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다마스쿠스)은 오늘날 시리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오늘날은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중동지역 다른 어떤 나라보다 관계가 나빠 이스라엘 비자가 찍힌 여권을 가지고는 시리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나도 여권을 재발급 받아 출국하여 요르단의 암만에서 시리아의 국경도시 다라로 갔다. 성경에서 에드레이로 나오는 다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 강 동편에 도착하여 헤스본 왕 시혼을 물리친 후 바산 왕 옥과 전투를 벌여 가나안 입주 전에 점령한 곳이다(민 21:33∼35).
다라에서의 입국 절차는 염려했던 것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시리아에서 가장 큰 5번 고속도로를 따라 101㎞ 떨어진 다메섹으로 향했다. 차는 다메섹 가까이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부활한 예수를 만나 사울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알 키스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된 일(행 9:3∼6)을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서 다시 출발하여 다메섹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었다. 다메섹은 남서쪽에 헤르몬 산을 안고 동쪽으로는 안티레바논 산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685m의 고지에 조성된 도시로 강과 운하에 의해 물이 공급되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녹지대이다. 이 도시는 안티레바논 산맥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바라다 강변에 세워졌으며 도시 남부에는 바르발 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다메섹은 고대로부터 군사적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로가 교차한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언제나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메섹 시내에 들어서자 수도답게 시내는 매우 복잡했다. 시내 중심가에 내린 우리는 세례 요한의 무덤이 있다는 우마이야모스크에 갔다. 우마이야모스크는 가장 번잡한 옥내시장을 지나야 했는데 찰떡 아이스크림이 유명했다. 무더운 날씨에 찰떡 아이스크림을 먹은 일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마이야모스크 실내에 들어서자 중앙 좌측에 돔형으로 된 세례 요한의 무덤이 있었다. 원래 이 모스크는 시리아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세례 요한교회였던 것을 왈리드 1세가 이슬람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교회를 허물고 사원을 건설한 것이다.
본래 세례 요한은 오늘날 요르단의 마케루스에서 헤롯에 의해 순교했는데(마 14:6∼12) 그 처형의 증거로 다메섹에 주재하던 시리아 총독에게 보내졌다가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이곳 외에 알레포와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입구의 요한 성당에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 세례 요한의 시체가 여러 개로 나뉘어 보내진 것으로 여겨진다.
모스크를 나와 다시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자 바울이 걸어갔던 직가(곧은 길·행 9:11)가 일부 남아 있었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눈이 먼 채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 동안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아 다시 보게 되었다(행 9:8∼19).
오늘날 이곳 직가에서 100m 정도 골목으로 들어가면 유다의 집이 있었던 곳 지하에 아나니아 기념교회(그리스정교회)가 세워져 있어 순례객들이 예배를 드린다.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따르면 아나니아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박해가 심해지자 고향인 다메섹으로 돌아와 사역하다가 다메섹의 첫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아나니아 기념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것은 본인에게 새로운 사명감을 주었다. 예배를 드린 후 바로 앞에 있는 동문 밖으로 나오면 그 옛날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 나온 곳에 세워진 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동문에서는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이며 그 사이에는 옛날 성벽이 일부 남아 있어 당시 바울이 탈출하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교회 밖에는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 말에서 떨어지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교회 안에는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탈출하는 모습의 부조가 벽에 새겨져 있다.
다메섹은 사울이 바울이 된 제2의 출생지이며 영적으로 거듭나서 기독교를 핍박하던 자에서 복음을 위한 전도자로 새롭게 출발한 장소이다. 오늘날 회교국가의 수도가 된 다메섹에 다시 한번 복음의 바람이 불기를 간구하면서 성경의 뜻깊은 도시 다메섹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7> 4천년 고도 다마스쿠스
테헤란에서 밤 비행기로 2시간 45분만에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 도착했다. 미수교국이라 공항에서 입국 비자 받기가 쉽지않을 것으로 걱정했는데, 뜻밖에 20분도 채 안 걸려 비자를 내주었다. 통관도 무난하고 관리들도 사뭇 친절했다. 한때 ‘경색’됐던 시리아도 이제는 빗장을 많이 풀었다고 한다.
다마스커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다. 지금은 아랍어로 ‘디마슈끄’라고 하지만, 옛날엔 ‘샴 카비르’(약칭 ‘샴’)라고 했다. 어원과 관련해서는 그리스 신화의 다마스가 이곳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스켄(술 담는 부대)을 준 데서 유래(‘다마스켄’) 했다는 설과 물의 신의 아내 ‘다마키나’의 이름과 연관시켜 ‘물을 댄 땅’이란 설 등이 있다. ‘디마슈끄’는 고대 셈어 ‘디마쉬카’의 음사란 주장도 있다. 신화나 고대 셈어에서 유래를 찾을 정도로, 도시의 역사는 유구하다.
아시리아 페르시아 셈 로마 비잔틴…
흥망성쇠 거듭하며 융합문화 꽃피워
이슬람사원서 세례 요한 무덤도 ‘경배’
교황 바오로 2세 “위대한 종교공동체”
카시윤산 동남 기슭에 펼쳐진 ‘에메랄드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구타 오아시스에 자리잡은 다마스쿠스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기원전 2천년께 아람인들이 소왕국을 세운 이래 아시리아, 페르시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87년 아랍 셈족이 처음 도읍 삼아 나바티야 왕국을 세웠으나 얼마 못 가 로마제국의 내침으로 멸망한다. 뒤이어 비잔틴제국 영역에 편입되어 기원 전후 수백년 동안 그리스-로마, 기독교 문명에 훈육된다. 635년 아랍-이슬람군에게 정복되어 우마이야왕조 아랍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초기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로 떠오른다. 그러나 아바스왕조 시대에 수도가 바그다드로 옮겨가면서 지위는 떨어진다. 10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일어난 파티마왕조의 속지로 변했고, 400년 동안 십자군과 몽골군, 티무르군의 내침을 받아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 16세기 초부터는 오스만제국의 속주로 있다가 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의 식민도시로 전락했고, 1943년 시리아의 독립 수도가 되었다.
‘시대의 동반자’ ‘동방의 낙원’ 칭송
이처럼 다마스쿠스는 4천여년 동안 숱한 침탈 속에서도 폐허가 되어 터전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 속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해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 그리스-로마와 비잔틴-이슬람 문명, 프랑스 문명 등의 세례를 받으면서 여러 문명들을 융합시켜 특유의 복합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흔히 ‘시대의 동반자’, ‘동방의 낙원’이라 부른다.
중세 이곳을 찾은 아랍 시인 누룻 딘은 이렇게 읊었다. “다마스쿠스, 행운이 가득한 우리네 집, 아득한 하늘가 너머의 그 축도/ 갈대가 춤추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이 만개하고 물이 출렁이는 곳/ 현현(顯現)한 온갖 산해진미, 훗훗한 거목의 녹음에 감싸였네/ 계곡마다 ‘모세의 샘’이 솟고 화원마다 푸르름 넘치네”
역사의 고비를 슬기롭게 헤쳐온 다마스쿠스가 ‘시대의 동반자’답게 오늘까지 빛내고 있는 미덕 중 하나가 기독교와 이슬람을 한 품에 아우른 문화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해묵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에서 이 점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미덕을 잘 보여주는 몇 곳을 답사지로 잡았다.
첫 답사지로 기독교인들(시리아 인구 2천만명 중 13%)의 거주구역인 바붓 샤르크의 아나니아 교회를 찾았다. ‘교회의 핍박자’였던 성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개종해 전도사로 다시 태어난 신앙적 탄생지다. 돌계단으로 지하에 내려가면 작은 교회가 있는데, 벽에 바울의 역정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걸려 있다. 또 근처에 바구니를 타고 피신하는 바울을 그린 성화 등 유물들을 소장한 기념교회도 있다. 기독교 순례지인만큼 몇몇 외국 순례객들이 눈에 띄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구시가지 중심부의 우마야드(바니 우마야) 사원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네 번째 신성한 곳으로 알려진 이 사원은 705년 우마이야 아랍제국의 6대 칼리파 왈리드가 세운 아랍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규모면에서 유수의 대사원일 뿐 아니라, 건축술에서도 아랍 모자이크 예술의 백미다. 넓은 대리석 광장을 지나 동서 길이 130여m의 예배당에 들어서면 화려한 벽장식과 건축술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1326년 이곳을 둘러본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묘사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며 우아하고 완벽한 사원이다. 견줄 만한 사원은 어디에도 없다”고 감탄하면서, 비잔틴왕이 칼리파에게 공장 1만2천명을 보내 이슬람사원 개축을 도운 사실도 기록해놓았다. 바투타는 또 이 사원의 특출한 공덕을 기리면서 “이 사원에서의 1배는 다른 곳의 3만 배와 맞먹으며”, “세계가 궤멸된 뒤에도 사람들은 여기서 알라를 무릇 40년 동안 신봉하게 될 것”이라는 한 성훈학자의 예언도 인용했다.
이 사원이 지닌 또다른 특별한 의미를 우리는 오랜 풍상 속에서도 기독교, 이슬람교가 어우러진 현장이란 사실에서 찾게 된다. 원래 이곳은 원주민 아람인들이 하다드(비와 땅을 주관하는 최고신)를 모신 신전이었으나 로마 시대 주피터 신전, 비잔틴 시대에 세례 요한 교회로 변했다가 이슬람 시대 우마야드 사원으로 탈바꿈했다. 이를테면 중층적인 다종교 성역인 셈이다. 지금도 예배당 한쪽에는 헤롯왕에게 참수당한 세례 요한의 머리가 안치되었다는 무덤이 있다. 한 종교의 사원 안에 묻힌 다른 종교의 성자를 경배한다는 건 보통 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가능하다.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 성자들을 자기 종교 성자들처럼 경배(신앙 4조)하기 때문이다.
도시 곳곳 초기 기독교 전설 가득
실제로 2001년 5월 사원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무슬림들 앞에서 “위대한 종교공동체인 이슬람과 기독교를 존경할 만한 대화의 집단으로 만드는 게 열렬한 소망”이라고 연설해 박수갈채를 받은 바 있다. 갈등 아닌 대화가 종교 본연의 사명이 아닌가. 이 사원은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묻건대, 세계문화유산치고 이런 심원한 뜻을 지닌 곳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우마야드사원 곁에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수크 하미디야’(하미디야 시장)란 재래시장도 붙어있다. 명성에 걸맞게 갖가지 토산품과 외래 상품들로 차있다. 특히 화려하고 부드러운 ‘다마스쿠스 비단’은 유명하다. 신앙의 장소와 삶의 공간이 하나되는 이슬람의 정교합일 이념을 잘 구현한 현장이다.
해가 뉘엿거릴 무렵, 서쪽 카시윤산 중턱 전망대에 올랐다. 시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로 현대적 고층건물들이 띄엄띄엄 있다. 로마시대 성채 잔해와 바르다강이 실오리처럼 아른거린다. 지금은 현장을 찾을 길이 없지만, 이 산에는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 전설들이 깃들어 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산 어느 동굴에 피신했고, 이 산 어디에 아브라함이 탄생한 동굴과 모세의 묘가 있으며,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은신처도 있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이런 내용들이 경전 〈꾸르안〉(코란)에 실려 있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교나 기독교 발생지인 가나안, 이스라엘과 가깝고, 기원 전후해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그리스어권과 더불어 시리아권을 문화적 배경으로 기독교가 태동했다는 등의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전설을 한낱 낭설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카시윤산은 초기 기독교와 인연이 있는 성산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븐 바투타도 “이 산은 길상으로 유명하다”고 했던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어제에 얽힌 기독교와 이슬람의 어우러짐을 실감하면서, 이른바 문명간 ‘충돌’ 운운하는 현대인들의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다시금 자성해 본다. 이젠 ‘충돌’ 아닌 대화와 공존을 모색해야 할 때다. 답사가 그 모색에 일말의 단서라도 제공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무함마드 종통 찬탈’이 수니-시아파 분열의 씨앗
우마이야왕조의 100년 영화
다마스쿠스는 이슬람을 세계 제국화한 7~8세기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와 한몸의 운명 공동체였다. 이미 실크로드의 교차로에 자리잡아 로마시대부터 번영했던 고도였지만 우마이야 왕조 시대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서방 실크로드는 물론 당대 세계의 수도이자 중심이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원래 아라비아 메카에 모여살던 쿠라이슈 부족의 상인가문이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 정권이다. 시리아 태수 겸 장군이던 가문의 실력자 무아위야가 656~661년 이슬람 공동체에서 벌어진 왕위 찬탈전에 끼어들어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인척인 4대 칼리프 알리의 권좌를 빼앗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왕위 찬탈은 이른바 이슬람 역사에서 수니-시아파 종파의 분열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창시자 무함마드와 그의 일족으로 이어지는 칼리프의 신성한 종통을 가로챈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정치적 인정 여부를 놓고 인정하자는 수니파와 거부해야 한다는 시아파 세력으로 무슬림이 분열한 것이다.
정통성 보완을 위해 정복사업과 상업활동에 매진한 우마이야 왕조는 서쪽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북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북인도까지 아랍권에서 유례없는 세계 제국을 형성한다.
넓어진 교역 경제의 열매를 가장 마음껏 누린 도시는 당연히 도읍 다마스쿠스였다. 하지만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왕조에 대한 무슬림들의 증오와 의구심은 더욱 높아져갔다. 칼리프 자리를 거머쥔 무아위야 1세는 부족회의로 후계자를 정하는 관행을 무시하고 아들(야지드 1세)에게 왕위를 세습했고, 후대 왕들도 세습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아랍인들은 이 왕조를 아랍왕국으로만 부를 뿐 자신들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대의 증오는 후대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1400~01년 정복군주 티무르는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에게 불경하게 대했던 우마이야 왕조의 과거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다마스쿠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학살과 방화로 우마이야 모스크를 비롯한 도시 주요 시설이 모두 불타고, 직조공, 도공 등의 장인들은 사마르칸트로 끌려갔다. 다마스쿠스가 영원한 폐허가 될 뻔했던 이 참극은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우마이야 왕조의 700여년 전 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이란에서 무함마드의 일족인 아바스가가 정통성 회복을 기치로 반란을 일으키자 무너진다. 아바스 혁명왕조가 새 계획도시 바그다드로 도읍을 옮기면서 다마스쿠스의 오랜 영화도 끝장이 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동서양 여러 문명의 세례를 받은 고도 다마스커스에는 문명간 만남을 실증하는 유물들이 많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존도 있지만 일상 문물의 교류, 십자군 전쟁 같은 치열한 맞부딪침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만남들을 유물로 확인하려고 찾은 곳이 다마스커스 국립박물관이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한 정문에 들어서니 고풍스런 박물관 건물이 나타난다. 마리관에 들리니, 탈 카즐에서 출토된 기원전 16세기(청동기 말엽)의 채도와 10세기께 중국 당삼채가 놓여있다. 로마관에서는 눈에 익숙한 새머리 모양 물병 등의 로마 유리그릇들을 볼 수 있었다. 또 비잔틴관에는 ‘중국에서 온 다마스커스 비단’(83년)‘중국에서 온 한(漢)-다마스커스 비단’(103년)등의 설명을 붙인 비단 유물들도 선보이는 중이었다.
12세기 분열위기서 아이유브왕조 건국
3차 원정온 십자군 2만명 전멸시키고
적장 사자왕 리처드 두 번이나 구해
동서양 모두가 추앙하는 평화주의자
앞서 들른 아즘궁 박물관은 18세기 오스만 제국의 옛 총독 관저 자리로,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열탕·냉탕 뒤섞은 터키식 목욕탕, 지름 150㎝나 되는 구리 식판, 신랑·신부를 돋보이도록 만든 바닥을 20㎝나 높인 신발 등이 옛 생활문화를 생생히 보여준다. 구리 세공과 대롱불기 유리 그릇 제작, 각종 식물 무늬를 새긴 다마스쿠스 비단 같은 특산품 생산과정도 지켜보았다.
이곳 관광 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살라딘 영묘 참배다. 오후 3시께, 뜨거운 햇볕 속에서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다. 여성들은 검정 이바(겉옷)로 온몸을 가려 죽은 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시내 살라딘 광장에는 말 타고 달리는 모습을 굳힌 동상이 우뚝하다. 살라딘은 이슬람 역사상 드물게, 어찌 보면 유일하게, 동서양에서 위인으로 추앙받는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1095~1291)의 대립 관계를 슬기롭게 타개한 업적 때문이다. 두 세계 사이의 이른바 ‘문명충돌’이 아직도 계속된다는 지금 많은 이들이 그의 ‘재림’을 바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의 무덤은 문명간 화해와 어울림을 상징하는 성소인 셈이다.
살라딘(본명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1137~1193)은 이라크 티그리트의 쿠르드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살에 군에 입대해 승승장구하면서 1169년 이집트 파티마 조의 재상에 오른다. 정국 혼란을 틈타 왕조를 전복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지역을 망라한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다. 국교를 시아파에서 수니파로 바꾸고 분열 위기의 이슬람 세계를 재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재위 1169~93)
예루살렘 탈환 뒤 살육·파괴 금지
그러나 그의 결정적 운명은 십자군 8차 원정 중 가장 대규모였던 3차 원정(1189~92)과 함께했다. 최고 통치자 술탄에 앞서 용·지·덕을 겸비한 무장으로서 영국 사자왕 리처드가 이끈 십자군과 맞선 것이다.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2만명을 물 없는 곳으로 유인해 고립시켜 일격에 전멸시켰고, 아르수트 전투에서는 패하고도 전열을 재빨리 정비해 승전고를 올렸다. 유리한 전황임에도 패전한 적장에게 손을 내밀어 평화협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무모한 리처드가 야파 전투를 벌여 반격하다 낙마한 신세가 되자, “고귀한 사람은 그렇게 땅에서 싸우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기 말 두 필을 보냈다. 심지어 리처드가 열병에 걸리자 위로편지와 약, 얼음을 구해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성지 탈환’을 명분 삼은 십자군은 1차 원정에서 40일간 예루살렘을 포위해 이틀간 점령한 뒤 무슬림들을 가차 없이 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한다. 무슬림들과 함께 싸운 유대인들은 십자군 입성 뒤 장로의 지시를 받고 예배당에 모여 예배했는데, 이때 십자군은 그들을 포위하고 불질러 타죽게 한다. 지난 2000년, 꼭 900년 만에 로마 교황은 이때 비행을 사죄하는 칙령을 발표한 바 있다. 반면 살라딘은 88년만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도로 찾은 뒤 일체의 살육과 파괴를 금지하고, 포로들은 몸값만 받고 풀어주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교회를 돌려주었다. 그 뒤 700년 동안 예루살렘 길 위에는 피 한 방울 떨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살라딘은 리처드와 평화협정을 맺고 석 달 뒤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다른 곳에서 숨졌으나, 마드라사(신학교) 자리였던 이곳에 안장했다. 술탄이자 개선 장군이었건만 그의 금고에는 약간의 은 부스러기밖에 없어, 가족과 친구들이 돈을 거둬 장례비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평소 “재물 대하기를 모래같이 하는 사람도 있다”며 부와 영화를 경멸하고 근면과 소박함을 신념 삼은 그였다. 그 신념답게 무덤도 소박하다. 나무관은 입구 오른쪽에 있고, 왼쪽엔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기증한 대리석 빈 관이 놓여 있다. 십자군 지휘관들조차도 ‘고귀한 적’이라고 일컬으며 존경했다는 살라딘은 단테의 〈신곡〉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희대의 위인들과 ‘최소한의 벌을 받는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하기도 한다.
3차 십자군전쟁을 다룬 영화 〈천상의 왕국〉(킹덤 오브 헤븐)에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스오드는 살라딘을 아랍, 무슬림들의 자부심과 위엄을 지켜준 영웅이자 문명, 국가간 대화를 주창한 평화주의자로 평가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은 전쟁과 광신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대화를 통해 함께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바로 감독 리들리 스콧이 영화를 제작한 의도라고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아메리카-이슬람위원회로부터 ‘균형 잡힌 훌륭한 영화’란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욕되게 하는 망령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1920년 7월, 시리아가 프랑스의 위임통치 아래 들자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프랑스 점령군 사령관 앙리 구로는 먼저 살라딘 무덤을 찾아가 “살라딘이여, 우리는 돌아왔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이슬람 전체를 기독교가 지배한다는 의미”라고 선언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비슷한 망령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할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오늘의 비극이다.
단테 ‘신곡’에선 ‘고결한 이교도’로
9·11 테러나 이라크 전쟁을 기독교-이슬람 문명간의 불가피한 ‘충돌’로 왜곡하면서 원인을 십자군 전쟁에서 찾는 이들이 있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사실 이 전쟁은 ‘성지 탈환’이란 종교적 열광을 방편으로 내건 전쟁이다. 그 본질은 신흥 유럽과 아랍-이슬람 세계가 지중해 일원의 패권과 이권을 놓고 다툰 전쟁이지, 오래도록 공생공영해 온 두 종교나 문명 간의 대립·충돌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도 우리네 학계나 여론은 이슬람교를 폭력의 종교로 오도하면서 ‘충돌론’을 금과옥조처럼 맹신하는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일각에서 유럽 중심 주의를 비판하면서 십자군 전쟁의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원로 서양사학자 한 분은 얼마 전 발표한 글에서 지적했다. “서유럽 성직자와 귀족들이 합작해 엮은 성지 탈환 전쟁ㅡ십자군 원정ㅡ이란 곧 동방 이슬람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우월에 대한 서유럽의 질투와 갈망이 빚은 발작이다.” 되새겨 볼 만한 성찰이다.
마지막 날 저녁, 현지 안내원은 일행을 집에 초대했다. 그는 팔미라의 유목민 가정 출신으로 한때 캐나다로 이주해 그곳 여인과 결혼했으나 아이 갖기를 거부해 이혼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대가족제를 선호하는 아랍인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로 용납될 수 없다. 손수 음식상을 차려 환대하는 그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호텔에 돌아오니 저녁상에 난데없는 쌀밥과 쌈배추가 있었다. 한국인 기호를 헤아려 호텔 쪽에서 특별히 차진 이집트 수입쌀과 배추를 구해 준 것이다. 이게 바로 아랍 특유의 손님 대접이고 친절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교황청, 아랍 지배한 몽골과 동맹하려 직통외교
십자군 원정과 실크로드
1096년부터 1365년까지 260여년이나 계속된 십자군 원정은 실크로드 역사에도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성지 탈환과 아랍 무슬림 격파를 내걸고 사상 처음으로 유럽쪽 교회와 나라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 아시아 국가와 정치적 연대를 꾀했기 때문이다. 그 발단은 십자군의 만행과 행패에 분노한 아랍 세계가 12세기 중반부터 아이유브 왕조의 튀르크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성전(지하드)을 본격화한 데서 비롯된다.
살라딘의 대반격으로 빼앗았던 성도 예루살렘을 잃고 진퇴양난에 빠진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와 유럽 동맹국들은 실크로드 너머 동방의 몽골 제국과 연합 전선을 모색하게 된다. 1240년 동유럽을 휩쓴 몽골 장군 바투의 대원정으로 존망의 나락에까지 떨어졌던 유럽이 사탄의 무리로 간주했던 몽골에 추파를 던진 이유는 간단했다. 바투의 사촌뻘인 홀레구가 1253~58년 아랍 대원정으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일칸국을 세우면서 십자군의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즈음 동방에서 온 기독교 사제왕 요한이 예루살렘 탈환을 꾀한다는 소문까지 입수한 교황청은 몽골 제국을 개종시켜 십자군에 합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 합종연횡을 위해 13세기 중엽 이래 약 100년간 카르피니, 루브루크, 몬테코르비노 같은 교황청과 유럽 동맹국의 숱한 사절들이 몽골제국의 심장 원나라로 파견되어 포교, 문화 활동에 나선다. 원 왕조의 개종 거부와 교황에 대한 복종 요구로 고대했던 연합전선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상 처음 유럽~중국의 직통 외교가 이뤄지면서 실크로드 동서 교류는 유례없이 확장되고 질적으로 약진하게 된다.
특히 13~14세기 이란, 이라크 지역을 지배한 일한국은 유럽의 십자군 동맹국들과 시종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십자군과 대치하던 이집트, 근동지역의 맘루크 왕조와 시종 적대관계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형님뻘 되는 원 나라와 가까웠던 일한국에는 중국인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서유럽, 중국의 문물 교류를 잇는 중개지로도 번성했다.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 중국 발명품들의 본격적인 전래가 이뤄졌다. 실크로드 연장선인 지중해 팔레스티나 레반트 지역과 상도 베네치아는 무역 호황을 누렸고, 그 과실은 르네상스를 열어젖히는 역사적 토대가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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