이 그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여호야김 왕은 갑자기 죽고,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뒤를 이었다. 난세에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비운의 왕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석달만에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 군대에게 함락되었고 그는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호야긴 왕과 함께 수많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그 중에는 포로지에서 ‘위대한 예언자가 된 에스겔’도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포로로 잡아간 여호야긴 왕 대신 그의 삼촌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오판하고 무모하게도 ‘반바벨론 운동’을 일으켰다. 진노한 느부갓네살 왕은 군대를 동원해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1년6개월동안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고 식량과 물이 떨어진 예루살렘의 마지막날은 참으로 처참했다. 그 당시 처절했던 상황은 구약의 ‘예레미야 애가’에 잘 기록돼 있어 지금도 읽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주전 587년(혹은 586년) 바빌로니아 군대는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렸고 시드기야 왕은 황급히 피신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붙잡혀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갔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빼고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잡아갔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바빌로니아 군대는 불을 질러 아름다운 도성 예루살렘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때 솔로몬 왕이 건축했던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유다 백성이 두번째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로써 400여년동안 이어온 다윗 왕조는 막을 내렸고 유다 왕국의 역사는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많은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탈 때 지성소 안에 안치돼 있던 법궤의 행방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한다. 전설적인 이야기도 많이 생겨났고 지금도 법궤가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불태워 초토화하기 전 약탈이 행해졌을 것이며 이때 법궤도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후 법궤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없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 시대를 풍미하던 중심 인물이 있다. 주전 6세기 전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인공은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이었다. 그는 재위기간 43년동안 바빌로니아를 어떤 세력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까지 쳐들어가 이를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초토화시켰다. 이로써 다윗 왕 이래로 400년 이상 이어온 유다왕국은 끝이 나고 많은 유다 백성은 포로로 잡혀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때가 주전 580년대였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느부갓네살 왕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성 ‘바벨론’에 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웅대한 궁전들을 건축했다. 그의 왕비는 ‘메대’ 왕국의 공주였다. ‘메대’는 산악지대였고 왕비는 떠나온 고향의 산을 그리워했다. ‘바벨론’ 주위 지역은 평야라서 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왕비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기발한 생각을 했다. 큰 궁전을 짓고 그 지붕 위에 계단식으로 작은 산을 만들어 각종 꽃들과 진기한 나무들을 심게 하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아름다운 동산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벨론의 ‘공중 정원’(Hanging Garden)이다.
한편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일반적인 생각처럼 그들은 발에 차꼬를 차고 채찍질을 당하는 노예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국의 지도층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나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생활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았다(에스겔 1:1). 그발 강가는 바벨론 남쪽의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성경에는 포로 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포로민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예레미야 29장에 수록된 편지의 1절을 읽어보자.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田園)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예레미야 29:5∼6)
포로지에서 절망과 낙심하지 말고 집도 짓고,과수원도 가꾸고,결혼도 해서 자녀도 낳고,쇠잔하지 말고 번성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이것으로 비추어보면 포로들은 그발 강가의 땅을 배정받고 어느 정도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더구나 당시 바벨론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그들은 상당히 활발한 상업활동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포로지에서도 살 길을 찾아야 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장사였던 것이다.
참고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포로시기부터 나라 잃은 유다 왕국 사람들을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그것은 ‘유대인’(猶太人·Jew)이다.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 그곳은 ‘유다’지역이 되었고 ‘유다’ 출신이라는 뜻에서 ‘유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은 1600만명 정도이고 이들은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80개국 이상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영화와 권세를 자랑하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느부갓네살 왕이 죽자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불과 7년 사이에 바빌로니아 왕좌의 주인공이 3번이나 바뀌었고 정치적으로 극히 불안정하게 되었다. 제국의 말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제국의 마지막 왕은 왕위에 오를 어린 왕자를 제치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리석게도 제국 내에 종교적 분쟁을 일으켜 내부적 분열을 가져왔고 민심을 크게 잃었다.
이때 바빌로니아 제국의 동쪽 땅(오늘날 이란)에서 새로운 영웅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페르시아(바사)의 ‘키루스2세(Cyrus·고레스)’ 왕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이란 지역을 통일하고 여세를 몰아 바빌로니아 제국의 심장부 바벨론으로 진격했다. 당시 고대 기록을 보면 바벨론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고 성문을 열어주었고 페르시아 군대는 무혈입성하였다고 한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은 100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허망하게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이제 한 시대는 가고 페르시아 제국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주전 539년). 새 시대의 주역은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였다. 그는 고대의 정복자로서는 상당히 계몽적이고 관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피정복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선언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레스 황제의 칙령’이다. 이 칙령은 포로민들에게는 학수고대하던 기쁜 소식이었다.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역대하 36:23,에스라 1:2∼3)
포로민들에게 꿈과 같은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 포로민들에게는 두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첫째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실제 많은 사람이 귀향길에 올랐다. 반면 나라가 멸망한 이상 이제는 넓은 세계로 나가서 새롭게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학자들은 귀향민보다도 넓은 세계로 흩어져 나간 사람의 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산한다. 흩어진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는 시작된다.
박준서(연세대 교수·한국기독교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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